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바울의 복음 시리즈 3-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 된 자들입니다

필기를 참고

1.서론

a.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축복은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b.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c.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매우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약속이 없는 종교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d. 비전신학은 체계적인 신학이다. 전쟁을 하려면 완벽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오직 체계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그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e. 무지는 큰 재앙이다. 만일 당신에게 믿음이 있더라도 그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면,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자신이 노예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f. 종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지만, 아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하느님께 나를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반드시 나를 고쳐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이미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2.성경의 말씀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악속의 자년라.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노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가라디아서4:28-31)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우리 마음속의 노예 의식과 가난한 의식을 제거해 주십시오. 하나님, 갈라디아서에서 교훈을 얻어 당신의 약속에 따라 우리가 당신 앞에서 당신의 자녀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 앞에 나아와 당신의 순수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자녀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며, 참으로 복음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약속에 의지하여 당신의 얼굴을 뵐 때까지 당신의 약속대로 당신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형상대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항상 우리를 채우시고, 능력과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당신을 더욱 닮아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성경말씀의 배경

a. 갈라디아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 후,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성경 공부와 기도를 열정적으로 인도하면서 모세에게 복음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b.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고, 모세는 율법을 공포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의 근거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c. 아브라함 시대에 하녀 하갈이 육신으로 난 아이인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약속으로 태어났으며, 약속으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d.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했습니다. 사람은 살과 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 성령을 받는 것은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중국의 운명신학은 신의 말씀을 매우 중시하며, 이해는 신에 대한 지식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5. 노예적 사고방식

a. 갈라디아인들은 전형적인 노예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치유를 구하는 것은 노예적 사고방식입니다.
b. 노예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노예가 아니라 자녀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c. 마음이 인색하면 노예가 됩니다.
d. 노예의 사고방식은 하갈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노예가 성공하면 오만하고 자만해진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것은 간접적인 것이었고, 그는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6. 아들의 사고방식

a.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아들의 사고방식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습니다.
b. 아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결코 공손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c.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거침없이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교회를 건설합니다.
d.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관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집행하는 데 충실해야 합니다.
e.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약속에 의지하여 이 땅에 살아갑니다.
f.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에서의 논리 체계를 갖고 칼로 살기 때문입니다.
g.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율법 아래서 살았고, 규칙을 따르는 법을 배웠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실수를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분은 바로 신이십니다.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a. 주 예수님은 장남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 요소입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집니다. 이것은 육체의 악한 행위를 죽이는 과정입니다.

8.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함

a. 자라서 사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에 도달하십시오.
b. 성장은 이해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비전신학은 학습의 신학이며, 지속적인 성장의 신학입니다.
c. 더 이상 기독교 교리의 시작에 멈추지 말고,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냅니다.

9. 결론

사람은 노예의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고 아들의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며 성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사도 바울 복음" 시리즈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도 바울 복음"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12장에 걸쳐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 복음" 시리즈의 세 번째 강의인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강의에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어떤 축복을 나눠야 할까요? 누군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크게 하시고, 우리 자손을 큰 민족으로 만드실 줄 압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중요한 축복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 약속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누가 받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바로 우리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왜 교회를 세우고 싶은가요? 지난 몇 년 동안 교회에서 제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점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안에는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 부분이 있지만, 저는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믿습니다. 이것이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바른 길입니다.

저희는 교회를 세울 때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 많은 유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믿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무도 저의 고집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 되었습니다. 저도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역 교회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약속 없는 종교를 전파하며,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약속은 사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약속은 제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오랜 어둠의 시기를 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중국 예정론은 체계적인 신학을 형성했습니다. 체계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체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할 방법이 없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농담이 있습니다. 새로 구입한 비행기가 격추되었고, 많은 분석가들이 이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격추되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현대전은 지상, 공중, 위성, 수십 대의 비행기가 "뱅뱅뱅" 하는 시스템입니다. 체계가 없는 자는 체계를 가진 자와 싸울 수 없습니다.

이 영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웁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의 복음" 시리즈는 완전한 복음 체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영계에서 싸우고 악마가 방금 산 비행기를 격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합니다. 무지는 엄청난 재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지를 해결하는 데는 대가가 따릅니다. 배움은 중국 운명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배우기를 싫어한다면,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설교만 듣고,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고, 메모조차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무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무지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노예처럼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중국 운명론 체계를 배워야 합니다. 만약 다른 신학 체계를 만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에게 예정된 신학 체계는 사실 바울의 신학 체계이며, 이것이 핵심입니다. 절대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매우 치명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만, 문제에 직면하면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체계란 무엇입니까?" 체계는 완전한 체계입니다. 예를 들어, 완벽하고 잘 꾸며진 집은 이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집이 불완전해서 건축 중에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을 만드는 것을 잊었다면, 그 집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회계를 공부한다고 해서 단편적인 지식만 배우면 회계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체계를 형성하려면 회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버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를 권합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듣고 나서 숙제를 좀 하려고 했지만, 그대로 따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 운명론은 투쟁의 신학이고, 중국 운명론은 승리의 신학이며, 완전한 복음 체계이고, 교회를 세우고, 싸우고 승리하며, 정예 군인을 양성하는 체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우고 또 배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모든 수업을 다 들었어요. 위에서 말씀하셨으니,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만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 아닙니까? 그러니 더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안다면, 운명론을 만들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분이라도 마귀를 이기는 것"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만, 완전한 체계가 없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1분이라도 마귀를 이기는 것"은 단지 단편적인 조각일 뿐입니다. 이 완전한 체계 안에는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든 개념 중에서 저는 두 가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종의 사고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종의 사고방식은 약속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위치가 바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은 헛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고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밥 한 그릇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치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를 치유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치유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악령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합니다. 한 번 시도해 보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려 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훔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제 영광이고, 제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하나인데, 누구의 영광을 훔쳤습니까?" 너무 어색하게 굴지 마세요. 저는 어색한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들은 그런 고지식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항상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관계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함께할수록 더욱 차가워집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께 예의를 갖춰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해도 될까요? 하나님, 제가 저렇게 해도 될까요?" 당신은 노예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집에서 노예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사실 저는 그렇게 큰 야망이 없어요. 그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위해 바닥을 쓸고 싶을 뿐이에요." 이게 바로 노예의 심리가 아닐까요? 모든 게 노예의 심리예요. 어떤 아이들은 좀 어리석게 태어나서 관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고, 부모를 마치 외부인처럼 대한다고요.

어느 자매가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한다고 아이를 때렸어요. 아이의 아버지가 다시 와서 또 때렸죠. 결국 아이는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어요. "경찰에 신고하고 싶어요. 아빠가 가정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이 아이는 정말 어리석어요. 부모가 자기 이익을 위해 그러는 줄도 모르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리석었던 적이 없어요. 한번은 학교를 빼먹고 아버지를 화나게 한 적도 있어요. 아버지는 5cm 너비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제 엉덩이를 때렸어요. 저는 순식간에 맞아서 대학에 진학했죠.

제 고향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 아이는 우리 지역 최고의 고등학교에 다녔고,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어요. 그 결과, 그는 모바일 게임에 중독되었고 성적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휴대폰을 박살 냈습니다. 아야, 이번에는 정말 말벌집을 쑤셔 넣었습니다. 아이는 부모님을 칼로 찔러 죽이고 건물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가족 세 명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들의 뇌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그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제대로 키우지 않았고, 그의 나쁜 습관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아이를 짐승으로 키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어머니이고, 누가 아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이를 아이답게, 부모를 부모답게 만들지 마십시오. 이는 흔한 현상입니다. 나쁜 행동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아이는 바보가 되고 온 가족이 비극을 겪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맞으면 바로 미워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은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나쁜 일만 많이 기억합니다. 어떤 일을 하라는 요청을 받으면 억울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 우리는 경찰에 신고하고 싶어 합니다. 경찰에 뭐라고 신고하고 싶습니까? 마귀에게 불평하고 싶습니까? 노예 의식이 너무 강합니다. 어떤 일이 닥치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처리했는지 돌아보기보다는 "하나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실까?"라고 의심합니다. 이는 매우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애굽을 떠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노예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시간에 노예 의식을 바꿀 수 없었고, 결국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관계의 위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강한 팔로 그들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잊고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하나님, 이집트에 우리 무덤이 없는데 왜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두십니까?" "가나안에 거인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 거인들은 키가 3미터가 넘고, 그들이 든 무기는 바퀴 축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들의 머리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기억을 믿지 마십시오. 인간의 기억은 매우 왜곡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에 굳게 세워져 있으며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든, 홍해가 앞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요단 강이 앞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광야를 걷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며,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8-31절을 읽어 봅시다.

2.성경의 말씀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악속의 자년라.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노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가라디아서4:28-31)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우리 마음속의 노예 의식과 가난한 의식을 제거해 주십시오. 하나님, 갈라디아서에서 교훈을 얻어 당신의 약속에 따라 우리가 당신 앞에서 당신의 자녀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 앞에 나아와 당신의 순수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자녀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며, 참으로 복음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약속에 의지하여 당신의 얼굴을 뵐 때까지 당신의 약속대로 당신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형상대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항상 우리를 채우시고, 능력과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당신을 더욱 닮아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말씀의 배경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운 후,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매우 열렬히 대하며 성경 공부와 기도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들은 매우 열렬했습니다. 그러자 갈라디아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도 믿어야 합니다. 누가 구약 성경을 지키고 싶어 하겠습니까? 야고보서를 쓴 사람은 바로 야고보입니다."

야고보 아래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읽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경을 잘 읽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며, 너희는 그것을 지킬 수 없다고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납득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을 지키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와 베드로가 대표하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요한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들의 열심을 보고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고, 행동에 기반한 것들. 왜 그들은 가르침이 행동에 기반한다고 설교할까요? 그들은 모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사람들은 매우 흥미롭고,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에게 개종한 목사가 있습니다. 당신은 왜 마틴 루터에게 개종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개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개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하게 읽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마틴 루터에게 개종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게 들리는지 알겠습니다. 왜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개종하지 않습니까? 이것 또한 제가 매우 놀란 부분입니다.

야곱의 무리가 갈라디아에 와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세에게로 개종시켰습니다. 왜 그들을 아브라함에게로 개종시키지 않습니까? 이것은 매우 악한 일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고, 모세가 율법을 내렸고, 율법책이 아브라함에 대해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쓴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세가 썼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모세가 전한 율법서의 기초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네가 율법을 내놓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을 내놓자. 내가 갈라디아서를 쓴다면 더 직접적으로 썼을 것이다. 너는 모세의 율법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그렇게 자랑하느냐? 대단하다고? 하지만 바울은 더욱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율법서를 꺼냈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너희가여, 내게 말하라.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아브라함과 그의 두 아들에 대해 들었느냐?" 바울은 아브라함을 언급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에게는 혈육으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사라는 자기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주었고, 그녀는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네 자손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사라가 말했습니다.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한 사람은 혈통으로 난 자요, 육으로 난 자는 육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약속으로 난 자요, 약속으로 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면 우리는 약속으로 난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지만 이삭 시대에 에삽이 태어났고, 그 후에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에삽은 자손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야곱은 자손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자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것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유산입니다. 야곱은 왜 하나님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약속으로 되는 것입니까? 이 논리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럽고, 저는… 제가 명확하게 설명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여러분이 명확하게 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제가 명확하게 설명했지만 여러분이 명확하게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확실히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논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약속이 아니라 육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우리가 믿기 때문에 주어지고, 그래서 약속된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며, 우리는 아바 아버지,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저는 당신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약속에 근거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할 수 있다면, 왜 그럴까요? 당신 안에 아들의 마음이 있고, 성령과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뭔가 기여하고 싶다면, 당신은 노예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제가 당신의 마당을 청소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신발을 닦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수염을 깎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문제입니다.

매우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도 왜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을 받았을까요? 성령을 받은 후에도 어떤 종류의 성령이 내주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주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서 유혹하며, 특정한 날, 달, 절기, 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도 왜 그는 여전히 길을 잃었을까요? 성령이 그들을 진리 안으로 인도할 수 없는 걸까요? 성령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우리의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점차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이해와 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인과 고린도인들이 성령을 받았지만 여전히 미혹당한 이유입니다. 중국 운명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강조합니다. 이해의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이해에 대한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해야 할까요? 영으로 기도해야 할까요? 네, 그리고 그 이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겪어야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마음에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세 이야기를 꺼내자 갈라디아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창세기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모세서 전체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을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더 이상 무지하게 살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 성경을 꼭 확인해 보십시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약과 구약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하지만 바울 시대에는 신약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읽은 것은 이사야, 창세기, 출애굽기를 포함한 구약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은 완전한 체계이며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과 구약은 같은 맥락입니다. 나중에 교회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으로 기도했던 많은 목사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별력이 없었고 정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언 기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나 귀신 쫓아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완전한 체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매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면 너희의 원수가 된다는 말이냐?"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이 아닌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반응은 "뭐라고? 너희만 옳다고 했어?"였습니다. 바울은 숨이 막혀 오랫동안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섬기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진실을 말했는데, 너희의 원수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요? 갈라디아 교인들은 모두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의 사고방식

노예의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 교인들은 전형적인 노예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치유를 구하며 "하나님, 간청합니다."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노예의식입니다. 효과가 있을까요?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예가 아니라 아들딸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노예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노예의식 속에 삽니다. 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이것은 효과가 없고, 이것은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특히 싫어요. 제 집에 와서 제 집에서 살면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조심해, 귀찮게 굴지 마. 그래서 이 말이 귀찮아지는 겁니다. 당신은 무엇에 조심하는 겁니까? 왜 이것저것 옮기지 않습니까? 찬장에 있는 라면 몇 봉지나 신경 쓰겠습니까? 제가 부자는 아니지만, 라면 몇 봉지, 비스킷, 꿀 등은 식비로 사는 거 아닙니까? 당신은 제 집에 손님이고, 제 집에 묵을 때는 집세를 내지 않습니다. 왜요? 사람들은 마음이 인색합니다.

명심하세요! 마음이 인색하다면 노예입니다. 아직도 노예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신의 노예 의식을 바꾸기에는 너무 지쳤습니다. 그도 노예인데, 여전히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가시게 굴지 말자,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자." 양산 영웅들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좀 거칠고 대담한 게 좋습니다. 밤에 땅콩 한 접시 먹고 술이나 마시자고요.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는 너무 소심하고 도둑 같습니다.

이 노예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이 노예 의식은 하갈에게서 나왔습니다. 하갈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느 날 임신을 하고는 거만해졌습니다. 노예가 정상에 오르면 정말 놀랍습니다. 궁궐 드라마를 보면, 악당들이 성공한 후에는 거만해져서 주인 사라를 하녀처럼 대하고, 사라가 주인이 된 후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만해집니다.

"사라, 물 한 잔 따라 줘." 사라는 물 한 잔을 받아 얼굴에 뿌렸습니다. "물 한 잔 따라 줄게. 왜 그렇게 거만해? 뱃속에 아기가 있다고 그렇게 대단한 거야? 내가 너를 남편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떤 아기를 낳았겠어? 널 쫓아내고 거만하게 굴게 해 줄 거야." 노예의식은 끔찍합니다. 노예가 성공하는 것은 끔찍합니다. 회사처럼, 환경미화원들 사이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고 끔찍합니다.

노예의식을 가진 하갈은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그녀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알고 있을까요? 그녀는 아브라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요? 그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것이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세요. 그녀는 중고품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질 수 없어. 그냥 손자일 뿐이야." 하나님 나라에는 손자가 없다는 걸 모르시나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손자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손자는 한 세대 차이일 뿐, 하나님 나라에는 세대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신은 스스로를 배제했습니다.

하갈은 앞에는 마을도 없고 뒤에는 가게도 없는 광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는 상태가 좋지 않았고, 갑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돌아갔을까요? 그녀는 돌아갔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까요? 그는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랐을까요? 그는 자랐습니다. 그는 교훈을 배웠을까요? 그는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녀가 "내 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면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이 심리입니다.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매우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 예의 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일이 좋습니다. 저에게 하나 주세요.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작은 끈에 불과합니까?" 겸손한 척하며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육신의 악한 욕망을 죽이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나중에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라 아들 이삭과 놀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라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너무 심했습니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매우 걱정했습니다. 결국 이삭이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내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려갔습니다. 그녀는 떠날 때 물병을 가지고 갔지만, 산 끝에 다다르자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노예의식이었습니다.

하갈은 하나님과 많은 경험을 했지요. 사라가 이삭을 낳았는데, 모든 것이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나요?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갈이 "사라야, 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요, 내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요, 네 집이 내 집이요, 너는 내 주인이요, 나는 네 종이 되겠다"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요? 그녀는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악당이 성공하면, 그는 매우 교만하고 자만하게 됩니다. 이러한 노예의식은 좋지 않습니다.

아들의식

아들의식은 특히 좋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 것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것은 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당신의 돈은 제 돈이고, 제 돈은 당신의 돈입니다. 그러니 함께 쓰자고요. 그래서 아들의 사고방식은 종의 사고방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요즘 교회들은 흔히 무슨 말을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훔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영광이 전혀 없는데, 암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들의 사고방식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 아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것은 내 것이고, 나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의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저와 논쟁하며 "아, 누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잖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왕위가 아버지이고, 이건 짐승이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하지만 하나님의 집에서는 결코 하나님께 예의를 갖춰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를 얻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당신의 뜻은 우리를 아들딸로 삼는 것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붙잡아 하나님의 뜻대로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아들의 마음입니다.

아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자 우리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셨고, 모세도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했으며, 우리도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이것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을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거절해야 합니까?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처음부터 받을 자격이 없었어. 내가 공짜로 주지 않았나? 왜 공손하게 구는 거야?" 당신은 말합니다. "아, 충분하지 않아. 내가 충분히 잘하지 않았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결코 충분히 잘할 수 없을 거야." "이 바보 같은 자식아, 왜 여기서 공손하게 구는 거야? 충분히 잘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건 행동에 따른 행동이라고 해."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약속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자주 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아멘!

당신은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왜 이렇게 가난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을 활용하지 않습니까?" 당신 안에는 노예의식이 있고, 생계를 위해 자기 손으로 칼을 휘두르는 논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합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고 해서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노예의식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하지만 두세 살쯤 되는 어린아이일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바지에 똥을 싸기도 합니다. 그때는 여전히 규칙을 정해야 하므로,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키가 작고 못생겼더라도, 바지에 오줌을 누고, 똥을 싸고, "엄마, 우유 주세요."라고 계속 중얼거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이런 아이 같은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 율법 아래 갇혀 규칙을 따르는 법을 배우지만, 규칙을 따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결코 부인될 수 없습니다. 규칙을 잘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규칙을 잘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규칙을 잘 따르지 않고,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성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아십니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이시며,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아들이라는 칭호이며, 우리는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며,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 요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이 아들됨을 성취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더욱 닮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으며,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운명론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무엇을 할까요? 회복입니다. 반인반유(半人半遊)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육신의 악행을 죽이는 과정입니다.

자라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라

바울의 복음에서 "나는 구원받았고,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런 논리도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에는 그런 논리가 없습니다.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악마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 나는 구원받았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자 구세주로 영접했어."라고 말합니다. 무슨 구원입니까? 여러분은 여전히 ​​자라야 하고, 하루 종일 떠들고 비에 젖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말했던 많은 교회들이 결국 귀신에 의해 파괴되어 비참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왜 그렇게 비참했을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지 못했고, 이해력도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성장은 이해력의 성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운명신학이 배움의 신학이자 지속적인 성장의 신학인 이유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계속 인도한다면 세 살배기, 두 살배기 아이들이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싸울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길의 시작에 머물지 말고 온전함에 이르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성장하는 데 사용하십시오.

때때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발로 차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가 아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발로 차시며 잘 자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두통이 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리가 아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발로 차시는 것이 아닙니까? 발로 차고, 발로 차고, 당기고, 끌어당기면서 당신이 최선을 다해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늙었는데 왜 자라야 합니까?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으로 태어난 아이이고, 아이는 다 자란 아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무엇이라고 불립니까? 어릴 때 우리는 여전히 노예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세속 세상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입니다. 자녀는 다 자란 자녀를 말합니다. 어릴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립니까? 어릴 때는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세속적인 초등학교의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아들입니다. 아들인 이상, 우리는 상속자가 되기 위해, 즉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업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서둘러서 잘 성장할 기회를 잡으십시오. 일흔 살에 주님을 믿는다면, 일흔 살부터 여든 살까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지니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이 더 필요해지는 것이지, 나이가 든다고 하나님이 덜 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복음입니다.

결론

저는 모든 분들께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고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기를 권합니다. 다섯 장밖에 되지 않아 읽기 매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기 위해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아들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며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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