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고린도전서11장-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필기를 참고

1.모방과 상속

a. 인간의 모든 지식은 학습되고, 모방되고, 유전됩니다. 스스로 만들어내지 마세요.
b. 비전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모방과 상속입니다. 예수를 닮는 것과 예수를 닮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우리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경멸하셨고, 우리도 죽음을 경멸합니다.

2.모방과 상속

a. 인간의 모든 지식은 학습되고, 모방되고, 유전됩니다. 스스로 만들어내지 마세요.
b. 비전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모방과 상속입니다. 예수를 닮는 것과 예수를 닮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우리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경멸하셨고, 우리도 죽음을 경멸합니다.

3.변론하지 마라

a. 무언가가 부패했다고 주장하거나 논쟁하지 마십시오. 모방하고 상속받기 위해 논쟁할 필요가 없고, 규칙을 준수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b. 군대는 반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통제하고 계시므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c. 하나님의 말씀을 논쟁하지 말고 먼저 전하고 본받아라. 그러면 너희는 점점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4.분류와 파벌, 분쟁은 모방이나 계승이 아니다

a.분열, 당파, 다툼은 모방이나 상속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b. 분열, 당파, 분쟁 뒤에는 불화의 정신이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험담의 영을 이겨야 하고, 그런 다음 불화의 영을 이겨야 합니다.
c. 바울서신과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d. 비전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모든 사람이 예수를 닮고 예수를 닮는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강력하고 축복받은 신학입니다.

5.성찬의 원래 의미

a. 성찬의 본래 의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이 빵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c. 성찬의 목적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 자신을 변론하지 말고, 주 예수님의 권위 개념을 본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 있어서 주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6.솔선하여 자신을 검토해 보십시오

a. 성찬을 받는 것은 형식화하기 쉽습니다. 성찬을 받을 때 자신을 더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b. 몸이 아프다면 더욱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고린도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경전을 여러 번 읽었고 모두가 주제를 아주 잘 찾았습니다. 이 장의 주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나를 본받으라"입니다.

1. 모방과 상속

사람의 특성이 있고, 이생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글쓰기를 배우는 것을 포함하여 어린 시절부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어는 다른 사람에게서 학습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타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지가 자신이 만들어낸 단어들로 가득 차 있다면, 당신은 확실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에세이에서 항상 낙제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열심히 공부했지만 항상 자신의 말을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지식은 모두 학습됩니다. 수학은 수학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작문을 쓰는 것은 실제로 배운 것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기사가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빠르고 쉽게 글을 쓰는 것입니다. 복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단지 단어를 재배치하고 조합하여 의미를 표현하십시오.

중국 운명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모방과 상속이며, 우리는 이것을 사역에서 가르칩니다. 기본적으로 당신이 발명한 것 중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세트를 만들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특히 발명품을 좋아하는데, 현재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온갖 종류의 발명품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바울 시대의 고린도인들보다 더 창의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주님을 믿는 것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나의 대답은 당신이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한 당신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과 같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해당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와서 두 가지 직업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묻거나, 형제와 상속 재산에 관해 논쟁하고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나가십시오. 그것이 제가 발명 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감히 예수께 나아오지 못하고 그 말을 하지 못합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비켜가라고 하시는 말씀을 감히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지 여부는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 운명신학에서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도 같은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매우 정통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대의 교회들은 전혀 예수님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잊어버리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큰 고통을 겪으셨으며, 심판과 채찍질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멸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본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두려워하셨다면 우리도 죽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유산을 본받고 물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모방과 유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귀구자(귀구자) 밑에서 공부했다면 나는 그 손빈일 것이고, 내가 석가모니 밑에서 공부했다면 그것은 대승과 소승 전체일 것입니다. 나는 본받기와 계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잘 본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석가모니를 믿으면 우리는 석가모니를 잘 본받아야 합니다. 수학을 공부한다면 수학 책에서 배우고 스스로 발명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하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만들면 곤란합니다.

수학뿐만 아니라 화학, 물리학도 책을 통해 배웁니다. 많은 것들은 지식 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 발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가장 창조적이며, 오늘날의 기독교는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나는 '새 시대의 기독교 변혁'이라는 특별 컨퍼런스를 개최했습니다. 내 말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방과 상속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바울에게서 주 예수님에 관해 들었다면 우리가 읽는 신약의 대부분은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야고보서를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형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본받지도 상속받지도 않았음을 이 책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기회가 되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웹사이트에 야고보서에 관한 성경 연구가 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주의 깊게 읽었으며 그가 그것을 모방하거나 전수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일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를 본받는 것인지, 예수의 형제를 본받는 것인지는 개인의 의견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자코바이트주의를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내가 본받는 것은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면 잘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지 않으셨다면 잊어버리십시오.

잘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는 모방과 계승에 있습니다. 잘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생님의 강의만 듣고 자기가 에디슨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매일 공부하느라 바쁘지만 여전히 시험에 실패해요. 이것은 확실히 천재입니다. 에디슨은 자신이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창업주라고 생각하고 GE 제너럴 일렉트릭(GE General Electric)을 창업했고, 냉장고를 이용해 에어컨을 만들었다는 게 엉망이었다.

2. 모방과 상속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린도전서 11:3)

권위의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머리는 당신 위에 있는 권위입니다. 위의 권위에 불복종하면 큰 혼란이 초래되어 번거롭고 치명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머리이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고 권세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가운데 줄 중 하나가 비뚤어진 경우, 예를 들어 남편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그 줄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이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돌지니라.(고린도전서 11:10)

남자, 여자, 권위 얘기를 하면 솔직히 예전에 일할 때는 여자 직원을 부하로 채용하는 걸 별로 안 좋아했어요. 사무실에 형제들이 모두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나에게 문제를 덜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자매들이 귀엽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져오는 문제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이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지을 때 많은 자매님들이 오셨습니다. 이 자매들이 나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바울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만나면 걱정도 덜고 일을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가 더 쉬울 텐데, 자매들은 할 일이 더 많아졌고, 내 머리도 더 커졌다.

권위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바울이 논한 바가 있는데, 그도 경험이 많았을 것 같은데, 나처럼 경험이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매들이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사실, 머리를 가리든 가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가리면 항상 자기 위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그들은 빨리 손으로 붙잡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나는 항상 내 권위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매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내가 그들의 권위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나중에 나는 여성에게 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 중 자매들이 자신의 권위가 누구인지 종종 잊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한 자매님이 전화로 목사님께 사과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얼마 전 우리 예배를 통해 우울증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목사님께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 사이에는 그런 규칙이 없어서 전화를 받고 때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성질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가야 하는데 나중에는 최고의 여목사에게 가서 고치도록 하여 고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꼭 권위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위가 없으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무모하게 행동하고 오만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십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의 문제이고, 물론 남성에게도 남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끔 나는 좀 거친 말을 하며 이 자매들을 늙은 아줌마라고 부른다. 차별한다고 하지 마세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어요. 내가 말하려는 것은 권위에 대한 불순종은 매우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권위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가 주님을 믿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이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돌지니라.(고린도전서 11:10)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권위에 불복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손실을 입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여성이 더욱 그렇습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권위에 불순종하면 더 많은 손실을 입게 됩니다. 바울이 천사들을 위하여 여자들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여자들은 약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연약함은 불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실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교회 안에서 연약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권위에 불순종하면 천사도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수호 천사라고 불리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는 하나님의 선한 천사입니다. 타락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천사, 타락천사(타락천사)도 있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두 천사가 따라다니며 한 쌍을 이룬다. 당신이 권위에 복종할 때마다 하나님의 수호천사가 매우 강력해져서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권위에 불복종한다면, 여러분을 타락시키려고 마귀에게서 오는 천사는 매우 강력할 것이고, 여러분을 보호하는 천사는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이론은 Liu의 추측이기 때문에 약간 새로운 것처럼 들립니다.

권위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사람은 모방의 대상으로서 위로부터 권위를 가져야 하며,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신의 권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 사람을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머리를 가리는 것은 권위의 표시입니다. 지금은 머리를 가리는 분들이 계시는데, 머리를 가리는 것이 권위의 개념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가리고 있을 때 이런 행동을 합니다.

사람들은 안식일만 보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형식만 지켜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 개념을 주의 깊게 고려하기 시작했고, 많은 형제자매들이 권위라는 개념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매의 남편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매가 주님을 믿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요,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요,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노선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남자는 머리를 가리지 말고 여자는 머리를 가리라고 했습니다.

점차적으로 형태로부터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사실 권위의 문제이다.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은 버티지 못하면 그를 축복할 수 없다는 원칙을 요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버티는 것이 힘들어질수록 버티는 원리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지 말로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버틸 수 있느냐가 아니라 권위라는 개념입니다. 권위라는 개념이 없으면 천사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손실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당신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바로잡기 위해 올 것입니다.

3. 변론하지 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잇으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1:16)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읽고 바울이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소위 독재라는 것이 실제로 모세 통치 중에 시작되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십계명이 왜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그것에 순종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것에 대한 논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으로는 부패를 식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왜 피타고라스 정리가 있는지, 왜 제곱 더하기 b 제곱이 c 제곱과 같고, 왜 세제곱 더하기 b 큐브가 c 큐브와 같지 않냐고 묻는 것처럼 이것에 대해 논쟁하지 마세요.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으며 모방과 상속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모방하고 물려받고 싶다면 논쟁하지 마십시오. 아직 논쟁할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권위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면 많은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집에 자녀가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군인으로 갔다가 집에 남아 있는 아이와 큰 격차가 있다. 두 형제 모두 사실은 좋은데, 집에 있는 형제는 규율이 별로 없고, 군대에 있는 형제는 명령에 복종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상사와 논쟁을 벌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훈련할 때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아이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논쟁을 장려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실 창의성은 논쟁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창의성의 전제 조건은 규칙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창의적일 수 있겠습니까?

먼저 가르침과 유산을 따라야 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쓰는 방식으로 그 말을 써야 하며, 논쟁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는 논쟁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권위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이것을 순종해야 하는지 묻고, 온갖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논쟁하지 말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비록 바다가 휘몰아치고 파도가 거칠어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여전히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논쟁하는 법을 배우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논쟁하려고 만든 일련의 이유 때문에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는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린도전서 11:16-17)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제 반박을 함으로써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 말씀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반론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단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쓰여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쁜 놈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아이가 서예로 서예를 배운다면 고대인들이 붓을 쥐는 방법과 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논쟁을 좋아하다가 결국 어리석게 됩니다. 이때는 논쟁을 벌일 수 없습니다. 먼저 계승하고 본받아야 비로소 그 신비를 천천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은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사람의 글은 삐뚤어지고 둥글고 뚱뚱해서 한 눈에 알 수 있다.

4. 분류와 파벌, 분쟁은 모방이나 계승이 아니다

분열과 당파는 모방이나 상속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것을 창안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둘로 나누어 논쟁을 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분열과 당파 논쟁은 모방이 아닙니다.

첫째는 나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너희 중에 펀당이 있어야 너희 중의 옳다 인정함을 받을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린도전서 11:18-19)

한번은 싱가포르에 온 유명한 목사님과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세운 교회에 많은 분쟁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 명의 설교자가 각각 파벌을 형성하여 그 싸움을 해결하는 교활한 방법은 세 사람을 분리하여 각자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열과 파벌, 분쟁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불화의 영이 있어서 사람들을 험담의 영은 매우 강력하게 만듭니다. 나는 수년 동안 불화의 영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불화의 영은 교회 안에 분열과 당파와 분쟁을 야기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머리가 세 개 달린 뱀이 보였습니다. 각 머리에는 혀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사납게 보였습니다. 더 크게 외치는 게 더 힘이 들겠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바뀔 때까지 기도했는데, 사실 기껏해야 용기만 나고 결국 도망가더군요.

싸움이 이기면 교회가 하나되고 목회자의 일도 쉬워진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분열의 영, 당파의 영, 분열의 영을 이겨야 합니다. 그 전에 험담의 영을 이겨야 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험담 뒤에 숨은 악령이나 불화의 영에 의해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일련의 전투는 칼과 칼을 사용하여 매우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유명한 목사가 그의 세 명의 설교자들에게 각각 교회를 세우라고 요청했을 때, 교회에는 여전히 불화의 영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유명한 목사님은 교회를 세우기 전에는 여기저기서 설교를 잘하셨고,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교회를 짓고 싶다고 했더니 모두가 와서 문제가 생겼다. 방언을 하는 데 찬성하는 사람이 있고,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통로가 양쪽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방언을 하려면 머리가 두 개, 팔이 네 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 아침반은 방언을 반대하고, 저녁반은 방언을 선호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방법은 표면적으로는 좋지만 예수님을 본받지 못하고 상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그런 교회를 운영하다 보면 날마다 악령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며, 모두가 나의 영리함, 즉 모방하고 계승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도 떠나고 싶으면 빨리 나가라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내 개인적인 손길을 더하고 싶지만 내용은 동일하게 유지합니다. 처음에 교회를 짓고 싶었을 때 다른 교회를 찾아다니며 배우다가 예수님이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누구에게 배워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악한 길을 배웠지만 마침내 돌아와서 예수님에게서 배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의 편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복음서를 읽은 후, 나는 어떤 교회의 성경 공부도 우리 것보다 더 진실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세상의 보물을 골라 하나님께 가져가는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쓰레기를 가져오면 안 됩니다. 이런 지혜와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가 세운 교회는 예수님을 본받아 연합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지기 때문에 강력하고 축복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우리 가운데 모든 형제자매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처음 교회에 들어올 때,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음과 양의 표정이 있는데, 반은 예수님 같고 반은 악마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60%는 예수님처럼 되고 40%는 마귀처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을 걷다 보면 당신은 점점 더 예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부패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당을 일으키고 논쟁을 벌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 가족이 같은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독특합니다.

5. 성찬의 원래 의미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린도전서 11:16-19)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는 권위의 개념에 관해 이렇게 긴 문단을 썼습니다. 논쟁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을 분류하거나 파벌을 형성하거나 논쟁을 벌이는 것도 아닙니다. 성찬례의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지, 풍성한 식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찬을 큰 식사로 먹는다고 말하면서, 여기서 베드로를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바울은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도착하자 마가의 집에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개인 요리사들이 만들어 준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풍성한지, 모두가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고 힘차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전반부만 기억하고 후반부는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서던 밤에 떡을 가지사.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치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3-26)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가서 그 큰 일을 전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바울에게 미혹을 당했을 것이다. 성찬식을 위해 이렇게 작은 빵 한 조각과 포도즙 한 잔을 드십시오. 그래서 고린도인들은 먼저 주의 만찬을 바꿔야 한다고 느꼈고, 베드로의 경험이 틀림없이 옳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는 없지만, 여기에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너희 중애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증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린도전서 11:19)

여기 누가 베드로만큼 경험이 많습니까? 그런데 성찬을 거행하기 위해 전날 한 끼도 거르며 성찬을 성찬으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며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않게 하려 하심이라.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 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많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고린도전서 11:27-34)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너희가 목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린도전서 11:21-22)

이렇게 보면 멍청한 놈들이 모여들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 교회를 짓기 시작할 때 돈과 노력을 들여서 구운 닭고기, 오리 구이, 쇠고기 간장을 곁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한 입 들고 오고, 식사 후에는 그것을 치워야 합니다. 나중에 나는 이것이 상당히 부패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만찬의 원래 의도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더 큰 파이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파이는 5센트의 가치가 있고 내 파이는 5센트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빵과의 비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몸을 바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단지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 중에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고,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린도전서 11:25)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은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사실 이것도 내가 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내가 죽어도 상관없지, 노력을 하든, 피를 흘리든 상관없지? 우리 가운데 형제자매들이 왔으니,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는 데 동참해 주십시오. 어쩌면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찬의 본래 의도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있습니까? 사람이 화를 내면 그 얼굴이 어두워지거나 선악을 분변하게 되느니라. 본받는 자는 주 예수님이 아니라 가인을 본받는 자이다. 그들은 성만찬을 지키기 위해 경쟁하기도 하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을 두려워하여 줄을 섭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주 예수님의 권세 관념을 본받아야 하고, 주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되어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리의 얼굴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6. 솔선하여 자신을 검토해 보십시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주의 몸을 부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8-29)

성찬을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 죄이므로 쉽게 형식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자신을 성찰해야 하며, 성찬을 받을 때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과 같지 않은 부분을 살펴보시고, 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닮기 시작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솔선적으로 살펴봅니다. 사실 질병 수만큼 죄도 많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잡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린도전서 11:30)

사람은 아플 때 더욱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아플 때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우리가 우리를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1:31-32)

우리 자신을 성찰할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 논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자신을 검토하는 데는 적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당신이 자신을 좀 더 살펴보고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주 예수님처럼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면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성장했을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지거나 질병이 생기거나 거의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에서 막대기를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 예수를 본받지 못한 곳에 우리도 다시 본받아야 하고, 본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스스로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고통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손실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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