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사도행전03장-표적과 기적이 다라
필기를 참고
1.성령이 충만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할 때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2.표적과 기적은 다음과 같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쓰레기를 모으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시는 일이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수준이 높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분명히 하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베드로의 모범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교회 개척이 끝이며 구원은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3.표적과 기적을 보고 설명하는 방법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당시에는 기적이 넘쳤지만 광야에서 죽었고 하나님이 지치신 백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고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5,000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경청한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목회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바울의 말은 지혜와 완곡한 표현의 말이 아니라 육체를 멸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방언 기도, 표적과 기사는 믿음의 핵심 요소이며, 가장 작은 은사이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믿음의 기초입니다.
4.베드로는 무엇을 설명했나요?
베드로의 설명은 무의미하며, 그 수준은 끊임없이 회개에 머물러 있으며 사도 바울의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선포이며,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책임입니다.
사람들이 명확한 머리, 명확한 설명, 교회에 대한 견해 및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교회는 비용이 많이 드는 개념이지만 위로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황폐 해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성취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5.기적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자신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신 예수님! 개종자의 수가 아니라 제자를 찾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6.표적과 기사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대한 확증입니다.
기적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가장 크고 영원한 영광을 위해 당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드리는 법을 배우세요!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사도행전의 세 번째 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서 망설여지는데, 가장 먼저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제가 초신자 였을 때는 그것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말이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장에서 베드로는 아주 큰 일을 한 것 같고 절름발이로 태어난 사람이 일어나 걷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소경과 절름발이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기 위해 베드로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베드로는 많은 말을 했습니다.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저는 베드로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적은 매우 낮은 수준이고 예수님은 그렇게 명백한 것을 거의 설명하지 않으 셨지만 베드로는 많은 것을 설명했습니다. 믿음의 날이 늘어남에 따라 베드로가 상당히 말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 만 그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다 알고는 있었지만 종합해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예수님과 죄, 그리고 어떻게 죄를 지울 수 있는지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시간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하며, 수준 측면에서 비교하면 예수님의 수준과 베드로의 수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장의 주제는 "표적과 기사로"입니다. 성령 충만을 아주 고상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 충만은 시작이며, 성령 충만 후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매우 높은 수준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을 따르고, 그분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기꺼이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이해력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수준은 깨달음 안에서 충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깨달음 안에서 충분한 믿음을 갖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입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현재 수준을 최대한 묘사했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 후에는 표적과 기사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성령 충만 후에는 권능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능을 받은 후 매우 흥분하고 기적을 체험한 후 자신이 사람들을 기도로 인도하고 병을 고친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자신이 매우 영적이고 놀랍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기적을 행하고 권능을 받았다고 해서 마치 자신이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것처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와 같은 사람들은 사물을 종합하고 예수님이 어떻게 보셨는지, 과거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사도 바울이 어떻게 말했는지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점차 성령의 충만함이 능력으로 이어지고 주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는 법칙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얼마나 높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권능을 가져다준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이것은 사실 성령 충만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거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베드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 뿌리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가 뿌리를 배웠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때 몇 가지 질문을하면 대답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누가 정신이 맑은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입을 열었을 때 말도 안되는 말을하는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지 않고 명료하게 말할 수 있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부하 직원이 된 것이 상당히 유익했지만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분량의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은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10분 동안 읽다가 '무슨 소리야, 난 못 읽겠어'라고 말하곤 했죠. 불명확한 내용을 쓰면 저에게 가져와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에 글을 쓰지만 머릿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질문을 할 때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컴퓨터를 켜야 하는데, 계획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컴퓨터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말을하는 것은 매우 나쁜 습관입니다. 부하 직원이 말도 안되는 말을하면 그는 나와 함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령의 임하심과 우리에게 주어질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러분과 별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2 표적과 기사가 함께합니다.
권능을 받은 후에는 표적과 기사가 뒤따르는데, 표적과 기사가 뒤따르는 것은 매우 예비적인 단계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목적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교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교회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이며 쓰레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쓰레기를 가져 와서 결국 하나님 께서 직접 저주하실 정도로 심하게 수리되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면 흥분하지만 저는 제 인생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전혀 흥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어떻게 보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형제자매들이 기적이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과 기사를 행한 목사님이 계셨고 유튜브에 그것에 대한 많은 비디오가 있지만 그 목사님은 직접 마케팅에 나섰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전도를 하는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표적과 기사에 흥분하지 마세요, 흥분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것이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기 위해 여러분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근처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두세요.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며, 사도 바울이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영적 수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적을 크게 행하기 위해 높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카리스마적 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기적과 이적에 대한 좋은 교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데 능했지만 나중에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기적은 쓸모가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기적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누군가 보용강 목사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곳에 갔지만, 사실 그는 많은 설교를 하지 않았고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설교했을 뿐입니다. 성경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에베소서, 로마서에 흑백으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베드로의 설교를 배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연구하고 교과서적인 사례 연구로 사용했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베드로의 가르침에 대해 약간의 혼란이 있었는데, 교회 개척을 진행하면서 점점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강력한 복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복음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오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의 복음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셨을 때 우리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재창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이미지를 보세요. 귀신처럼 보이나요, 아니면 예수님을 더 닮았나요? 표적과 기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 즉 구원입니다. 죄와 죽음을 용서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3 표적과 기사를보고 설명하는 방법
우리는 표적과 기사를 보는 방법에 대한 매우 체계적인 개념을 개발해야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세어 봅시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내리신 열 가지 큰 재앙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것은 마치 마른 땅 위를 걷는 것과 같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전이나 그 이후로 아무것도 본 적이없는 사람들은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결국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 한 자매가 자신은 저만큼 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이 자신의 몸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목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기도해 주니까 놓아 주었는데 3일 후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는지 신기해요.
표적과 기사를 보고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행한 기적에 대해 모두 말씀드리자면 한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설명한다면 하나님을 잘 사랑해야하며 중국 안수 신학은 얼마나 많은 귀신이 쫓겨 났는지 또는 사람들이 질병을 치료했는지 여부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때에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동안 병에 걸리는 것이 좋습니다. 모세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 이 모든 사람들은 광야에서 쓰러져 하나님을 지루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머릿속의 논리 체계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니지만, 미치도록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늘의 천사들도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실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도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을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느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17~19)
저는 환상이나 그 어떤 것도 보는 데 관심이 없고 오직 주 나의 하나님을 잘 사랑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처럼 주 나의 하나님을 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보물을 찾은 것처럼 제 마음이 녹아내릴 것입니다. 저도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이 말하는 것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많은 질문을하지만, 저는 이것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고 예수님도 이것에 대해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느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20)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며, 사람들은 이 열쇠를 잡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습니다. 베드로는 말을 많이 하고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지만 실천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는 말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번은 우리 자매 중 한 명이 새신자를 영접하고 중국 안수 신학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끝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끼어들고 싶었지만 너무 창피해서 배고프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잠시 후 신입생은 어쩔 수 없이 선생님에게 다시 밥 먹을 시간이냐고 물었습니다. 여전히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 자매는 배고프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하며 계속 먹겠다고 했습니다. 신입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선생님은 배가 고프지 않지만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배고프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저에게 녹음본을 보냈고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지 여부는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전화를 걸기 전에 전화의 목적이 무엇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가요? 그냥 들어 와서 쓸모없는 말을 많이하지 마세요. 이것은 중국 안수 신학의 명성을 더럽힐 수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베드로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수준이 주 예수님보다 훨씬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베드로는 작은 설교를 한 결과 5,000명이 회심했기 때문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교회에 5,000명의 교인이 생겼고 그는 흥분하기 시작했지만 이것이 주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묻는 것을 잊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러 가서 무릎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적을 일으키고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목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모든 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기쁨과 행복으로 함께 먹는 것은 목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모세, 사도 바울로부터 표적과 기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가 말한 것과 비교해 보면 계층 구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으며 이것이 제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이 한 말을 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우리의 믿음은 지혜와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증거에 기초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중에 육체를 다루는 것, 우리 안에있는 세상적인 가치 체계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 주 예수의 제자가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도 바울의 주요 라인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의 서신은 잘 읽히지 않고 이야기도 없지만 모두 정말 잘 전달됩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은 이 서신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적과 기사를 설명해야 할까요? 제가 표적과 기사를 매우 낮은 수준에 두었지만, 낮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면 더하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지만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표적과 기사는 우리 전체 신앙 체계의 핵심 부분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모두 매우 낮습니다.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는 매우 낮은 수준이고 아주 작은 은사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1"이 무엇인지 모르면 나중에 미적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4. 베드로는 무엇을 설명하고 있었나요?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사도행전 3:11)
오늘날 우리는 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으며, 표적과 기사가 우리를 따를 것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전파하신 말씀을 확증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주 우리 하나님을 기꺼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참해 주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말도 안 되는 말을 줄이고 명확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 역시 사물을 명확하게 설명하려고 애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사도행전 3:16-17)
사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역사상 많은 부패를 낳았습니다. 여러분은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도 그분이 주신 믿음으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믿음을 주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의 책임이며, 믿는 자에게는 표적과 기적이 임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신 후 주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발명품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여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탇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그러므로 너희가 희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사도행전 3:18-20)
이 문장은 혼란스럽게 들리는데, 제 부하 직원이 그렇게 썼다면 다시 써달라고 부탁해야 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말한 것을 여기서 반복하고 있으며, 사실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어떤 관점을 사용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텨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사도행전 3:21)
사도 바울이 말한 것보다 베드로가 말한 것을 더 주의 깊게 읽었으니 제가 주의 깊게 읽지 않았다고 잠시도 생각하지 마세요. 하지만 야고보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야고보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3:24-26)
베드로는 그것이 선지자들의 아들인 것을 어떻게 알았나요?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한 것은 선지자의 아들들이 아니었나요? 그 수준은 여전히 회개하고 죄의 수준을 떠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베드로가 개척 한 교회는 그 수준에 머물렀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도달 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스승이자 제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이 분명하지 않을 때 말도 안되는 말을 시작하고 말도 안되는 해석을하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교회관이나 신성한 계획도 없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죄 사함과 같은 낮은 수준으로 직접 축소하는 것은 표적과 기사와 함께 여전히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무엇이 수반되나요? 대가를 치르는 개념이 있습니까? 중국 안수 신학은 은혜의 신학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학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불하는 대가는 보통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동료들은 제가 너무 많이 굴려서 저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고 말합니다. 저는 목회, 봉사, 치유와 해방, 병자 치유, 귀신 쫓아내기 등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삶을 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을 볼 때, 이 시대의 영적 황폐함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볼 때, 제 마음은 남몰래 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하고 승리하는 교회라는 개념을 세우기 위해 대가를 치르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승리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 안수 신학은 값비싼 승리의 교회입니다. 구원, 죄 사함,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사는 것이 승리의 신학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어디에서도 절름발이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서 걷게 했을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목숨을 바치는 법을 배운다면 지금부터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세요. 이 길을 따르지 않고 며칠 만에 다시 절름발이가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내가 상관 할 바가 아니지만, 중국 안수 신학은 결코 하나님의 표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5. 기적에 대한 예수의 태도
귀신이 우리를 사로잡았을 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하며, 이것은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순종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태도였고, 바울이 물려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탓인지 이런 태도를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 승천 후 몇 년 동안 베드로는 성경을 쓰지도 읽지도 못했습니다. 체계에서 벗어나 불분명하게 말하면 집에 가서 다시 알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 삼천 명이 믿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많이 왔다고 기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가 두 명이나 백 이십 명이라도 있었다면 더 큰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6. 우리가 전파하는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가 따릅니다.
표적과 기사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대한 증거이며, 표적과 기사를 볼 때 우리는 그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바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바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사랑하고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전파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위로의 날이 아니라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즉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살지 않는 것은 비양심적인 일입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을 닮고 예수님을 닮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세요. 그것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제가 조금 무겁게 말하고 있지만 들을 수 있는 사람,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