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사도행전15장-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필기를 참고
1.사도 바울이 직면의 도전
바울은 계시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지만 복음의 진리로부터 오는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존재하게 하는 방법을 분석했고, 중국의 예정신학도 우리 가운데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의 전통적인 관념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2.베드로의 태도
베드로의 태도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3.야보고의 태도
야곱의 우월감은 육신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육적인 우월감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는 모세의 율법을 우월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진리로 삼으라. 야고보의 태도는 배려심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모세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4.예루살렘 교회의 상황
예루살렘교회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전하고 성경을 왜곡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지 않고 건축하지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교회, 전통이 믿음이 되고 변화가 되게 하세요.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5.사도 바울의 성격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울의 성격은 매우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바울은 매우 현명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한 바울은 지혜뿐 아니라 지식도 갖게 될 것입니다. 바울 역시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갖고 있었고, 복음의 진리는 곧 진리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순수한 복음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순수한 복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주로 바울의 성품을 물려받기 시작합니다.
6.실라의 태도
실라의 성격은 생명이 없는 성격의 성격이며, 그녀는 실라의 모범을 따라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길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과 실라를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자신의 육신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자와 제사장이 되는 것, 우리 성품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15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지난 몇 년 동안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정신학, 즉 비전신학을 정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바울에게서 나왔고 또한 이 장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의 주제를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붙였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 더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느니.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2:1-5)
이것이 이 몇 문장으로 설명되는 역사입니다. 오늘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 바울의 도전
사실 우리가 섬기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는 일이 종종 있는데, 과거 교회는 세상에서 으스러져 죽은 개미만큼 작은 교회였지만 현실은 너무나 잔혹합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다른 사람이 정하는 것인데, 당시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의 입장도 불안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바울에게 물러가라는 편지만 쓰면 바울에게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이 그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전히 매우 형식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나이 많은 제자이고,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므로 바울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예루살렘 교회에는 몇몇 유대인들이 내려와서 다른 곡조를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게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사도행전 15:1)
이런 논리가 있는데, 예수님도 할례를 받으셨으니 예수님을 닮고 싶나요? 그러나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본받아 할례를 받는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무리의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작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자신의 손에 복음의 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지혜도 없이는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계시로 예루살렘에 왔지만 당시 그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가 폐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명하고 아우라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뒤에서 많은 이념적 활동을 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만일 이방인이 할례를 받았다면 오늘 여러분과 나는 순수한 복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세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가 지금이나 과거에나 헛되이 달려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달음질을 헛되이 했다는 뜻입니다. 편지가 배포되면 마치 중앙위원회의 빨간 머리 문서처럼 되어 바울은 직위에서 해임될 것입니다.당시 정치 환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도전, 그리고 당시의 모든 기회를 분석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 진리를 지키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나바가 왜 종일 눈살을 찌푸리고 있느냐고 묻자 바울은 현 상황이 좋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섬김이 헛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사도행전15:2-4)
기도는 기도이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십시오. 거기 있는 사람이 솔선하여 물어보면 더 쉬울 것입니다. 이방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상 피를 먹어도 안 되고, 도적질도 안 되고, 살인을 해도 안 되고, 선한 일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면 피나 우상의 것을 먹지 않아도 상관없었고, 이제부터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 관건이었고, 모세의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사도행전 15:19-20) )
오늘날 형제자매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구약을 보는가?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당시 모세의 율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잘못 읽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후기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직접 기록한 오경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과 바울은 이해했습니다. 바울은 지혜가 있어서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이 입을 열면 일이 처리하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다룰 때라도 총회를 열기 전에는 지위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과 사적으로 의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사석에서 협의 없이 회의를 해도 마음대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바울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 베드로와 야고보의 사상적인 사역을 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체면을 잃으시면 안 되며, 상태가 안정된 후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위해 나를 참아주십시오. 바울은 절대적으로 현명하고 똑똑합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사도행전 15:5)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개인적으로 함께 일했지만, 베드로와 야고보는 비교적 민주적인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큰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실제로 바리새파 신자들은 교회 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크다. 즉 그들이 투표를 하면 베드로와 야고보를 둘 다 선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며칠간의 논쟁 끝에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돌보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확고한데 구원받지 않기로 한 그들의 결정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들은 뭐라고 말하느냐? 이 사람이 고집이 세다면 그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비전신학은 우리 가운데 순수한 복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은 토요일이고, 토요일이 일요일보다 더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우리 머리 속에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 이러한 교회 환경에서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전통적인 관념이 얼마나 많이 오염되었습니까? 바리새파 신자들이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들은 규례만 알고 하나님의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현 상황을 분석하여 이 상황에 대한 베드로와 야고보의 태도를 이해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은 어떠했고, 먼저 간략한 이야기를 드린 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게 하실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피터는 더 이상 이 뜨거운 감자를 만지고 싶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싸우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하루 종일 파리나 모기처럼 그를 괴롭히지 않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야곱은 이 뜨거운 감자를 만지기를 더욱 꺼렸으며, 자기 생각에는 이방인들이 부정하므로 만지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말할 여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원하며 예루살렘에나 사마리아에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며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루기 쉬운데,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과 정치세력의 상황을 하나씩 명료하게 분석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곱 사이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야곱이 베드로 위에 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이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직위였으며,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제자매들은 중국의 예정신학이 남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인도하려면 반드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2.베드로의 태도
모두가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피터는 무관심한 태도로 그 일을 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한 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나온 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 몇 년 동안 머물다가 몰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애초에 그가 체포된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석하는데, 아마도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내 추측이라 분석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지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보면 숨기 시작했고, 특히 바리새인들이 나타날 때에는 조금 방해가 되어 더욱 숨은 것뿐이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사도행전 15:7)
베드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그를 택하사 그의 입으로 이방인들도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려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도 그것을 꽤 잘 이해하고 있지만 자신을 매우 깨끗하게 유지합니다. 나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음을 느꼈고, 이 문장은 뜨거운 감자를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바울은 베드로의 부하이자 보조자였을 뿐이므로 관련 문제는 바울에게 가야 한다는 점도 언급해야 합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가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멈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우리가 저희와 동인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사도행전 15:8-11)
베드로는 사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이 일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태도로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누군가를 마련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괜찮으나 그들 자신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폴과 피터 사이의 사적인 협상이어야 합니다. 논의된 내용은 당신과 나는 우리의 추측을 통해서만 알 수 없으며 당신은 내가 잘못 추측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단지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직을 그만둔 것은 우리가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훗날 베드로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모두 한 식탁에 앉아 그분과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야곱의 편 사람들이 오자마자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당황하여 즉시 자기가 바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와 대화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바울은 이방인과 함께 있을 때 베드로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자기가 더 이상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아니하고 이방인을 볼 때마다 발바닥에 기름을 바르고 빠져나가는 태도였습니다. 주변에 야곱 쪽 사람이 없어서 계속해서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일행이 왔을 때, 그들은 이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절한 것을 먹었는지 확인하러 왔다고 속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방인 문제를 밀어냈을 뿐만 아니라, 야곱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 자리까지 맡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저는 늘 너무 궁금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하나님께 왜 베드로가 둘째 아이가 되었는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게으르셔서 나를 떠나지 않으셨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계시를 주셨는데, 그 계시가 사도행전 15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어떤 사람의 집으로 갔다. 떠나기 전에 그는 예루살렘의 행정권을 야곱에게 맡겼습니다. 돌아와서 사장이 되려고 하면 할 수가 없어요, 야곱은 아주 견고한 기초를 세웠으니, 즉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기 때문도 아니고,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라는 칭호를 버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순수한 복음의 길을 따르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며, 그들도 예수님을 주로 공경하면서도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기초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야곱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태도가 교회 안에서 매우 인기가 있기 때문인데, 사실 현재의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와 비슷합니다.
3. 야곱의 태도
야곱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마치 상하이 사람들을 만나면 상하이 사람들이 우월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베이징 사람들도 우월감이 있어서 동북 사투리로 말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야곱도 육체적으로 우월감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명문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남동생이고, 그의 어머니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니가 복중에서 뛰느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르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누가복음 1:41-48)
야곱의 우월감은 분명 육신적인 태도인데, 자기에게 이런 우월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사도행전 15:19).
우월감이 들리나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육체에 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육체가 만들어내는 우월감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이방인들을 왜 힘들게 하지 않겠습니까?이 메시지는 실제로 야곱의 부하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의미는 그들이 유대인이므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일을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효과가 있었지만 그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을 별로 지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꼈지만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야곱의 태도였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문제를 명쾌하게 분석했는데, 야고보는 자기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켜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이류 사람들이요, 그들 유대인들은 윗사람들이요, 그 이류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그들 가운데 남아 있는 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사도행전 15:20-21)
야고보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서를 읽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이것이 표준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류자들의 기준이 그렇게 높을 필요는 없는데, 모세의 율법이 복음이냐? 그러나 바울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을 때 이미 교회 안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했고, 그 당시에는 누구도 바울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진정한 모습을 순간순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울은 이미 지위가 확고했고, 이방인의 사도이자 이방인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으로는 아무도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특히 조심하십시오. 예를 들어, 주는 일을 어렵게 만들지 않을 것이며,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진리의 순수성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태도를 조심해야 하는데 왜 야곱은 이런 태도를 취했습니까? 그는 사람들의 뜻을 배려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동생이라면 안 되는 거고, 오만하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해요!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지난 몇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때까지 모세의 율법을 지켜왔고, 그들은 여전히 식민지입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가? 하나님도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성기에 작은 수술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을 처리하고 십자가를 지고 모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야곱의 태도를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세의 말이 각 성에 전파되었으나 예수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께서는 승진하셨고 모세와 함께 남아 계셨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우월감을 갖고 전통을 진리로 여기게 되는 것이 야곱의 태도입니다.
내 말을 듣고 참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듣고도 참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내 분석에서는 틀린 점을 찾을 수 없다. 실제로 이전 세대의 성경해석 전문가인 데이비드 폴슨(David Paulson)도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좀 난잡하다고 말했습니다. David Pawson의 영향력은 우리보다 더 큽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많은 복음관이 그 시대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David Pawson의 이해를 능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임스가 쓴 "야고보서"를 이해하지 못했고, 데이비드 포슨(David Pawson)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제가 한 말을 천천히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물론 도전해보고 싶으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제이콥이 틀렸다고 했죠. 그러면 정말 명확하게 읽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아마도 야곱은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예수님을 영접한 적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께 장난을 멈추고 집에 가서 목수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 밖에 섰나이다 하니.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2:46-50)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있는데, 들어보셨나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거늘 마리아와 야고보는 그렇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야고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온종일 소란을 피우고 있었는데, 야고보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아서 이 사람들이 바울의 교회에 많은 소란을 일으키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많은 일을 했지만 뒤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닮=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2:1-2)
나만큼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을 철저하게 읽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나만큼 잘 연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곱이 말을 아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야곱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그는 모세의 제자이지 전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방인들에게 함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고자 하면 내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눈에는 이 사람들이 보물이기 때문에 야곱은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이념적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거하니.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않식일마다 회다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사도행전 15:19-22)
그 말은 이들 바리새인들과 야곱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에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물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4.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
예루살렘 교회 성도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인데, 바리새인들의 영향력은 구약성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교회에는 위선자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전하려고 하여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야고보는 육신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늙은 낙타의 무릎까지 무릎이 닳은 채 성전에서 기도하며 온종일을 보냈지만, 평생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를 따르지 않고 모세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대신 유대인의 회당을 세웠습니다. 후대 역사에는 야곱이 회당 성전에 모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같은 계통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을 보시고 마음이 차가워지셨을까요? 실망하지 않는다면 폴을 스페어 타이어로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바리새인의 상황에 빠뜨린 것도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나요?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3천 명이 주님을 믿게 되었고, 5천 명 이상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는 그들의 전통적 뿌리가 바뀌기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한 명의 복음주의자에게 말하는 것보다 열 명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어떤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가라앉았습니다. 예상대로 그들은 모두 우리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고 자기들만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은 믿음이 되며,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화시킵니다. 즉, 오늘날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순수한 복음을 잃어버렸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고, 하나님의 성령이 이방교회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성품은 참된 복음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5.폴의 성격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은폐하에 있지 않았는데, 그의 지위가 안정적이었다면 오래 전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벗고 갈라디아서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품은 유연하고 지혜가 넘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이때 머리를 숙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게 될 것이며, 그의 목표는 매우 분명하다. 피를 먹든 안 먹든, 힘든 일이던 상관없습니다. 많은 말이 추악하게 들리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논쟁하지 않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 좋다 바울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매우 존경하였고 다녀간 후에는 오른손 십자가 즉 왼손이 오른손을 잡고 오른손이 왼손을 잡는 동작을 행하였다.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때로 나는 나에게 바울의 슬기로움이 있고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아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울에게는 지혜뿐 아니라 지식도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예수님을 따른 적이 없었지만 승천하신 후에 그를 부르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성경 전체에 대한 그의 이해는 결코 야곱의 그것보다 조금 나을 뿐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창세기를 사용하여 많은 것을 설명했는데, 그가 찾은 창세기는 우리가 찾는 창세기와 유사해야 합니다. 잠시만 용서해 주시고 이곳에서 제 자신을 칭찬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당시 바울의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최고 수준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켜야 하는지,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기준은 매우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가가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나갔을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반쯤 돌아갔고 바울은 더 이상 그를 데리고 갈 계획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마가는 다시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바울은 마가가 지난번에 어떻게 그 사슬에서 벗어났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고집했습니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사도행전 15:36-39)
나 역시 이런 버릇이 있고, 물론 나 자신도 성격이 별로 좋지 않다. 생각해보세요. 당신에게 사역을 맡긴 팀장이나 조교가 일을 잘하지 못하면 무너질 것입니다. 기회가 계속 주어졌는데, 이번에 조교로 일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설명해야 합니다.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언제든지 원할 때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다면 예루살렘에 갈 수 있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거기에 모두가 있기를 원할 것이지만 여기서 바울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놀고 싶으면 바나바나 야곱에게 가십시오. 우리와의 운명이 사라질 때까지 하루종일 여기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썼어요 우리가 다시 무너지면 우리의 운명은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의 타협하지 않는 성품은 매우 강력합니다.복음의 진리는 진리이고, 요구는 요구이며, 기준은 낮출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참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성품은 현명하고 끈기 있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피를 먹느냐 안 먹느냐가 중요한 것은 모세의 율법을 복음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성격도 여실히 드러납니다.그는 마가의 약점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마가를 데리고 가고자 하여 바울과 논쟁을 벌였습니다.사실 소위 장수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다투고 나서 마가와 바울을 데리고 헤어졌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실라는 마가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이러한 성품을 갖추어야 하며, 이것이 사람이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오늘도 조금 낮춰보고, 내일 조금 낮춰보고, 모레도 기준을 낮출 수는 없고, 시간이 좀 지나면 기준이 없을 텐데 괜찮을까요?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사도행잔 15:40-41)
그때부터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순수한 복음을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왔든 야곱의 것조차 잘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야고보도 베드로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했던 것처럼 이방인 교회도 무시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질문할 수도 없었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그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이르을 전하리라.(사도행전15:24-27)
여기서 유다와 실라가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것이 그들의 성품입니다.
6.시라의 캐릭터
실라의 성품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목숨을 제쳐두고 허리띠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존재하려면, 그래야만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염려하지 않게 되고, 우리 자신의 생사를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를 따르며 주님을 믿고 우리 가운데 은혜를 받고 싶다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목숨을 걸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삶과 죽음을 제쳐두고 하나님을 우리의 운명으로 섬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저런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처럼 사도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먼지를 털고 떠났습니다.
7.결론
오늘날 모든 사람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 바울과 실라의 성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으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합니다. 삶과 죽음을 제쳐두고, 삶과 죽음을 간파하고,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존재하도록 십자가의 길을 고집하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며 우리 자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의 육신을 처리하여 하나님 마음에 맞는 제사장과 제자가 되었습니다.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십시오 당신의 인격은 하늘과 땅을 흔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하나님께 가져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