【설교】시편 시리즈(8)-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필기를 참고
1.서론
a. 인생의 결과는 결코 그의 깨달음을 넘을 수 없습니다. 밤낮으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은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b. 비전신학론은 깨달음의 신학입니다. 깨달음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c. 깨달음의 세 가지 개념은 앎(나는 안다), 이해(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통찰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서 아는 것까지, 아는 것에서 이해하는 것까지, 그리고 이해하는 것에서 본질을 파악하는 것까지 세 단계가 있습니다.
d. 무지한 사람은 비참함과 고통만 느낍니다. 깨달음을 잃은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e. 사람들이 비극 속에 사는 이유는 실제로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f. 우리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력을 키우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하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7. 좋은 학생들은 깨달음을 통해 이해력을 얻지만, 부족한 학생들은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고 이해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g. 이해가 없으면 사람들은 전략이 없고 화를 잘 냅니다. 이해력을 키우는 사람은 통찰력을 얻고 복을 받습니다.
2. 성경의 말씀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시편119:144)
기도
주님,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저를 살아 있게 하사 당신의 말씀에 주의 깊게 순종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당신의 율법에 있는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제 생명은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의 말씀대로 저를 소생시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대로 살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오늘 제 마음을 열어 주셔서 당신의 형상대로 살 수 있게 하소서. 지혜와 총명, 지식과 총명을 얻어 본질을 깨닫게 하소서. 주의 법도와 규례를 깨닫게 하소서. 주의 계명을 알게 하소서. 나의 소망도 주께 있사옵니다. 하나님, 저는 지식도 지혜도 없습니다. 제 마음과 총명을 열어 주소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의 영광스러운 형상대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 저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고, 멸망에서 구원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성경말씀의 배경
a. 이해력은 어떻게 얻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주가 임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력을 위해 기도하여 그분의 말씀에 주의 깊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b. 선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고 싶다면 이해력을 키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5. 고난은 나에게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해 줍니다.
a. "자기 동기 부여"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잘 다스려질 때에만 유용합니다.
b. 고난은 저에게 유익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배우는 태도를 바로잡게 해 줍니다.
c.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가 부족함을 알고 있으며, 다시 배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6. 하나님의 계명을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a.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b. 고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으며, 배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c. 배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없다면, 사람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d. 하나님의 계명은 단지 계명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왜?"라고 묻지 마십시오. 올바른 학습 태도는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입니다.
7. 당신의 규례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a. 규례는 더 높은 차원의 법칙입니다. 만물에 내재된 법칙입니다.
b. 온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일단 순종하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c. 비전신학론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신학입니다. 즉,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d. 하나님의 법은 의롭습니다. 우리는 동의하거나 반대할 권리가 없습니다. 단지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8. 결론
a. 살고 싶다면 이해력을 높여야 합니다. 이해력을 갈망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b. 치유에만 국한되지 마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덧없는 순간을 쫓지 마십시오. 게으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게 하는 데 시간을 따로 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십시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저는 "제게 깨달음을 주시면 제가 살리라"라는 제목의 매우 중요한 설교를 전합니다. 중국 예정론은 삶에 특별한 중점을 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삶이 단순히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다면 잘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중국 예정론이 죽음과 천국에 가는 신학이 아니라 삶의 신학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시편 119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시편의 주제는 "제게 깨달음을 주시면 제가 살리라"입니다. 사람의 삶의 결과는 결코 그 사람의 이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삶의 결과는 결코 그 사람의 이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해하셨나요? 이 깨달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매우 다릅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추하고, 어떤 것은 멋지고, 어떤 것은 추합니다. 차이가 엄청나죠. 예를 들어, 이 사람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그냥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요? 그렇죠?
예를 들어 볼게요. 저보다 한 살 많은 사촌과 한 살 어린 사촌이 있어요. 좋은 친구여야 하는데 뭔가 이상해요. 마치 원수 같아요. 왜 원수 같죠? 이해되세요? 정말 멍청한 짓이에요! 사소한 일로 원수가 된 거예요.
그게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을까요? 어느 날, 삼촌이 돌아가셨고, 삼촌의 두 아들이 삼촌 묘소를 찾아갔습니다. 큰아들이 "아빠, 담배 한 갑 사드렸어요."라고 말했죠. 둘째 아들은 이 말을 듣고는 거절했습니다. 왜냐고요? 자기가 담배를 사지 않았거든요. 둘째 아들이 담배를 사줬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아빠가 안 샀잖아."라고 말했어요. 두 형제는 무덤 위에서 서로 주먹질을 하고, 제 팔과 머리카락을 잡고, 무덤 위에서 싸웠습니다.
이런 머리로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요? 그렇죠? 그는 머리가 없어요! 그의 아버지는 관에 누워 두 아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죽은 사람이 볼 수 있을지는 모르죠. 그저 슬퍼하고 있을 뿐이죠, 그렇죠? 이런 일이 마을에서 흔한 일인가요? 물론이죠. 왜 그럴까요? 모두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이해는 사람과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훗날 마을의 어떤 사람이 결혼했는데, 두 형제가 싸울 것을 알고 형이 앉을 테이블과 동생이 앉을 테이블을 멀리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둘은 각자 와인 한 병씩 가져갔고,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이건 원수 같군요.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사람의 삶의 결과는 결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저는 다투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고, 적을 만들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닙니다.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이 세상에 온 겁니다. 정말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시편 119편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내게 총명을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살리라." 총명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저 살아 있는 것들을 보세요.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진 저것들은 활발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죽어 있지 않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면, 그들은 원망하고 총명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 바로 총명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도 그중 한 명입니다. 성경 공부를 위해 밤새도록 휴대폰을 켜 두었습니다. 밤새도록 듣고 있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도 여전히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밤낮으로 묵상하지 않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우리는 시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복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해 불평하지 말라",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로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니 주 외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맞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중 어느 것이 이해가 아닌가요? 모두 이해입니다.
오늘,우리의 이해를 깨우치고 하나님 말씀을 알기 시작합시다. 이해하셨나요? 복 있는 사람이 되세요. 그러므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전신학론은 이해의 신학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아, 제 말이 너무 어려워요. 완전히 길을 잃었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 누가 말하는 걸까요? 악마죠, 그렇죠?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논리는 어리석고 삐딱할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벌거벗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옷을 입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중 누가 옷을 입고 태어나나요? 다행히 우리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옷이 목을 조일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벌거벗고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세요. 몇 개일까요? 아이들은 모릅니다. 손가락 하나도 모릅니다. 몇 개일까요? 손가락 두 개도 모릅니다. 사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가 배우지 않은 걸까요? 모든 것은 배웁니다. 어린 흑인 아이를 중국 가정에 두면 유창한 중국어를 배우게 되겠죠? 아이가 얼마나 잘 배우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럼, 깨달음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오공 오능이 아닙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기억하세요, 깨달음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세 단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어를 배우고 싶으신가요? 조금 어려워서 중국어가 정말 어렵네요. 세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다", 하나는 "이해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질"입니다. 이 세 단어는 "안다", "나는 안다", "이해하다", "나는 이해한다"입니다. 그리고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통찰력"입니다. 자, 이제 영어를 배워 봅시다. 안다, 이해하다, 그리고 통찰력. 이 세 가지가 이해의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아는 상태에서 이해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해에서 본질을 파악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맞죠?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의 삶은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무지합니다. 그러니까 삶은 이해에 관한 것입니다. 알몸으로 태어난 통통한 아기가 귀여워 보이는 것은 그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과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귀여워 보이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낳고 나서 놀아주지만, 자식들은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명심하세요,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살 겁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머릿속에 크고 벌거벗은 아기, 이른바 '거대 아기'가 있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자는 멸망할 것입니다. 무지한 자는 경쟁만 하고, 오만하고, 고통받으며 비참하고 외로운 삶을 살 뿐입니다. 이해력을 잃은 자는 죽습니다.
그러니 인생은 배움이 필요합니다. 배움은 중국 운명론의 정수입니다. 진심으로 모든 사람이 자녀를 우등생으로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하지만 가난한 학생이 된다면, 세상에, 어떻게 될까요? 부모에게 매달리며 살점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결국 뼈마저 남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갉아먹을 것입니다. 이해력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력이 부족한 것은 참으로 파괴적입니다. 부족하더라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부족하고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자, 시편 119편을 쓴 시인을 아십니까? 시편 119편은 가장 긴 시편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그는 이해력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오늘 말씀드립니다. 인생의 비극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자신의 더럽고 본능적인 생각을 진리처럼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렇죠? 인생은 비극입니다. 그래서 고집 센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고집 센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고집 센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고집 센 사람들은 "아, 누가 이런 사람이 아니겠어요? 나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누가 이런 사람이 아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맙소사! 그는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레이인들은 다르죠, 그렇죠? 백인 서양인들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많은 것을 기준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방법은 없겠죠? 그는 고집이 세고, 조사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고, 그저 자신이 믿는 것에만 매달립니다.
배움이 뭔지 아세요? 배움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자기 것만 배우려고 애씁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 자기 자신도 "무(無)"가 됩니다. 삶은 이해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삶은 이해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 지혜, 지식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육신은 본래 그것들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부족한 것은 충분히 쉬운데, 섹스만 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이해가 없다면 남는 건 섹스뿐입니다. 아, 섹스만 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것을 하체로 생각하는 거죠. 당신에게 남은 게 섹스뿐이라면, 학교에서 성교육 수업을 듣고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마치 동물이 되는 것과 같지 않나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태입니다.
비전신학론은 이해의 신학, 즉 산 자의 신학입니다. 산 자의 신학을 이해하시나요? 우리 시대에 비전신학론은 심오한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죽은 자의 신학을 산 자의 신학으로 바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구를 섬기며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제가 그에게 간식을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식사 후, 그는 자리에 앉아 숨을 쉬기 시작했고, 숨이 막히고 가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를 위해 기도하자 그의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그는 즉시 "있잖아요? 저는 목사님들을 많이 알고 있고, 목사인 친구들도 많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많은 기독교 목사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제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그게 무슨 소용이냐?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라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전혀 쓸모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고, 천국에 가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는 겁에 질렸습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그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학식이 높고 박사 학위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우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서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좋고, 이치에 맞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음, 그건 깨달음의 신학이 아니라 사후 천국에 간다는 이론입니다. 정말 비열한 주장입니다.
제가 왜 중국의 예정론이 미래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할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학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학이지,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신학이 아닙니다. 물론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곳에 갈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을 설교하겠습니까?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설교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아, 저는 천국이나 지옥에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가본 적이 없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헛소리일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래에 "어제 예수님을 봤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진 있으세요?" "없어요." "왜 사진을 안 찍으셨어요? 왜 안 찍으셨어요? 예수님 사진이 있는데, 나중에 보여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그는 몰랐습니다. 그는 이 모든 헛소리를 계속 지어냈어요.
나중에 제가 그에게 말했어요. "말씀드리자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면 죽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겁니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도 귀신도 아니었다면 사람도 귀신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갈 겁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떠오르네요. 이해는 얼마나 중요한 걸까요?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 해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존엄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해와 율법과 규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물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해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진정으로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무엇을 하든,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회계사라면 이해가 없이는 일을 잘할 수 없습니다. 목수라면 이해가 없이는 캐비닛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경험, 두 가지 경험, 또는 여러 가지 경험에 집중합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그건 신학이 아니죠?"
"선생님, 이번에 제가 트림을 하는 게 왜 문제입니까? 선생님, 어제 종일 기도했는데 트림을 전혀 안 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사실, 중국 예정론은 트림이나 방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에 관한 것입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번에 기도했을 때는 바로 나았는데, 이번에는 바로 나지 않았습니다." 중국 예정론은 바로 나거나, 바로 나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번에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 말씀을 깊이 연구합시다. 하나님, 제게 깨달음을 허락해 주세요! 당신의 계명을 알고 배우게 해 주세요. 당신의 규례를 알게 해 주세요.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순종하게 해 주세요. 축복 속에 살고, 저주에 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다투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잠깐 들어보세요. 부부가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다투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그들이 모두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한 자매가 목사님께 이 문제에 대해 물었고, "결혼하지 않으셨으니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라고 덧붙였습니다. 무엇을 이해하십니까? 결혼 여부, 맞습니까? 남자와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그게 전부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이것이 신비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님, 보세요, 우리 성생활은 조화롭지 않아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좋은 성생활을 할 수 있는지 가르쳐 드릴 수 있겠어요? 그렇죠? 중국 예정론은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아요. 당신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당신의 개인적인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당신의 이해 수준으로는 성(性) 외에 무엇을 더 공부할 수 있겠어요? 정말 답답하죠?
엄마와 딸의 다툼은 모두 사소한 문제들입니다. 왜냐고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결국 다 그런 거죠. 혼란스러워하는 어떤 사람이 생각납니다. 한 의사는 이를 뽑으라고 하고, 다른 의사는 신경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기도해야 할까요, 신경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발치해야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기도하면 나아지기도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재발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해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부족하면 화를 잘 냅니다. 이해가 화를 내면 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이해하셨나요? 결국 모든 것은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해력을 키우고 밤낮으로 명상하세요. 그러면 정신이 맑아질 겁니다. 정신이 맑아지면 축복을 받을 겁니다. 더 이상 화를 내거나 화내지 않을 겁니다. 이해하셨나요? 그러니까 축복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까요? 저는 성경 공부를 할 때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죠? 느헤미야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다니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다윗에게서는 배울 수 있지만 사울에게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 교육에 관해서,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나요? 많은 아이들이 부모 때문에 망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국제 학교에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제 학교에 보내든, 우주 학교에 보내든, 심지어 화성에 보내든, 그들의 교육은 그저 그런 것일 뿐입니다.
우리 자매들 중 일부는 부모님 때문에 뉴질랜드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헛소리를 하러 갔다가 호주로 보냈습니다. 헛소리를 하러 갔다가 싱가포르로 보냈습니다. 싱가포르나 싱가포르에서는 그런 게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죠? "포자신"에 가도 소용없는데, "싱가포르"는 더더욱 그렇죠. 학습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아이의 어머니는 학교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학교가 아이의 학업 성공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본질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파악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겉핥기식일 뿐입니다.
그러니, 좋은 학생은 깨달음을 얻는 학생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좋은 학생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쁜 학생은 선생님에게 혼란을 겪는 학생입니다. 아이들을 이 수업 저 수업에 등록시키면 혼란스러워하고 깨달을 시간조차 없습니다. 이 수업 저 수업에 다니지만 깨달을 시간은 없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잘 가르치고, 그들이 밤낮으로 명상하는지 보세요.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돈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지는 당신의 운에 달려 있습니다. 깨달음을 위한 시간은 없고, 오직 돈, 돈, 돈, 돈만 있을 뿐입니다. 제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 이야기했나요? 만약 당신이 돈에 돈을 쏟아붓는 타입이라면, 제가 말하는 건 바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보야. 이해하셨나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해력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인생에서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배우는 것과 강의를 듣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배우는 건 배우는 것이지만, 강의를 듣는 게 꼭 배우는 건 아닙니다. 저기 앉아 있는 아이를 본 적 있나요? 수업 시간에 첫 문장도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고, 8시부터 9시까지, 그리고 9시부터 10시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앉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앉아 있고, 그냥 하루 종일 앉아 있고, 또 하루 종일 앉아 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지나고, 1년, 2년, 3년이 지납니다. 이 9년간의 의무 교육은 정말 의무적이지 않나요? 다 헛수고입니다.
그러니 사물을 이해하는 것과 삶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는 교육을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질병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평생 동안 질병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질병은 영적인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중의학의 악기(邪氣) 개념과 기독교의 악령(邪靈) 개념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102과가 제가 생각해 낸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다시 한번 이해해야 합니다. 선생님, 암탉이 병아리를 설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그냥 이해하세요. 먹거나 마시지 말고, 계란 몇 개만 먹고 이해하세요. 103과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 공부의 기본 원리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을 다룹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우리는 그것을 성취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행과 복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길입니다.
그러니 축복을 이해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저주도 이해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의 본질이자 삶의 법칙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상황에 직면하지 않습니까? 온갖 상황에 직면하려면 이해가 필요합니다. 악한 사람을 볼 때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그 악한 사람이 이미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을 현실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현실적인 길이 뭔가인 척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렇죠? 하루 종일 벽돌을 치는 것은 가짜 벽돌입니다. 가짜 벽돌은 부딪히면 깨지고, 진짜 벽돌로 대체하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속임수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화를 잘 냅니다. 이해 없이는 전략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전략이 없으면 절망이 있습니다. 절망은 화를 돋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고함치고 분노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벌거벗은 아이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의 말씀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시편119:144)
기도
주님,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저를 살아 있게 하사 당신의 말씀에 주의 깊게 순종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당신의 율법에 있는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제 생명은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의 말씀대로 저를 소생시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대로 살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오늘 제 마음을 열어 주셔서 당신의 형상대로 살 수 있게 하소서. 지혜와 총명, 지식과 총명을 얻어 본질을 깨닫게 하소서. 주의 법도와 규례를 깨닫게 하소서. 주의 계명을 알게 하소서. 나의 소망도 주께 있사옵니다. 하나님, 저는 지식도 지혜도 없습니다. 제 마음과 총명을 열어 주소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의 영광스러운 형상대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 저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고, 멸망에서 구원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말씀의 배경
오늘 주제는 좋은 것 아닙니까? 오늘 주제는 좋습니다. 살아있는 죽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들으십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중국 예정론의 구원 핵심 개념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죽어서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살면 반드시 예수님께로 갈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늙은 말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그 늙은 말이 가짜 늙은 말, 늙은 당나귀라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신은 늙은 돼지였군요. 아, 이 생명은 자랐군요. 돼지의 형상대로 살면 돼지가 되고, 소의 형상대로 살면 소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뱀의 형상대로 살면 뱀에게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면 하나님께로 이어집니다.
좋아요, 이 구절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누가 시편 119편을 썼을까요?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119편을 통해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뭐라고요? 이 구절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포로 생활 복귀자들은 큰 희망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자신들이 빠졌던 그 구덩이에 다시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선지자 말라기와 학개, 그리고 스가랴를 생각해 보세요. 느헤미야는 이 세대의 선지자들과 지도자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계속 한숨을 쉬며 "당신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제가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걸 들어보셨나요? 아,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정말 이해력이 뛰어나시네요. 이 뇌는 어떤 종류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당신의 뇌는 수박인가요, 아니면 겨울 멜론인가요? 음, 전부 돼지 뇌만 합니다. 돼지 뇌만 합니다. 하지만 그 뇌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돼지 뇌인가요, 아니면 이해력인가요?
그러니 느헤미야, 스룹바벨, 학개, 말라기, 스가랴 등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뇌가 망가졌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망가진 뇌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주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저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고난을 겪었던 포로였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67절: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왜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이해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하루 세 끼를 먹고 두 번 자는 것이 밤에는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에는 스트레칭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마사지 의자에 앉아 쉬는 게 최고죠. 정말 멋지지 않나요? 빚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아침에는 커피 한 잔, 저녁에는 양고기 수프. 아, 정말 멋지네요!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실천합니다. 정말 멋지네요. 아내가 셋이고 첩이 넷이나 있다니. 정말 멋지네요! 인생 참 좋죠! 맛있는 음식 먹고, 술 마시고, 저녁에는 와인 한 잔도 마셔요. 아, 인생 참 좋죠.
이 시인도 아마 이런 상황에서 살았을 거예요. 분명 부유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부자는 오늘 아침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어요. 왜냐고요? 전날 밤 너무 늦게 자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거든요. 제가 물어보면, 일본군이 쳐들어왔어도 일어났을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일어났을 거예요.
이 시인은 충만한 삶을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좋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좋은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건 나쁜 깨달음이에요. 이해해. 야, 바빌론 악마들이 온다. 알고 있었어? 바빌론 악마들이 정말 온다! 쾅, 쾅, 쾅,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있어. 쾅, 쾅, 쾅, 유다를 파괴하고 있어. 그리고 잘사는 사람들, 심지어 아내가 셋이고 첩이 넷인 사람들까지 모두 잡아가고, 유대인들처럼 낙타 꼬리에 손을 묶고 있어.
아, 그들은 바빌론까지 걸어갔어. 고속철도를 탔다고 생각했어? 그들은 바빌론까지 걸어갔어, 한 걸음 한 걸음. 무슨 일이 일어났어? 악마들이 온다! 악마들이 온다! 바빌론 악마들은 일본 악마들과 거의 똑같아, 그렇지? 아니면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요나라의 몽고 악마들, 모두 똑같아. 송나라 황제를 잡아가서 손을 묶고 말 꼬리 뒤에 따라다니게 하고 있어! 그렇지?
어때? 그게 뭐였더라? 이제 기억이 난다. 아, 아. 그때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아,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께서 내게 깨달음을 주시기를. 그가 한 말을 생각해 봐. "내 고난이 내게 유익하니 주의 율례를 배우게 하려 함이니이다."
일본 침략자들이 쳐들어왔다. 내가 배우고 싶었을까? 네, 그랬다. 다행히 나도 같은 일을 겪었다. 일본 침략자들이 왔지만, 악마는 그러지 않았다. 실업이 찾아왔다. 중년의 위기. 중년의 위기가 뭔지 아나? 중년의 위기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예전에는 돈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제 시간이 생겨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이 저자는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아직 어린아이였다. 70년간의 포로 생활 끝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왔다. 그는 돌아왔다. 이 요약은 이렇다. 신이시여, 고난이 내게 유익합니다. 고난을 겪기 전에는 길을 잃었었다.
말씀드리건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이 말은 절대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죠? 맞아요. 호사스러운 삶을 살면서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악마가 들이닥쳐야만 배울 수 있죠. 노예처럼 고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뭐가 두려운가요? 어떻게 이런 깨달음이 생겼을까요? 그냥 이렇게 된 겁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잘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 제게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 당신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하여 제가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제 삶은 거의 먼지 속에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저를 소생시켜 주십시오. 예전에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시편 119편을 듣곤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아멘"이라고만 합니다. 일어나세요. 왜죠? 설교는 끝났는데, 깨달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전혀 이해가 안 돼요. 대각성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고난을 겪기 전에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게 깨달음을 주세요. 제게 깨달음을 주세요. 제게 분별력과 지식을 주세요. 자, 오늘 세 구절을 읽겠습니다. 1절, 73절: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제게 깨달음을 주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이해하시겠나이까? 네, 주의 계명을 배울 수 있습니다. 2절, 125절: 저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제게 깨달음을 주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3절, 34절: 제게 깨달음을 주사 주의 율법을 준행하고 전심으로 지키게 하소서. 4절, 144절: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니, 제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
그 시편 기자가 이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모든 것은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인간 여러분, 삶을 살아가는 열쇠는 이해에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살고 싶고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에 따라 살고 싶다면 이해력을 키우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력뿐만 아니라 행동력도 키워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좋아요,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제가 말을 많이 안 했는데 왜 벌써 50분이 넘었을까요? 너무 오래 걸렸네요. 이런. 좋아요, 빨리, 빨리 해 봅시다. 왜 이렇게 중요한 것에 대해 이렇게 빨리 이야기하시는 거죠? 아까 요리들은 다 양념, 양념이었어요. 중요한 건 좀 이해하기 어렵네요. 먼저 짧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말했으니, 기본적인 논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은 제게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제게 유익합니다. 이제 이해하셨나요? 정말 조금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가 아프다는 것은 이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생님, 배가 아픕니다. 왜 배가 아플까요? 생리가 시작됐거든요. 남편이 이해력이 부족해서요. 아, 저는 실업자라서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매우 어렵습니다. "아, 그냥 자기 인식에 의지해야겠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업 관리자라면, 자기 훈련이나 자기 동기 부여를 절대 믿지 마십시오. 사람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동기 부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의 성품과 본성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기에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고통을 조금 겪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죠? 왜 그럴까요? 고통을 조금 겪게 하는 것이 그에게 유익합니다. 하나님은 잔인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십니다. 그는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피투성이로 만들 수 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은 모두 저처럼 구두쇠입니다. 저는 백수입니다. 아, 이 성경 구절은 중국의 운명 신학을 드러냈습니다. 어떻게 전에는 이런 이해가 있었을까요? 저는 이런 이해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고난은 제게 유익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늘 제가 "선생님, 저는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악마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악마가 오든, 일본 악마가 오든, 독일 악마가 오든 상관없습니다. 악마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악마가 온다 해도 좋은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고난은 저에게 좋은 일입니다. 왜냐고요? 바로 하나님의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은 "나는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듣고 옳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악마를 창조하셨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경영직이나 CEO 같은 직책을 맡았습니다. 나중에 그 CEO는 세상을 떠났고, 직장도 잃었습니다. 그녀는 저와 비슷한 나이, 40대였습니다. 세상에. 예전에는 캠퍼스나 직장에서 걸어다닐 때 정말 다정했고, 모든 CEO들이 그녀를 "CEO"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 머리는 부풀어 오르고 구멍이 뚫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실업자였고, 중년의 위기,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께 박수를 보내주세요! 저는 살아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게 이해력을 주세요. 그러면 저는 살아있습니다! 고통은 제게 좋은 것이고, 저는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시죠? 그렇죠? 고통은 좋은 것입니다. 고통을 겪고 나면 하나님 외에 누구를 의지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렇죠?
그때 당신이 제가 그런 상태였다고 말씀하셨을 때, 세상에! 제 눈은 완전히 어두워졌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온통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의 공부에 대한 태도가 왜 틀렸을까요? 전에 그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 어때요? 제 태도가 틀렸다면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었겠어요? 지금은 정말 부풀어 올랐습니다. 아,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마귀들이 와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일본의 마귀들이 와도, 지옥의 마귀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 정말 오만하게도, 스승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승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압니다. 당신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요. 저는 아팠습니다. 정말 끔찍하게 아팠습니다. 아, 고통이 너무 심해서 얼굴은 창백해지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목사로서, 누구든 온 마음을 다해 섬겨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상처가 아문 후에도 그 고통이 아직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처가 아문 후에 그 고통을 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편 119편을 쓴 노인과 같습니다. 그는 분명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알고는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계명을 배울 수 있도록 제게 이해력을 주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의 "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묻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위해 중국 운명신학에 왔습니다. 저는 당신이 배우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 경영 철학입니다. 당신은 노예적 본성을 가지고 있고 강요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강요할 수 있다면, 다행히도 당신은 시편 119편의 저자입니다. 만약 강요할 수 없다면 시편 120편으로 가십시오.
좋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계명을 배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총명을 주십시오. 이 구절은 어디에 있습니까? 73절입니다. 당신의 계명을 배울 수 있도록 총명을 주십시오. 왜냐고요? 고통이 당신을 배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이 당신은 배울 수 있었습니까?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당신은 배울 수 있었습니까? 이제 저는 배웠습니다. 하나님, 제가 배우고 나면 온몸이 아픕니다. 머리카락. 맞죠? 머리카락 빼고 온몸이 쑤시네요. 세상에! 성경을 펴고 몇 구절도 못 읽었어요. 맞죠?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틱톡만 보고 멍하니 있거든요. 그 사람 머릿속이 너무 에너지가 넘치네요.
하나님, 당신의 계명을 배울 수 있도록 제게 총명을 주세요.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총명을 주세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이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처음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훨씬 뒤늦게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읽는 순간 이해한다면 왜 굳이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 하나님, 제게 깨달음을 허락해 주세요.
여러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공부하다 보면 어떤 계명에는 동의하고 어떤 계명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제게는 동의하지 않을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잃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이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배우는 태도가 없다면 결국 머리만 부풀어 오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배우는 태도가 없다면, 일단 배우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이 되어 평생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배워야 할까요?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하셨나요? 왜라는 질문을 너무 많이 던지지 마세요. 그러면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배울 때, 하나님의 계명은 그저 명령일 뿐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마세요. 이유가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배우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해야 한다면, "하나님, 어떻게 당신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세요. 그러므로 중국 예정론은 실천적인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일단 "이거 참 좋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실천하고 나면 "이거 참 좋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절대 독선적이지 마세요.
하나님께 기도하여 당신의 증거를 알 수 있도록 이해력을 주소서. 명령으로 시작하지 않나요? 그냥 행하면 됩니다. 아, 증거라니! 증거란 무엇일까요?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은 더 높은 차원입니다. 당신의 증거를 아는 것은 배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는 것. 이것은 125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종이니, 제게 총명을 주셔서 당신의 증거들을 알고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증거는 만물을 지배하는 법칙입니다. 증거는 참으로 심오하며, 이러한 명령들로부터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요약하고 더 높은 차원, 즉 증거라고 불리는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까?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종이니, 주의 말씀을 우리 발에 등이 되게 하고 우리 길에 빛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계시되면 빛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말씀드리건대, 간증은 더 높은 차원입니다. 간증은 이 계명 안에 내재된 율법입니다. 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저를 돕고 계십니다. 제가 빠진 구덩이에서, 저주의 붉은 선에서 저를 구원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발 당신의 간증을 알 수 있도록 이해력을 주십시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본질을 파악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저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또한 "하나님, 제가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할 수 있도록 이해력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중국 예정론이 왜 그토록 강력한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중국 예정론은 매우 실용적입니다. 실용적입니다. 그래서 어제 친구가 찾아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설득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에게 설명했더니 거의 팬이 됐죠.
왜냐고요? 우리는 잠에서 깨면 이해하거든요. 왜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모르고 프로그램에 버그가 가득하다면, 모든 게 버그투성이가 되는 거죠. 모든 버그, 컴퓨터 버그, 소프트웨어 버그를 고치고 나면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더 빠르고 쉽게 작성할 수 있죠.
그럼,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무엇을 해왔을까요? 저는 항상 제가 하는 모든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고객 서비스를 할 때는 본질을 파악하고, 네트워크 작업을 할 때는 본질을 파악하고, 서버 작업을 할 때는 본질을 파악하고, 소프트웨어를 작성할 때는 본질을 파악하고, 목공 작업을 할 때는 본질을 파악하고, 이런 느낌을 받고 계시죠? 정말 감사하게도, 저는 모든 면에서 더 빠릅니다. 왜냐고요? 본질을 파악했다면 어떻게 더 빠르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말씀드립니다. 가서 하세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십시오. 그래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해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한 번 보시고 "무엇을 이해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 말이 다소 거칠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그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한 번 보시고 "이해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잊어버려. 내가 십자가에 달리면 너희가 모두 도망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야? 아직도 이해하느냐? 내가 곧 십자가에 못 박힐 텐데, 너희는 아직도 누가 우파 총리이고 누가 좌파 총리인지 논쟁하고 있잖아. 잊어버려. 무엇을 이해하느냐?
나중에 말하겠는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신학 체계에 따라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것이 옳다고 말한다. 나는 전에 그것을 읽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이해한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왜? 알겠다. 그래서 중국 예정론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만 중요합니다.
이제 이해하셨나요? 그러니까 당신의 법은 의롭다는 겁니다. 요약하셨나요? 그러니까 당신의 법은 항상 의롭다는 겁니다. 제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동의할 권리도 없고, 반대할 권리도 없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 이해력을 주세요. 그러면 저는 살겠습니다. 제가 살았나요? 중국 예정신학 또한 하나님께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101강을 쓸 때, 세상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왜냐고요? 이해가 안 됐어요. 이해가 안 됐죠. 오랜 세월 쌓아온 모든 신학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는 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것저것 베껴 쓰느라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글을 쓸 능력도 없었습니다. 3개월 동안 어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선생님, 너무 힘드시죠? 잘 지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3개월 후에는 글을 다 쓸 수 있을 겁니다. "코스 101", 첫 번째 권. 아, 정말 만족스러워요! 더 이상 비참하지 않아요.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상쾌해졌어요.
몇 달 후, 저는 코스 201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이게 뭐죠? 이해 없이 사는 건 너무 힘들어요. 이해 없이 사는 건 너무 힘들어요. 마침내 쓰고 나니 다시 살아있음을 느꼈어요.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우리 중국 운명론이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주 주일 설교는 마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매주 성경 공부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이해력을 주셔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살아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 운명론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신학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하고,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참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마치 바다를 채우는 물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광활한 바다 속에서 우리는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다의 한 방울,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결론
자, 요약해 보겠습니다. 아홉 번째 요점은 없습니다. 아홉 번째 요점이 요약입니다. 살고 싶으십니까? 이해를 얻으십시오. 이제부터 모든 형제자매는 하나님으로부터 이해를 얻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해 없이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해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절대 안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단순히 치유를 받았다고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오, 그를 위한 기도는 좋고, 그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거 하나 좋은 거? 아, 너무 혼란스러워. 길을 잃었어. 애초에 길을 잃은 거야. 애초에 살아본 적도 없잖아, 그렇지? 성형 수술만 좀 하면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잖아, 그렇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난 서쪽으로 갈 것 같아.
"선생님, 왜 그러세요? 저를 낙담시키지 마세요." 아니, 당신의 게으름을 낙담시키는 거예요. 오늘부터 당신의 행동을 바로잡으라고 격려하고 싶어요. 틱톡에서 시간을 떼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쓰세요. 그러면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무엇을 하든, 당신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요. 아멘?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命定神学 华人社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