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바울의 복음 시리즈 7-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 함이라!
필기를 참고
1.서론
a. 예수 그리스도는 보화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분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b. 무지는 파멸로 이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복음을 믿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치유를 받으면 그것을 이단으로 여깁니다.
c.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채찍에 맞음으로 치유를 받고, 그분의 가난으로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d. 종교의 영은 사람들을 눈멀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의 어리석음, 곧 우리 안에 내재된 육적이고 세상적인 논리 체계입니다.
e. 목회적 돌봄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육신을 다루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하나님께 원수 되는 것입니다.
2.성경의 말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별 좋은 자가 많지아니하도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으르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린도전서9:23-27)
기도
주님, 오늘 우리의 이해와 마음과 머리를 열어 주셔서 지혜와 총명을 얻고, 당신 안에 복음의 유익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유익을 얻도록 하옵소서. 주님을 뵙는 날까지 복음의 유익이 우리와 함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영감을 주셔서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추구하고 달려가 상급을 받도록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게으름과 악한 행실을 끊임없이 다루시도록 하옵소서. 목적 없이 달리거나 허공과 다투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정복하고 복종하게 하셔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아갈 때 복음의 유익을 얻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이 세상에서 매일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매일 복음대로 살고 또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의 섬김과 헌신과 예배를 받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세우시고, 당신의 뜻대로 빚으시고, 세우시고, 당신을 닮게 하소서! 아멘!
4.성경말씀의 배경
a.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에 와서 교회 안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b.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매우 육적인 사람들이어서 바울이 속였다고 의심했습니다.
c.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결코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일로 다른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d. 바울은 부모의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e. 교회의 목회적 돌봄은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정복하여 나를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5. 섬기는 목적
a. 이기적인 목적으로 섬긴다면, 그것은 단지 교회를 짓고 헌금을 모으는 것일 뿐입니다.
b. 바울의 섬김의 목적은 매우 순수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c. 목양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d. 섬김의 목적은 사람의 수자와 헌금, 또는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나누도록 하는 것입니다.
6. 섬김의 방법
섬기는 방법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는지, 그리고 모든 방법으로 유익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7. 섬김의 보상
a. 섬김의 상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b. 우리가 하늘에 소망을 둘 때,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정복하고 몸이 우리를 섬기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c. 교회의 목회 사역은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관점에서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일에서 큰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8. 본보기 - 몸을 정복하고 몸이 나를 섬기게 함
a. 몸을 정복하여 내게 복종시키는 것은 성령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b. 성령을 따르는 것은 영생을 거두는 것이고, 육체를 따르는 것은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9. 결론
a. 목표가 분명하고, 전략이 분명하며, 방법이 옳습니다.
b.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있을 때 사람들이 이 복음의 유익을 나와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전략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양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사람들에게 배우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번에는 새로운 시리즈 "복음의 유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강의의 주제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해서다"입니다. 이 시리즈가 특히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시리즈를 마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 깨달았습니다. 이어서 "복음의 유익"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해서, 즉 복음의 유익을 모든 사람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다행히도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원래 쓰인 단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미쳤어? 도대체 뭘 그렇게 미쳤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단어는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 원래 쓰인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너무 공리주의적이잖아? 나는 오직 하나님의 유익만 얻으려는 당신처럼 행동하지 않아." 저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려고 교회에 옵니다. 하나님이 너무 지쳐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이 하시는 일을 돕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돕는 것은 그분을 저주 속에 두는 것입니다. 왜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저주 속에 살고 있을까요? 그 기초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도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유익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해를 끼치려는 것입니까?
어제 저는 한 자매님을 섬겼습니다. 이 자매님은 육신을 매우 배려하는 분이시며 최근에 저희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녀는 10년 넘게 신앙 생활을 해왔습니다. 상하이의 한 교회에 다녔는데, 주님을 믿은 지 3년 만에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나중에 우울증이 치료되어 지금까지 항우울제를 먹고 있습니다.
그녀의 동료 중 한 명이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그 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3년 동안 그 교회에 다녔는데 우울증이 생겼는데, 왜 아직도 가고 싶어 하느냐?" 그녀의 남편은 분별력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암에 걸린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 그들은 여전히 교회에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기 전에는 괜찮았지만, 교회에 간 후에는 소변이 자주 마렵고 절박하며 소변을 참을 수 없게 되지만, 여전히 교회에 가고 꽤 오래갑니다.
이 자매님은 결혼 후 좋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최근에 왜 저희 교회에 와서 제가 섬길 때 마침 제 목회 부서에 배정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저희 설교 녹음을 듣고 나서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그녀가 우리 교회에 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녀는 우리 교회에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오면 치유될 것이고, 암을 앓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오면 치유될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중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곳은 육신의 악한 욕망을 죽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나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육신에 빠지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빠지면 죽습니다. 우울증이나 암에 걸릴 겁니다. 어느 쪽이든 매우 고통스러운 질병입니다. 육체적으로든 영적으로든 고통받을 겁니다.
사실, 이 자매님은 꽤 분별력이 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우울증은 유령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더 깊은 해방이 필요하고, 자신의 이해 안에서 하나님을 알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녀가 이전 교회에서 접했던 오물, 잘못된 가르침은 완전히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입니다. 그것들은 매우 악한 가르침입니다. 많은 교회 설립자들이 교회 구성원 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암에 걸리면, 논리적으로 목사는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설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암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암에 걸리면 치유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복음의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복음의 유익을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에는 반대하면서도 나쁜 소식을 듣는 것의 해악에는 찬성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제게 이단이라는 칭호를 몇 개 더 씌워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이 저와 함께 복음의 유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울증을 앓았던 자매님도 계셨는데, 저희 가운데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악령이 쫓겨났을 때, 성경에 기록된 "울부짖음"처럼 정말 비명을 질렀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부모님과 꽤 친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자주 저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주님을 믿지 않으시지만, 오시니 제가 그분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이 유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울증이 치유된 후, 자매님은 고향 상하이로 잠시 돌아갔습니다. 고향 상하이에 돌아온 후, 원래 교회에서 다니던 자매님을 만나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 자매님은 저희 덕분에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아 우울증이 완전히 치유되었고, 훌륭한 교사가 되었습니다. 자매님은 이 은혜를 이전에 알고 지내던 형제자매들과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때마다 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이 자매님은 저희 자매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제 우울증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이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이 말에 자매님은 숨이 막혀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이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원을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매님은 "이 이야기는 당신만 할 줄 아세요."라고 반박했습니다. 갑자기 자매님의 배터리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매님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평범한 사람일 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배터리 수명이 다시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이제 배터리는 4분의 1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완전히 방전되었습니다. 자매님은 다른 이야기를 찾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해 보려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기적이 따른다"라고 말하며 말입니다. 자매는 "아, 당신은 이것에 대해 말할 줄만 알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자매는 "그럼 당신은 무엇을 믿니?"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법만 안다. 우울해지더라도 잘 참아라." 우리 자매는 정말 기력이 없지만, 다행히 우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자매를 우울증에 빠지더라도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기껏해야 기력이 없을 뿐입니다.
그녀는 무엇을 믿습니까? 성경 말씀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종교 정신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형제자매들이 병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누군가 "우리 교회 자매가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교회에서 의사를 추천했는데, 그 자매는 약물 과용으로 자살했습니다. 교회에서 정신과 의사의 강연을 열어 추가 자살을 막았습니다."라고 타이핑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이렇게 타이핑했습니다. "중국 운명신학 교회에 오기 전에, 우리 교회에서 한의학과 건강 제품을 소개해 줬어요. 제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죠. 그때 저는 제가 옳은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안에는 수많은 미신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중국 운명신학 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영적인 성장에 집중하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른 자매님이 이렇게 타이핑했습니다. "이제 베이징 교회에 심리학이 있는데, 저는 떠났습니다."
요즘 많은 목사님들이 사람들에게 한의학, 건강 제품, 심리학 등 온갖 것을 소개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들은 인간 통제에는 관심이 없고 이단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정말 이상해요. 우리 가운데서 형제자매들이 치유받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사이비 종교에 가입했다고 믿고 있어요. 확신하시나요? 네. 그들은 벽에 기대지도 않지만, 확신하고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생각이에요? 그들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계속 말하지만, 사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걸이에 십자가를 달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예수를 믿나요? 가짜인 베이지안을 믿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싱가포르에 왔을 때는 정말 혼란스럽고 불운했습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이 저를 열렬히 데리러 와서 자기네 교회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 교회는 아주 전통적인 교회였고, 온갖 허황된 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이걸 포기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쓸모없는 거야? 기껏해야 대승불교일 뿐인데."
그러다가 병이 나서 병원에 가보라고 권유받았습니다. 추천받은 의사들은 모두 비쌌습니다. 애초에 돈이 없었는데, 병원비로 엄청나게 지출했습니다. 정말 짜증이 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기독교인들은 모두 착하고 열정적으로 보였지만, 저는 그들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 문제를 해결해 줄 하나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를 타락에서 해방시켜 줄 하나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를 치유해 주시고, 일자리를 주시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실 하나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귀신을 쫓아내는 교회에 갔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리석게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였는데, 당시 저는 영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교회에 갔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유일한 은사주의 교회, 귀신을 쫓아내는 유일한 교회였을 텐데, 우연히 그 교회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십니다! 그분께서 저를 그 교회로 인도하시고 복음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로 저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 왔습니다. 성경은 보물과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기쁜지 아십니까? 마침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물을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라면, 아직도 "이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말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나중에 저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간증하고, 제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이 제 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크리스천"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걸어가면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별명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그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복음의 유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믿는 예수님은 강력하고 경이로우십니다. 그분은 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분과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우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그분을 숭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해나 다른 명절 때면 그에게 돼지, 닭, 생선, 과일을 차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분께 나아와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저는 많은 것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분을 알고 이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제 병을 위해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채찍질로 저는 나았고, 그분의 가난으로 저는 부유해졌습니다. 말씀드립니다. 제가 감동받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저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저는 그분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았지만, 제가 오랫동안 이 하나님을 찾아왔기에 그분은 저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그분의 형상대로 존귀와 권능과 영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영원 속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원래 저는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고난을 겪었고, 살아 있는 동안 죽었습니다. 소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망이 없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더욱 소망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분께서 영원 속에서 저를 위해 영광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의지하여 이 땅에서 이 복음의 유익을 얻고, 이 복음으로 인해 제 형제자매들도 저와 함께 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분은 이렇게 타이핑했습니다. "저는 목에 통증이 있어 팔을 들 수 없는 자매님을 섬겼습니다. 그녀의 딸은 16년 동안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해방을 위해 기도하고 싸우도록 인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지역 교회 목사님께 이 사실을 알렸고, 목사님은 저를 막았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아이가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나중에 우리 가운데서 치유받았습니다. 그 아이는 고향 저장성으로 돌아와 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다리가 아파서 땅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섬겨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문제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지역 교회 사람들이 와서 제가 섬기는 것을 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다고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할아버지께서 땅에서 나와 걸으셨고, 두 시간 후에 저를 막으셨습니다.
발꿈치를 보면 그들이 분명히 이렇게 말할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단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우울증을 치료하는 건 이단이고, 다리가 아픈 사람을 걷게 하는 건 이단이고, 다리가 아픈 사람을 걷게 할 수 없는 게 옳다고 생각해. 우울증을 치료할 수 없는 게 옳다고. 이상하지 않아? 심지어 저를 막았지만 상관없어."
치유는 한 가지일 뿐이야. 그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묻고 싶어.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고,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없애고, 병원 침대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을 아끼고, 평생 질병에 쓰는 모든 돈을 아낀다면,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질병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질병은 우리의 육신적 방종의 증거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의 유익과 영원한 영광의 소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소망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포로가 자유케 되고, 억압받던 자가 자유케 되고, 가난한 자가 부유하게 되고, 눈먼 자가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일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도우시는 분이 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분명한 유익입니다. 유익을 얻으려면, 종교를 포함하여 우리가 그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종교의 영은 사람들을 눈멀게 할 수 있고, 종교의 영은 사람들을 어리석게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은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예비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좋은 것을 예비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것들을 얻지 못하게 막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들을 얻지 못하게 막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세상과 육신에서 태어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논리는 우리가 복음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막고,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는 우리가 복음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막고, 우리 안에 있는 종교의 논리는 우리가 그 유익을 얻지 못하게 막습니다. 행위 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저주 아래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서신에서 이 점을 거듭거듭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음의 유익을 얻고 싶을 뿐입니다. 왜 이렇게 공리주의적인 걸까요? 하나님의 뜻 자체가 바로 이렇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모든 사람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회 교회를 세운 이유입니다. 목회적 돌봄이란 무엇일까요? 목회적 돌봄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육신을 다루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는 한 자매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매님은 기분이 상해서 얼굴을 굳혔습니다. "뭐라고요? 제가 그 교회에서 못 할 것 같다고요?" 자매님은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자매님께 훈계를 해드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매님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경쟁하고, 비교하고, 질투하기를 좋아합니다. 다 헛소리입니다. 이런 것들이 복음의 유익을 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왜 제가 그녀를 섬겨야 합니까? 그녀의 등, 다리,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이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불편합니다. 육신의 것들은 너무 악해서 복음의 유익을 얻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육신의 것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기억하라."
다른 사람이 이렇게 타이핑했습니다. "지난주에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저를 보러 오셔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저를 보러 오셔서 위로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조심하고 이단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교인들도 저에게 약을 권했습니다. 이 자매님은 손발이 모두 오그라들었지만, 우리끼리는 손발을 많이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누군가가 와서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말을 했는데, 저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이상한 현상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것을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것은 이단보다 더 이단적입니다. 그들은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계속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것입니다. 그들을 불쾌하게 합시다. 우리가 이런 말로 그들을 불쾌하게 한다면, 어쩌면 그들이 깨어나 이 복음의 혜택을 받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육신의 욕망을 다룰 때, 우리는 무자비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체면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단지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예의를 갖춰야 합니까? 다행히도, 다루어지고 불쾌함을 느낀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예전에 교회 장로님을 섬겼는데, 그분의 딸이 지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 장로님도 교회에서 설교하셨는데, 나중에 암에 걸리셔서 뱃속이 그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셨을 때, 딸에게 "아프니까 빨리 와."라고 말했습니다. 가끔은 욕설을 퍼붓고 사람들을 욕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형제자매들이 그를 보러 왔을 때,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증거했습니다. "보세요, 저는 이렇게 아픈데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형제자매들이 그를 보고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심각한 암에 걸렸는데도 이렇게 살아가고 계시다니요."라고 말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떠난 후, 그는 다시 어머니를 욕하기 시작했고, 결국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이런 일을 아십니까? 네. 이게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우리를 해방하셨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이런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받으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때까지 말입니다. 이 과정은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 안에 있는 더러움과 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성령께서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우리의 가치관을 완전히 변화시키도록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3-27절을 펴십시오.
2.성경의 말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별 좋은 자가 많지아니하도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으르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린도전서9:23-27)
기도
주님, 오늘 우리의 이해와 마음과 머리를 열어 주셔서 지혜와 총명을 얻고, 당신 안에 복음의 유익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유익을 얻도록 하옵소서. 주님을 뵙는 날까지 복음의 유익이 우리와 함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영감을 주셔서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추구하고 달려가 상급을 받도록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게으름과 악한 행실을 끊임없이 다루시도록 하옵소서. 목적 없이 달리거나 허공과 다투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정복하고 복종하게 하셔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아갈 때 복음의 유익을 얻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이 세상에서 매일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매일 복음대로 살고 또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의 섬김과 헌신과 예배를 받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세우시고, 당신의 뜻대로 빚으시고, 세우시고, 당신을 닮게 하소서! 아멘!
성경말씀의 배경
지금 제가 옛말을 반복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성경 공부를 읽어보시면 그 안에 훌륭한 토론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반 만에 세웠습니다. 아마도 규모가 크지도 않고, 거대한 교회도 아니었고, 겨우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때부터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반 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서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이곳에 왔습니다. 첫 번째 무리는 아볼로였습니다.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명했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또 다른 무리가 왔습니다. 베드로와 몇몇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꽤 흥미롭습니다. 베드로라면 유명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가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가 우리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사랑의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헌금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사랑의 헌금을 너무 적게 드리면 옳지 않지만, 너무 많이 드리면 헌금이 없습니다. 마치 배우나 가수가 다른 곳에 가서 매번 사랑의 헌금을 모으고 많은 돈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왔고, 그다음 베드로가 왔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졌고,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볼로에 속해 있어. 나는 아볼로를 좋아해. 아볼로가 설교도 잘하고 성경도 인용하고 해석도 가장 잘한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바울에 속해 있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베드로에 속해 있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파벌로 갈라져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를 따랐을까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였고, 위대한 제자란 정말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나는 그때 예수님을 따랐지만, 너희는 모르지." 이 말에 사람들은 기운을 잃었습니다. 우리도 모릅니다. "바울도 모르지. 바울이 뭐지? 나는 위대한 제자이고, 진정한 제자야."
진짜 제자가 왔다는 것과 큰 브랜드를 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고, 파리 머리의 작고 규칙적인 글씨는 말할 것도 없고, 등불 축제만큼 큰 글자 몇 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곳에 가면 멋지게 차려입어야 하니까요. 그도 이 논리를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배경도 없는데 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러자 온 교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왜냐고요? 고린도 사람들이 바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고린도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육신이 아니라 아주 육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이 돈을 속이려고 왔다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바울은 우리 돈만 노리는 목회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틀렸습니다." "바울은 다른 의도가 있어서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려고 속임수를 씁니다!"
오, 바울의 가슴은 수천 개의 화살에 찔렸습니다! 그는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이제 이름 있는 목사가 와서 "목사님, 당신은 쓸모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나와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80만 명의 교인이 있는데, 그는 누구입니까? 끝났습니다, 끝났습니다. 이 일 년 반 동안 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을 길렀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신도들의 관계가 틀어졌고, 그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바울이 포기했을까요?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긴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수집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모두 목회적인 언어입니다. 바울의 변론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모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되 나의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린도전서 9:1-2)
누가 그랬는지 아셨나요? 베드로가 관여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제비뽑기로 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 사람이 사도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습니까?" 세상에! 고린도 교인들은 순식간에 끝났고, 바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무너졌습니다.
저는 저에게 질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으로 먹고 마실 권리가 없습니까? 다른 사도들, 주님의 형제들, 그리고 율법처럼 믿는 자매와 결혼하여 데리고 갈 권리가 없습니까? 나와 바나바에게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없습니까? 누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자기 양식을 스스로 마련합니까? 누가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습니까? 누가 양 떼를 돌보고 그 젖을 마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람의 생각대로 말하는 것입니까? 율법도 같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를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우리를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밭 가는 사람은 소망을 품고 밭을 갈고, 곡식 떠는 사람은 먹을 것을 바라며 떠는 법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 영적인 것을 심었으면,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이 큰일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그럴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막히지 않도록 모든 것을 견딥니다.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나누어 먹는 줄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나에게 이런 짓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내 자랑이 헛되게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실과를 먹지 않게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씩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으 ㄹ가지고 갈며 곡식 또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유리일까 보냐 그러나 유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이와 같이 주꼐서도 복음 전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린도전서 9:3-18)
이 말씀이 얼마나 공감되는지요! 저는 바울의 말씀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형제자매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자매들이 저에게 오면 모두 거저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행동 때문에 형제자매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말씀을 했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은, 작은 목회자든 큰 목회자든, 동역자든, 형제자매들과 금전적인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일 없어, 네가 나한테 뭐 해 달라고 하면, 내가 너한테 뭐 해 달라고 하는 거, 그런 일 없어.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안 할 거야, 알겠어? 바울은 절대 남을 괴롭히지 않고, 남을 이용하지도 않아. 왜? 바울의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이용이 가능하겠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바울은 누구를 암시하는 거지? 아볼로,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암시하는데, 그들은 모두 이 땅에 구멍을 파고, 문제를 일으키고, 혼란을 일으키려고 온 거야. 바울이 하려는 게 뭐야? 바울은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 교인들을 목회했어. 주인은 많아도 아버지는 한 분이시잖아, 안 그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가르쳤고, 고린도 교인들은 마침내 깨달았어. 그들은 돌이켜 바울과의 관계를 회복했지. 사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러므로 교회의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정복하고 내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자유인으로서 내 아래에 아무도 없지만,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된 것은 율법 없는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요,
사실,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고자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경주장에서 달릴 때 모두 달릴지라도 오직 한 사람만 상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이와 같이 달릴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우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앋고자 함이요.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랃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긱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19-27)
지금 고린도전서 9장을 다시 읽는데, 정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럴까? 사람들이 네가 사도인 줄도 모르는데, 네가 "나는 사도다, 나는 사도다"라고 외치다니." 나중에야 비로소 바울이 한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제가 목회 사역에 사용하는 언어는 바울에게서 배웠고, 사람들이 이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만약 당신이 높은 수준의 지식인이라면, 저는 같은 채널을 통해 소통할 수 있고, 만약 당신이 청소부라면, 저는 청소부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비전과 사명에 담고, 사도 바울을 본받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으로 섬깁니다.
왜 우리 형제자매 중 많은 사람이 치유를 받았을까요? 저와 함께 일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제가 없었다면 한 명 한 명 비참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저를 돌보시고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저는 사도 바울을 따릅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저의 고통이고, 여러분의 어지러움은 제 어지러움과 같습니다. 저는 감정으로 섬기고, 함께 아픔을 느끼고, 함께 약함을 느낍니다. 그래야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유익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나는 내 몸을 정복한다"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너희 몸을 정복하여 나의 종으로 삼으라. 그러면 복음의 유익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우리가 복음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막는 것은 우리의 육신, 체면 사랑, 경쟁심, 질투심과 같은 육신의 논리 체계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싸우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체면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목회적 돌봄은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아들을 매우 아끼는 자매님이 계십니다. 그녀의 아들은 매우 강인합니다. 그는 대학에 갔지만 졸업 후 30대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식 배달만 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만났을 때 어떤 부모가 불편하고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가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다만 저는 정말 제 자신을 분리할 수 없고, 많은 경우 주저하며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제가 아들을 생각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목회자들은 사도 바울의 본을 따를 의향이 있습니까?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함과 고통을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떻게 마음속에서 그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목회한다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여러분을 위해 영광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바울을 따르세요!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이 매우 분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린도전서를 읽고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고린도후서가 기록되었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후 고린도후서가 쓰여졌고, 고린도 사람들을 회심시켰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의도가 목자는 되지 않고 단지 교사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그저 교사였고, 베드로는 목자는 되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했습니다. 베드로가 죽은 후, 베드로와 함께 있던 요한이 베드로에 대해 몇 마디 험담을 했기에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죽은 지 오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요?
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치라." 네가 양 쳤느냐? 예수님께서 자신이 양 치는 것을 잘 아셨다면 그런 헛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분의 마음속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 베드로는 왜 고린도에 왔을까요? 목양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하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섬김의 목적
우리의 섬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만약 우리 섬김의 목적이 이기적이라면, 당신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개들도 그것을 압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을 바꾸어 그들이 돌이켜 바울과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왔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섬김의 목적이 매우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교회를 짓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 것이 목회라면, 교회를 짓는 것과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를 짓는 것은 교회를 목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목회적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복음의 유익을 얻고, 마침내 영원한 소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 아주 전통적인 교회들처럼 형제자매들이 병들어 죽는 곳과는 다릅니다. 예전에 전통적인 교회에서 한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 친구의 아내였는데, 지역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뇌암에 걸려 호스피스 센터로 보내졌습니다. 호스피스 센터는 죽기 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는 그녀를 데리고 기도하러 갔고, 뇌암은 정말 빨리 나았습니다.
그러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음의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교육 과정을 배울 수 있고,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다시 예전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왜 예전 교회로 돌아가려고 하세요? 어떻게 그 교회에서 뇌암에 걸렸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셨나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자매님들은 항상 친절하세요." 저는 "어떻게 친절하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아플 때 자매님이 자주 수프를 끓여 주셨어요. 뇌암에 걸렸는데도 수프를 끓여 주셨어요."
그건 교회가 아니라 수프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목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설립의 목적이 인원 수라면 숫자의 문제가 있는 것이고, 교회 설립의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면 교회를 갖는 것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라면, 수프를 끓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녀는 마침내 회복되어 행복하게 지내다가 3개월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식을 듣고 저는 "야, 나는 발꿈치로 셀 수 있구나, 알았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봉사의 목적은 인원 수가 아닙니다. 봉사의 목적은 헌신이 아닙니다. 봉사의 목적은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의 목적은 형제자매들이 복음의 유익을 함께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것을 중시하고 사랑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우리는 함께 이 복음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다루거나 정복해야 하는 사람은 여러분뿐만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제 육신을 정복해야 합니다. 주변 형제자매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는 육신을 다루고 제 육신을 정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은 제가 육신을 정복하고 제게 복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섬기는 방법
섬기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거만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며칠 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목사님들이 목회자 유니폼을 입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목사님들은 가운데에 흰색 플라스틱 끈이 꽂힌 서 있는 칼라를 착용합니다. 이 유니폼을 입으면 목사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 유니폼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당신이 위생 청소부라면 저도 당신과 함께 위생 청소부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엔지니어라면 저도 당신과 함께 엔지니어가 될 것입니다. 저는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거만하고 고압적이 되어 사람들이 저를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하는 길입니다. 저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 될 것입니다. 약자들을 얻기 위해 약자들에겐 약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보러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를 보러 오려는 사람은 스승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십시오. 배우고 싶다면 봉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능한 한 많은 유익을 주도록 노력하십시오. 이것이 핵심이자 방법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꺼이 섬기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기꺼이 섬기지 않으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맡겨집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이 책임을 하고 싶으십니까?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입니다. 하고 싶다면 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병 환자들을 보시고 만지셨습니다. 얼마나 더러웠습니까? 전염병이 있었습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시고 섬기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의 보상
섬기는 것에 대한 보상이 기부를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섬김을 마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 끝 날을 위한 방주를 짓기 위해 너에게 왔다. 투자하고 싶으십니까? 지금 티켓을 팔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돈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돈은 다 쓰고 티켓은 샀지만, 방주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방주는 없었습니다. 방주 자체가 아니라 돈을 모으기 위한 방주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면 이 봉사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봉사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에 있습니다.
교회에 왜 이렇게 많은 재앙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왜 이 목사님은 암으로, 저 목사님은 암으로 돌아가셨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제가 "제 봉사는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믿지 마십시오. 이 길을 가고 싶다면, 하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섬길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세상의 것들은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오래전에 이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루 더 사는 것이 하루 더 고통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저에게 온다면, 저는 때때로 당신을 위해 대접하고 함께 술을 마실 것입니다.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더 많은 은혜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제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소망을 둘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 몸을 정복하고 그것들이 우리를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몸을 정복하고 그것들이 우리를 섬기도록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 예수님 앞에 다시 모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모일 때,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영광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충성되고 선한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사실, 제가 섬기는 일의 양은 매우 많습니다. 제 일은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일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형제자매들의 이해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이해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자매들이 직장에서 너무 많은 압박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죽을 만큼 일한다면, 그것이 교회의 목회적 돌봄의 책임이 아닙니까? 직장에서 죽을 만큼 일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극도로 가난하다면, 그것이 교회의 책임이 아닙니까? 질병으로 가득 차고 작은 재난을 자주 겪는다면, 그것이 교회의 일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교회의 목회적 돌봄의 일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너희도 너희 몸을 쳐 복종하게 하라. 그리하면 복음의 유익을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은 이 연관성을 이해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준 본입니다.
본보기가 되십시오
몸을 단련하여 노예로 삼으십시오. 이는 몇 마디 간단한 문장일 뿐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지할 때 우리는 육신의 악행을 죽이고 몸을 노예로 삼아 더 이상 육신을 따라 패배를 거두지 않고 성령을 따라 영생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섬김의 유익을 얻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단계는 몸을 단련하여 노예로 삼는 것입니다.
사실,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자유로우며 선택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기꺼이 선택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실패를 선택해야 한다면, 실패한 후에 다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사람들을 눈여겨봅니다. 그러니 먼저 먹고, 다 먹고 나면 언젠가 실패할 것입니다. 그 실패가 무엇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우울증인지 암인지, 어쨌든 질병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현명하게 자신을 정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셜론
명확한 목표, 명확한 전략, 그리고 올바른 방법, 제가 자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당신의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까? 삶의 목표가 항아리라면 항아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라면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일하는 것이라면 열심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직장을 잃으면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되고, 삶의 목표가 돈이라면 돈을 잃더라도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됩니다.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삶의 길은 스스로 선택합니다. 당신은 이 길 또는 저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의 채찍질로 인해 저를 치유하셨고, 그의 가난으로 인해 제가 부유해졌다는 것을 압니다. 제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저와 함께 나누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제 전략 또한 매우 명확하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양의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배우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포함됩니다. 방법은 반드시 옳아야 합니다.
이번에 다룰 주제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영광의 소망"과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된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복음의 유익이 너무 많아서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그 길을 열어 주었고, 우리는 그저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