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데살로니가전서 결론-온전히 거룩하게 되기를

필기를 참고

1.결론론의 중요성

a. 추상화, 요약, 귀납, 정리를 거치면 명확하고 기억하기 쉽습니다.
b. 배우는 데 서툴다는 것은 추상화, 요약, 귀납, 정리에 서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c.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d.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e. 똑똑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어야 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어리석어야 합니다.
f. 자신이 살아가는 상황이 하나님의 형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새롭게 태어난 작은 교회가 박해를 겪고 있습니다.

a. 박해는 온전한 성화의 일부입니다. 박해에 직면했을 때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은 단번에 구별될 수 있습니다.
b.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를 받고 믿음의 시험을 거쳐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c.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승리했지만, 환난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모호했습니다.

2. 새롭게 탄생한 작은 교회는 목회적 돌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a.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전히 목회적 돌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어떻게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b.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육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목회적 돌봄은 육적인 것을 다루는 것입니다.
c. 목회적 돌봄은 사람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육적인 것을 다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d. 사람들 안에 귀신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육신에 치우쳐 있으며, 귀신을 끌어들이는 데 매우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관리와 회복을 필요로 합니다.
e. 교회의 목회는 동물원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f. 목회는 감정적이어야 합니다.

3. 새롭게 태어난 작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a.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몰랐고, 가난하지 않고 자립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습니다.
b.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배우려는 엄격한 태도를 갖지 않았습니다.
c.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d. 바울의 신학은 헛소리를 하거나 헛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e. 하나님은 우리가 형벌을 받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예정하셨습니다.
f. 바울의 신학적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g. 교회를 세우고 목회할 때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믿음은 이해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요약을 하고 싶다면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내용을 인공지능에게 주고 "요약 좀 도와주세요. 아주 좋은 요약을 해 줄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공지능이 요약을 아주 잘하는데, 여러분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공지능이 요약해 주고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인공지능처럼 요약해야 합니다.

형제자매님들이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습관을 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약해야 할까요? 정리하고, 추상화하고, 요약하고, 일반화하고, 정리한 후에야 머릿속에 잘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 기억이 안 나요."라고 말합니다. 왜 기억이 안 날까요? 저는 추상화, 요약, 일반화, 정리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아시다시피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까요? 바로 추상화, 요약, 일반화, 정리를 통해서입니다. 요약하고 나면, 아! 정말 명확해지네요.

알고 계시나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설교를 하거나 성경 공부를 하지만, 원고는 꼼꼼하게 씁니다. 그런데 누군가 "목사님, 본문 좀 알려주세요."라고 하면 바로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요약되고 정리되어 있고, 찾아야 할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더라도 저는 글을 잘 씁니다. 원고를 꺼내서 다시 여러분과 공유할 겁니다. 그래서 추상화, 요약, 일반화, 정리하는 습관이 정말 좋습니다!

저희 형제 중에 나노기술을 초창기에 공부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나노기술을 배우고 나서 나노기술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졸업 후 실업 상태였습니다. 나노 기술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요? 세상에 나노 기술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배우는 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저 피상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에게 저에게서 프로그래밍을 배우라는 아이디어를 주었습니다. 그를 모욕하는 게 아닙니다. 화면은 크고, 그는 프로그램을 많이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우려 하지 않을 겁니다.

눈 깜짝할 새에 5, 6년이 흘렀지만, 저는 여전히 감정적입니다. 그의 기술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배우는 데 능숙하지 않습니다. 그가 배우는 데 능숙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추상화, 요약, 일반화, 그리고 구성에 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가 사물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것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배웠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해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걸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나요? 사실, 그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농담도 잘하고, 농담을 잘합니다. 하지만 말을 할 때는 배운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 저예요. 선생님만 그런 게 아니에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의 유사점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우연입니다. 저는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겁이 납니다.

우리 형제자매 중 몇몇이 "선생님, 저는 목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좋아요, 선생님이 목회하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목사님을 모시고 그의 말씀을 들어보시라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중국 예정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받았던 엉터리 이야기만 합니다. 왜 이전 교회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까요?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사실, 주의 깊게 분석하고 추상화해 보면 그런 것들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저희 중 한 자매님이 영상을 보내주셨습니다. 보고 나서 매우 불편했습니다. 왜냐고요? 이 영상은 예배 찬양단의 지도자 한 분의 이야기인데, 그분은 나중에 많은 슬픈 일들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은 '갑작스러운 실신'이라는 병을 앓으셨습니다. 쾅, 뺨이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세상에! 결국 의사는 수술을 하고 뼈를 붙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찬양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폐지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로가 풀려나고 억압받던 자가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갑작스러운 실신은 질병이 아니라 유령입니다. 하루 종일 예배하고 찬양해도 내면의 삶이 없습니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이러한 학습 능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똑똑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똑똑해질 수 있을까요? 제가 아직 옳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두세요." 당신이 말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그저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형제자매들은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진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세상에서 진리의 화신이라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끔찍한 일이고, 당신에게는 개 피의 드라마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진심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모든 형제자매들이 똑똑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똑똑해질 수 있을까요? 배우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독선적인 사람은 분명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진리와 사물의 발전 법칙과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즉, 우리가 배운 많은 지식은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면밀히 검토해 보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의 상태를 살펴보세요. 우리 삶의 상태를 보면, 아, 이 상태는 옳지 않구나. 거울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데살로니가전서 요약 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은 이 요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요약의 주제는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칭찬하는 글을 많이 썼지만, 그것이 요점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관계를 위한 길을 닦고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제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즉, 아직 거룩하게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면 다시 거룩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이미 거룩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요점을 요약하고 싶습니다.

새롭게 시작된 작은 교회가 박해를 겪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크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가 5천 명이나 3천 명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얼마나 클까요? 아마 기껏해야 큰 집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정도일 겁니다. 아마 수십 명 정도일 겁니다.

그러니 이 새롭게 시작된 작은 교회가 박해를 겪고 있는데,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박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이 문제를 일으킬까요? 문제를 일으키고,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바울은 박해를 받으면서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내 믿음은 무엇일까? 이 주님을 여전히 믿어야 할까? 이 경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박해는 완전한 거룩함의 일부입니다. 모든 사람이 박해를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박해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즉시 분리할 것입니다.

교회에 소시지, 햄, 소고기 조림이 있다면 박해는 없고 맛있는 음식과 음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참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싱가포르에서 한 형제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국인 사역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중국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40명이 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언제 40명이 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춘절에 만두를 만들 때는 40명이 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저는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몇 명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일곱 명이나 여덟 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헌금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두 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십일조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요. 헌금은 왜 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체면을 중시해서 50센트를 냅니다.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헌금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런데 똑똑한 중국인들이 돈을 많이 번 것 같아서 헌금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한 움큼의 돈을 꺼냅니다. 받는 만큼 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 새롭게 태어난 작은 교회는 순식간에 참과 거짓을 분별했습니다. 그러니 박해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장 소고기 같은 것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가 믿는 것은 간장 소고기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그는 양념 소고기를 먹었을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었을까요? 양념 소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양념 양고기라면 어떨까요? 그게 더 가까워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맞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시험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것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강하십니다. 이 박해는 맹렬하게 왔지만, 하나님에 의해 해소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그들의 환난과 박해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걱정했습니다. "아,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문에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구나. 정말 미안하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디모데가 그곳에서 돌아오자마자 바울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위로의 하나님이시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했을까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매우 강하고, 매우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해의 측면에서, 환난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여전히 모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저는 이 모든 과정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을 반드시 박해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논리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요,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작은 교회, 목회 지식 부족

데살로니가 교회는 목회 지식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2주 동안만 설교를 듣고, 우리 중 젊은 목회자들은 매주 월요일마다 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2주 만에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지식이 부족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목회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그들은 몰랐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교회 목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지자, 어떻게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교회가 엄격한 관리 없이는 양들을 마구잡이로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엄격한 관리가 없는 교회는 좋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형제자매들을 괴롭히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보험을 판매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피라미드식 판매에 관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조직과 하위 계층을 키워 나갑니다. 감히 관리하시겠습니까? 어떤 사장들은 교회에서 일꾼을 모집한 후 착취하고, 그렇게 작은 사회로 만들어버립니다. 감히 관리하지 마십시오. 왜 감히 관리하지 못하십니까? 그는 모릅니다.

그러니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반드시 관리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관리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교회 설립을 위한 목회적 돌봄도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모든 사람에게 묻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모두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목회적 돌봄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목회적 돌봄은 육신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의 육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다루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내 육신을 다루고 싶다면 괜찮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악행을 죽이는 것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평범한 설교자들에게 목회가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것이 목회입니다. 둘째, 육신을 다루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을 쫓아낸 후에도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귀신이 다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귀신을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려면 육신을 다루어야 합니다. 암 환자든, 강직성 척추염 환자든, 다른 어떤 질병이든, 허리 통증이든, 다리 통증이든, 다리 경련이든, 영적인 사람에게는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목회는 왜 합니까? 사람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사역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때, 그의 글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오늘 제가 목회할 때 한 자매님이 제 말씀을 듣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자매님은 제 말씀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잘하시네요. 관계가 맺어지고 감정이 연결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을 쌓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신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리석은 것들을 다루십시오. 그러므로 치유와 구원, 즉 육체를 다루는 것이 두 번째 요점입니다.

세 번째 요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는 것입니다. 네 번째 요점은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시 자유케 되고 귀신이 쫓겨난다면, 그는 육체를 다루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해력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해력에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왜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둘째, 그는 매우 육적입니다. 셋째, 그는 귀신을 끌어들이는 데 매우 능숙합니다. 이것이 생명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육체를 다루면 더 이상 게으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게으름은 육체이고, 게으름을 다루는 것은 육체를 다루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러면 왜 저는 모든 것을 다룰 수 없습니까?” 일본 악마들이 오면 그냥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일본 포로수용소에 가서 정직하게 일했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철도 건설?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아침에 기적이 울리면 일어나야죠. 전에는 못 일어났지만, 지금은 일어나지 못하면 채찍이 옵니다. 빨리 일어나야죠. 제가 묻겠습니다. 게으름은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일본 채찍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당신이 인간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제가 개를 때리면 알아챌 겁니다. 저를 보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살려달라고 빌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어린 나무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곧게 자랄 수 없고,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엉켜 버립니다." 그래서 이 목회적 돌봄을 경영이라고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더러운 것들을 관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한번 해 보세요. 제가 해낼 겁니다. 꼭 해낼 겁니다.

교회를 짓는다면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저는 쓰레기를 어떻게 치워야 할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지었을 때처럼, 와, 3,000명. 와, 5,000명. 그 결과 온갖 쓰레기가 들어왔고, 검은 연기와 독기가 가득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온갖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들어온 후에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조차도 감히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베드로도 감히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우두머리, 최고 지도자인데,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요? 베드로가 지은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에 목회적 돌봄이 있습니까? 목회적 돌봄이 없습니다. 그럼 베드로전서에도 목회적 돌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그는 스스로 목양하지 않고, 너는 잘 목양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못하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사람이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구원받은 사람들을 교회에 더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매일 그들에게 쓰레기를 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 회사를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버스를 타고 저는 버스를 타고, 여러분은 집을 짓고 저는 집을 짓고, 모두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게 될까요? 더러운 물을 뿌리고 문지르는 것 말입니다. 그렇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보고, 꽤 괜찮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너도 가서 그들의 교회에 가 봐." "너도 가서 그들의 교회에 가 봐." 그러면 검은 연기와 독기 같은 유령들이 몰려옵니다.

가끔 농담을 하는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교회에 들어가서 위를 올려다보면 족제비들만 있습니다. 양들은 어디 있죠? 족제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 동물원 같습니다. 온몸에 가시가 돋은 고슴도치들이 있는데, 북동부에서는 고슴도치라고 부릅니다. 원숭이, 늙은 말, 족제비들이 있습니다. 온갖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은 어떻습니까? 양들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오늘 양 한 마리가 없어졌고, 내일도 한 마리가 없어집니다. 양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잡아먹혔습니다. 같이 키우면 모두 잡아먹힐 것입니다. 어항에서 물고기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몇 마리의 사나운 물고기를 키운 다음 그 안에 물고기를 넣으면 오늘 밤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양은 동물원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요점입니다. 이 작은 교회는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경우와 저 경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목양하는 데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글을 썼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이 감정과 관계를 쌓는 데 매우 능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권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목양 또한 감정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작은 교회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족.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믿음이 있었을까요? 믿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얼마나 알았을까요? 조금, 조금밖에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일해야 할까요? 일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일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지만, 일하는 사람은 세상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진지하게 일하고, 생계를 유지할 만한 진지한 직업을 찾고, 가난하지 않도록 진지한 일들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종종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혼란스럽습니까? 만약 우리가 여전히 혼란스럽다면, 저는 여러분께 진지한 일들을 하라고 권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말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성경에서 말한 것입니다. 진지한 일을 하지 않으면 분명히 뭔가 잘못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한 일을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정확히 무엇입니까? 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화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뢰아로 갔습니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성경을 주의 깊게 공부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 성경이었고, 사도 바울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배우는 것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보고 하나님이 매우 악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악을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재앙과 복을 동시에 가져오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주와 복을 동시에 가져오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의 죄를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삼사 대까지 벌하실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지만, 머리가 세 개인가요? 아니면 몸은 하나인가요? 몸은 세 개인가요? 머리는 하나인가요?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일까요? 느자는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 달린 사람이 아닌가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런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논리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사람입니다. 자세히 읽어봤지만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누군가 "삼위일체의 참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나중에 저는 삼위일체를 믿는 악한 신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삼위일체를 믿는 신들이 참된 신은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자는 많고, 많은 것들이 삼위일체적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런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혼란에 빠졌을까요? 그들은 그저 헛소리만 했습니다. "오, 주님이 오셨는데, 무슨 일이야? 왜 사람들이 죽었지?" 주님을 믿은 지 몇 주 만에 누군가 죽었습니다. 매우 혼란스러웠고, 주님도 혼란스러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은 새로 설립된 교회에 큰 어려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 힘을 다해 따르라고 권해 왔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믿은 지 두 주밖에 안 됐는데, 스스로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문제인 매우 분명한 요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야, 언제 주님을 믿었어?" "2012년에 세례 받고 구원받았어." 이게 사실인가요? 왜 저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까요? 누가 당신을 구원했나요? 이건 매우 이상한 논리입니다.

사실 데살로니가인들도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며,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묻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믿는 겁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얼굴은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슬프지 않습니까?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바울이 여기에 기록했고, 저는 요약했습니다. 첫째, 새로 태어난 작은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둘째, 새로 태어난 작은 교회는 목회 지식, 즉 교회 설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셋째, 새로 태어난 작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 이렇게 해야 하고 자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주님을 3년 동안 믿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3년 동안 믿었고,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10년 동안 믿었으니, 당신이 밥을 먹는 것보다 소금을 더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10년 동안 주님을 믿었다는 것이 무엇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는 데 진지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이러한 것들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벌을 받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요약하고 사도 바울의 신학적 개념을 다시 이해했습니다. 바울의 신학적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똑같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바울의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바울의 신학적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이 이런 것임을 압니다.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성경에서 예배와 찬양에 대해 썼습니까? 예배와 찬양을 자세히 논의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이해를 자세히 논의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날까지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이유입니다. 왜 그들이 틀렸을까요? 그들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 저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만 명이 모이는 아주 큰 교회가 세워진다 해도, 성경 공부는 없고 주일 설교와 예배, 찬양, 그리고 기도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교회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겠지만, 이해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정말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뭔가를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랑할 만한 것은 성경 공부 자체가 아니라,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신학적 개념을 다시 이해하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요약입니다. 하지만 제 요약이 그렇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 알겠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구나. 믿음이 데살로니가인들처럼 매우 강하다면, 이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이해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믿음은 이해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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