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사도행전24장-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필기를 참고

1.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방법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느니라
영적 정상에 올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있으니 내가 행하는 기적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찾으라

2.대가를 치르고 증거하는 것이 참 도이다

대가를 지불할 때, 진실과 거짓을 즉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기꺼이 지불하려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들에게 영생의 길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매우 영적인 세상이다
비전명신학은 대가를 치르는 신학이다

3.바울은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바울은 증거하고 대가를 치르러 왔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결박당했습니다.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영생의 길과 우리가 목격한 부활의 말씀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4.그런 증거을 들은 반응

간증을 듣고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영생의 소망을 위한 것

5.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받았는지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소망을 살펴보십시오.
펠릭스의 희망은 매우 모순적이다
기꺼이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희망이 진실이라는 증거입

6.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권능은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것
사람이 이 땅을 여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사도행전 24장을 보겠습니다. 나는 이 장이 매우 잘 쓰여졌다고 생각하며 내 마음에 와 닿는다. 과거의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의 면모가 누락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이 너무 적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결국, 그들이 정말로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렸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믿는다면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고, 당신은 인생의 문제를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것들을 간파하게 되면 당신의 영적 높이가 한 단계 더 높아질 것입니다. 당신의 영적 높이가 충분히 높지 않다면 당신은 여전히 매우 낮은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높이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런 삶의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24장의 주제는 “죽은 자의 부활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으니”입니다. 원문은 도리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도(道)입니다.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사도행전 24:21)

1. 죽은 자의 부활을 목격하는 방법

증언하다은 무슨 뜻인가요? 죽은 자의 부활을 목격하십시오.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한 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은 정말 없습니다. 나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는데 왜 죽은 자의 부활을 본 적이 없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기도를 하고 살아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정말 좋은 일인가요? 저는 이 공부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 당시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연구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것을 본 적이 있는지 묻습니다. 아니요, 저도 경험하고 싶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가본 적이 없고, 그것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성경에 나오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생각해 보니 나사로는 매우 불운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처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무덤에서 나왔고 그 후에 다시 죽고 두 번 죽었습니다. 그러면 죽는 과정이 얼마나 편안할까요? 좋은 느낌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 죽어 육체를 떠나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우리 자매님의 어머님은 거의 90세가 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노인이 돌아가셨고, 그 딸이 어머니의 몸에 대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자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온 후 딸에게 다음부턴 전화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영혼이 몸을 떠났을 때 마음이 편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조사하고 어떻게 증언해야 합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기도할 때 모든 사람이 나아진다는 간증이 날마다 있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조윤에게 세 가지 팁을 주는 것과 비슷하며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첫 번째 팁 가방을 먼저 열고 상황에 직면하면 두 번째 팁 가방을 열 것이며 세 번째 팁 가방은 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 가지 비결을 주셨는데 마지막 것이 없어져서 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잘 믿지 못했지만, 뭔가를 접하고 첫 번째 팁 봉지를 열었을 때,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팁봉투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더 생겼고, 두번째 팁봉투를 열어보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세 번째 팁 가방을 열었고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태가 좋았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믿을 것 같나요, 아니면 믿지 않을 것 같나요? 열 번째 팁 봉지를 열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이 예상대로이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사도행전 24:14-15)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9가지 팁을 요구할 필요는 없고, 3가지만 있으면 확신할 수 있습니다. 폴입니다. 바울이 많은 기적을 행하고 많은 간증을 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데까지 올라간 것을 간증이라 합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도 않았고 거기에도 없었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증언하리요?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권능을 증거하노라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권능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내가 행한 이적은 내가 믿는 말씀을 충분히 증거하느니라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간증이 그토록 적은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그들의 간증이 너무 적고 너무 나빴기 때문에 중국운명신학을 창설했습니다. 나는 단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일이 하나씩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큰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시작됐나요? 삶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에 소망이 가득하다면 주님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나는 살 희망이 없지만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조사하고 추측한 결과 인간의 삶은 공허하고, 인간이 살아갈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찍 죽는 것과 하루 늦게 죽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당신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만 더 사는 것이 큰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암에 걸려도 죽지는 않습니다.1년을 더 산 것은 단지 1년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1년 먼저 죽는 것과 1년 뒤에 죽는 것의 차이가 없고, 10년 일찍 죽는 것과 10년 늦게 죽는 것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당신이 항아리를 장식하면 나도 하나 장식할 거에요. 어떤 사람들은 더 대단해서 그의 재를 바다에 뿌리고 싶다고도 합니다. 이제는 이 배치도 안쓰는 것 같고, 그냥 맘에 드는 곳에 넣거나,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곤 하는 것 같아요. 단지 한 줌의 재가 아닌가?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이 한 간증이 여러분이 하려는 간증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이 가득할 때 구하게 되고 구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찾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내려다보셨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찌르도록 어린아이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준비하지 않으면 작은 악마들이 모두 올 것입니다. 당신이 준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소망이 없을 때에는 다른 소망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생의 소망입니다. 영생이 없다면 빨리 죽을수록 빨리 죽는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이 없으면 돼지와 같을 것입니다. 돼지에게도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구하고 탐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살펴보고 그것이 원리일 뿐만 아니라 능력이기도 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모든 사람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을 너무 사랑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생명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어떻게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직 생명을 사랑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작은 병에도 병원에 가는 사람들뿐입니다. 나는 왜 가지 않는가? 일찍 죽고 일찍 쓰러집니다. 나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다면 영생의 길이 되시는 하나님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2. 대가를 치르고 증거하는 것이 참 도이다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주님을 믿으면서 큰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나처럼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습니다. 나는 결코 쉬지 않고 일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밤중 3시, 4시든 이른 아침이든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봉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잠이 뭐가 문제지 적게 자도 죽지 않는다 일찍 죽고 일찍 넘어진다. 그러므로 대가를 치르는 문제를 통해 사람이 한꺼번에 나뉘는데, 어떤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났고,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이 세상에 왔는데, 이것이 아직도 가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나를 속이고 보여도 됩니다. 사실 나는 당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속임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은 실제로 속임수입니다. 바람을 피운 후에는 심판을 받아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했고, 지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어쩌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흥미로워하는 것을 보니 아내가 물으면 설교나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고 대답하면 즉시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가 야근을 하겠다고 하면 그의 아내는 그에게 야근을 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야근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떤 것이든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파티에 와도 상관없지만, 그의 상사는 그에게 잔업을 하라고만 합니다. 이 가격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영생의 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사람들이 영생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대가를 치르는 것은 큰 불의처럼 보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저에게 와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일요일에도 집회에 오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성경공부하러 오고, 화요일마다 내가 인도하는 기도회에도 오고, 그들도 마치 나를 위해 온 것처럼 느낀다. 그 사람은 왜 왔나요? 딱히 누가 올 필요도 없고, 교회에 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장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사도행전 24:1-9)

바울은 흥미로운 사람인데, 재판을 받고 증언하려고 예루살렘에 왔고, 헌금을 가지고 왔지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그렇게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 유대인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법정에 끌고 가서 바울이 죽기를 바랐지만, 바울은 그들이 살아서 영생의 도를 얻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멍청합니까? 바울은 그들을 위해 그토록 큰 대가를 치렀는데 왜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진지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러므로 바울이 교리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고, 교리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것도 옳지 않으므로 이것은 일반적인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사도행전 24:10-16)

도, 만약 당신이 대가를 치르고도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평범한 도가 아니라 진정한 도입니다! 사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살, 마흔여덟 살, 쉰여덟 살까지 살다가 살아 있으면 죽는데 이것이야말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참된 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룬궁도 대가를 치른다고 나와 논쟁을 벌인다. 그러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실을 목격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에도 간증이 있으니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불가능하다면 사람들은 여기까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유명 연예인들이 백룡왕을 찾기 위해 태국으로 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잘 기록되어 있고 사진도 있습니다. 백룡왕은 사용하기 쉽나요? 잘 작동합니다. 백룡왕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도 되고, 그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매우 영적인 세계이고, 영적인 세계가 매우 실제적임을 보여줍니다. 신과 유령, 온갖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회자로서 그가 자신의 직업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는지는 그가 속이는 것인지, 아니면 참 도를 증거하고 있는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함께 달려갑시다.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없는 사람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 홈페이지 구축을 도와주러 오셨는데, 문제없다고 했는데, 교회가 너무 커서 홈페이지 구축해줄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들은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작은 교회인 우리에게 웹사이트 구축을 돕기 위해 찾아와야 했다고요? 그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듣고 웃었는데 이게 무슨 교회냐? 이 사람은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없는 목사이고,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없는 그리스도인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신부를 직업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이곳에서 땅을 흔드는 간증을 경험하고 나중에 그 교회에 갔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 교회에 가면 좋겠다고 했고, 목사님은 나만큼 거칠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이것이 당연하며, 대가를 치르기 싫은 그리스도인을 목양하는 것이 대가를 치르지 않은 목사가 하는 일이고, 육신을 생각하는 목사가 목양하는 것이 매우 합당한 일이라고 말했다.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기독교인들의 집단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녀가 좋은 곳을 찾은 것을 축하한다는 것뿐입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봉사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주는 것뿐입니다. 증인이 있든 없든, 진실하든 아니든, 대가를 치르든 안 받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필요할 때,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기 위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가를 치르고 증거한다는 바울의 말은 참으로 묵상할 가치가 있습니다. 중국 예정신학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복음이다.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만약 제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는 노목사님에게 우리 중 평균적인 형제자매들이 그 교회의 전임 동역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자매가 두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하고 숙제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실제로 한 손가락 젠 기술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숙제를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잠이 안 올 때까지 계속 숙제를 해야 하고, 승리가 끝난 뒤에는 더 이상 잠을 못 자게 됩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중국운명신학에 와서 알찬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너무 바빠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아플 때나 속을 때에도 시간을 아껴 쓴다고 합니다.

3. 바울은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면 자기가 옥에 갇히게 될 줄 알면서도 자원하여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요 세상에 있기도 합당치 아니한 자니라 유대인들이 이 복음의 혜택을 받기 위해 기꺼이 감옥에 갇히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일입니까! 제 안에는 대가를 치르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뼈대가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드리는 중에 네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사도행전 24:17-21)

바울은 예루살렘에 온 것은 대가를 치르고 그들이 복음의 유익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갇히고 잘려질지라도 이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는 행복할 것입니다.이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결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신실하고 선한 종의 답안지, 성적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실하고 선한 종,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바울이 왔습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바울이 대가를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것은 단지 바울이 자신의 일에 진지하다는 것을 이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짓은 다 거짓말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또 속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세대에도 해당됩니까? 솔직히 말해서 수확할 곡식은 많고 일꾼은 적어 걱정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우리 형제, 자매, 동역자, 목사님들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실 수 있기를 바라며 조금씩 훈련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매일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다. 결국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도 여전히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 정도 감동을 받았는데, 우리 마음이 감동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은 기꺼이 죽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그분의 간증을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형제 자매들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한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나태해지고 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일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오늘날 우리는 정말 미국 사람, 유럽 사람, 아프리카 사람, 오세아니아 사람, 동남아 사람에게 하나님께 축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운명신학 홈페이지는 수만 건의 클릭 수를 기록하고 많은 사람들이 조회하고 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불안해서 작년 이맘때쯤 영어로 성경공부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작업을 하다가 또 어떤 일이 늦어졌다는 걸 깨닫고, 그냥 놔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회 시스템은 아직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목회 시스템도 사람을 돌볼 수 있는 한의학 시스템처럼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병들었다면 뿌리부터 치료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산에 호랑이가 있는 것을 알고 호랑이 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습니다! 폴입니다 오늘 제 말씀을 듣고 그 대가를 치르는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달리는 영생의 길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우리가 증거한 믿음의 대가를 치러야 하며 우리는 더 이상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순히 설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에어컨을 켜고 거기 앉아서 편안하게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소파에 누워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이들도 있다. 발가락을 뽑는 사람도 있지만, 발가락을 뽑는 것이 금지된 교회와는 달리 어차피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었고, 다 죽어 멸망할 운명이었습니다. 원래 나는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살고 있었다. 오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참된 길이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얼마나 정상적인 일인지 압니다.

4. 그러한 증언을 들은 반응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섬기는 것을 보고,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묻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섬김으로 암이 나았고, 내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호흡곤란이 나았는데, 치료를 받은 후에 또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그토록 믿으면 그 소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러한 간증을 듣고, 그러한 대가를 치른 간증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고문하여 죽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어떤 생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간증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이상했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반응도 유대인들의 반응과 비슷합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주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중국 운명신학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세요. 그들의 반응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사도행전 24:22)

그 주지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실제로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내적 반응은 사실 매우 강했습니다.그는 사람이 영생을 얻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현실은 그가 여전히 세상의 정치체제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Jianghu에서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또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는데, 도지사란 어느 나라의 봉건 관료에 해당하는 고위 간부, 현 도지사 또는 도당 비서로서, 어느 나라의 정치권력을 관장하는 직분을 말합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유대인 여자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아마 20여 년이 넘었을 것입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치유를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총독 벨릭스는 이 소식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아내는 몰래 예수를 믿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을 찾았는데, 그의 강의를 듣고 혼자 상담할 때마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는 말씀을 알았고, 자신이 심문하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진리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령관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고, 이것이 공식석상이므로 회의는 무산됐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릐 부르리라 하고.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사도행전 24:24-27)

그가 바울을 여기로 부른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바울이 명확하게 설명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설명하자마자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심판과 구마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합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시 듣는 것에 중독되었고 항상 알고 싶었고 그것을 찾을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바울이 자신에게 돈을 좀 달라고 부탁하기를 바라면서 매번 바울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흥미롭고 사도 바울이 참 도를 알고 그의 간증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에도 날마다 증인이 있었고 간수는 무슨 일이든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도지사는 계속 공직을 맡아야 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딜레마에 빠졌다. 특히 이런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함부로 대하지 말라 그들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이면 그 사람이 항아리로 마실 것이니라 그 위에 있는 상사는 자신이 관리를 잘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것이 그의 일이다. 그들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2년 동안만 감옥에 가두어 감독할 수 있었습니다.

증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면 당신이 그것을 목격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까? 일단 일하면 일이 당신의 신이 됩니다. 펠릭스도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유는 단 하나, 즉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가?

5.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겠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망에 대해 분명하게 썼습니다. 저도 그의 소망과 비슷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기를 바란다면 많은 일이 해결될 것입니다. 이 뿌리 위에 우리가 이 뿌리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이니, 약속의 땅을 주셨고,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을 먹게 하실지도 모르니, 우리가 다 먹는다면 우리는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영생의 소망을 갖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인데, 이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인지 판단하라고 하면, 그 사람 안에 영생의 소망이 어떻게든 들어 있어야만 조건이 있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는데 왜 영생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까? 영생의 소망을 갖는 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이 벨릭스의 소망은 매우 모순적입니다. 그에게도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도울 수 없으며 그 안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소망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를 짓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예수님께로 돌아와 영광스러운 찬양을 받기를 기다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이 우리와 사도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항상 간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되다는 것을 간증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기꺼이 대가를 치르면 여러분의 희망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임을 모든 사람에게 격려합니다. 그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다면, 그 안에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혼합물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와 영원한 논리 체계가 결합되어 풀릴 수 없는 단단한 매듭이 되기 때문입니다.

6.결론

오늘날 이 세상에서 소망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권능을 증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권능은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들과 그를 위하여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은 거짓 신자이고, 믿는 사람은 모두 사생아가 되었다. 신이 사생아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신 앞에서든 귀신 앞에서든 잡종인데 완전히 잡종 벼로 변해버렸으니 수확량이 꽤 높아서 곤란하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영생의 소망이 있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그리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종종 그를 위해 빨리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원할 때 소변을 볼 수 없었고, 원할 때 똥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하기 싫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뽑아내더군요. 먹을 수 없거나 꺼낼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삶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겪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십시오 당신이 증언하는 말씀은 진실로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말씀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이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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