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답】사도행전03장-표젇과 기적이 다라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행전의 세 번째 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비판해서 죄송합니다. 수준이 너무 낮고 말도 안되는 말을하고 자신이 만든 많은 것을 나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이 상태는 다소 혼란스러운 뇌에 속합니다. 성령이 마음을 채울 때 왜 혼란이 있습니까? 그런 혼란이 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뇌는 여전히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실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경 읽기를 대신할 수 없고, 방언 기도는 깨달음을 대신할 수 없으며, 깨달음은 방언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방언에는 방언의 용도가 있고, 깨달음에는 깨달음의 용도가 있으므로 우리는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사실 비극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중국 안수 신학입니다. 과거에는 순복음이라는 것이 있었나요? 어쨌든, 그것에 붙이기에는 꽤 좋은 이름입니다. 다 준비됐나요?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국 안수 신학은 정말 온전함의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능력을 주지만 깨달음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사무엘상,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 수많은 책을 의도적으로 많이 쓰셨는데, 모두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인간의 삶과 함께 기록된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신약의 많은 가르침을 썼는데, 왜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지 않았을까요? 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깨달음 속에서 그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방언이고, 깨달음은 깨달음이며,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성령 충만이며, 기적을 행하는 것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성경을 읽는 것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 그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해야합니다. 그래서 이것에 관해서는 아마도 제가 이전 과정에서 가르쳤던 것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반복 될 것이며, 101 과정, 201 과정을 수강했다면 제가 무슨 말을하는지 알 것입니다.
[질문] 1: 선생님, 예수님은 왜 베드로가 이런 상태였을 때 그를 제자로 선택하셨나요?
A: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선택하셔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는지 아시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선택은 여전히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분을 닮기 시작하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베드로가 그분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을 꺾으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선택을 받았다고 해도 계속 자신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성경 곳곳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베드로 시대뿐만 아니라 창세 이래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나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먹었고 죽고 자녀를 낳아야했고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나빠졌고 선악을 아는 나무에서 더 많이 먹을수록 선악을 아는 지식의 상태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에 인간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노아의 가족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인간은 한 걸음 한 걸음 타락의 길로 들어갔지만 나중에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지만 그것이 당신의 결정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주 당신의 하나님을 기꺼이 사랑할 의향이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강요된 참외는 달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쓰레기들 가운데서 아기들을 가려내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은 아기가 될 건가요 아니면 쓰레기가 될 건가요? 그렇다면 천천히 거울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살펴보세요.
[질문] 2:목사님, 고린도전서 12장 7~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믿음과 치유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A: 성령은 어떻게 사람에게 믿음을 주나요? 성령께서 믿음을 주지 않으셨는데 저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성령의 책임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의 책임인가요? 믿음은 깨달음에서, 깨달음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베드로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이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의롭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제가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조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께서 방언으로 기도를 주시는 것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과 치유의 은사를 주시는데, 이 모든 것은 은사의 차원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주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할 때, 당신의 믿음은 깨달음 속에서 성장할 것이고, 깨달음 속에서 당신은 점차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그분을 더 신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진리 안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을 깨달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봉사하기 전에 먼저 오는 은사가 아니라 봉사하기 전에 먼저 오는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더 놀라운 말씀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이 모든 것이 로마서 12장에 기록되어 있으니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마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으로 만들어졌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은 실제로 성경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실행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진노를 드러내는 그릇으로 만드셨는지 아니면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만드셨는지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그릇이냐고, 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제 생각은 우리가 선택하는 이유는 말할 수 없고, 믿기로 선택하는 이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믿기로 선택했으니 흥미롭지 않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믿음의 크기를 나누라고 말씀하시며, 왜 그리고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로마의 신자들과 고린도의 사람들에게였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지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그게 설명이라면 그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설명을 드리고 믿음은 인간의 선택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시대에는 그들이 말한 많은 것들이 그다지 작동하지 않았고 무작위성이 많았기 때문에 성령이 나에게 이것을 주지만 성령이 그렇지 않으면 어떨까요? 성령께서 주시면 그때마다 사라진다는 뜻인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더 크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더 크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더 크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믿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 즉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모든 것이 끝납니다!
##【질문】3: 로마서 12장 3절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자에게 이르노니 볼 바 넘치게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옳은 것을 보리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크기가 하나님의 분량입니까? 주어진 믿음으로?
A: 아주 좋은 질문을 하셔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계속 설명하고 또 설명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만드셨으니 그냥 체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하지만 저는 운명에 체념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저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아주 작았지만 여전히 믿기로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당신은 신의 선택을 받았고 신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신이 당신을 불렀다면 어떻게 그런 상태에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시지 않으셨더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셨다는 것을 믿기로 선택했습니다. 왜 그렇게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서요,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선택해 왔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내가 이렇게 되기를 예정하셨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부르심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생과 현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하나님을 위해 죽기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저의 분명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선택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거나 전혀 말이 되지 않고, 결국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일하기 싫어하고 나는 일하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일하는 걸 좋아하고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마작을 할 때 한 타일을 뽑고 다른 타일을 던지는데, 1과 2, 3과 5의 원통은 의미가 없었어요.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는 내가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몰랐지만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사는 것이 흥미 롭다면 잘 살고 행운을 빕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은 오래 전에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 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예정된 것이고, 선택된 것이고, 소명이라고 했으니 그것에 자신을 맡기세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것을 주지 않으셨다고 느낀다면 그것에 체념하십시오.
[질문] 4: 안녕하세요 목사님! 사도행전 3장 21절에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하늘이 그를 지키시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A: 글쎄요, 베드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게 아니라 제가 읽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물어보면 피터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무슨 말을하는지 모르겠고 저도 무슨 말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5]: 선생님, 요한은 회개의 말씀을 전했고, 베드로는 죄 사함의 말씀을 전했고, 바울은 그 말씀을 따라 노력하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전했습니다. 그렇게 이해해도 되나요?
A: 아니요, 정말 단 하나의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복음서를 제대로 읽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씀, 베드로의 말씀, 바울과 예수님은 하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왜 하나, 하나씩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설교 한 것은 주 예수님이 설교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한다면 베드로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질문] 6: 목사님, 베드로 전서와 베드로 후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전체적으로 잘못되었나요?
A: 저는 베드로가 체계에서 벗어난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천사가 사람보다 더 강력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천사를 숭배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그가 불명확하게 썼다고 생각할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것을 명확하게 읽고 제대로 구현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서신은 모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에서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라고 가르친다면 저는 제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읽었고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머리가 혼란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혼란스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데 어떻게 사물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유다서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여러분은 저에게 베드로를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과 같은 내용을 설교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다면 잊어버리세요.
저는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믿음의 크기에 대해 여러분이 나름대로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런 내용을 설명하다 보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로 돌아가게 되고, 그런 내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결국 저는 실행 가능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이 실행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인간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왜 그랬을까요? 신이 그들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으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유다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이 정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질문] 7: 목사님, 주일 설교에서 저주가 깊을수록 마음이 더 강퍅해진다는 말씀이 나왔는데, 왜 그런가요?
A: 지난 몇 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 즉 저주가 깊을수록 마음이 강퍅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처음에 저주를 받았으며 마귀는 그들에게 더 깊은 거짓말을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로 영적인 것이며, 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런 형제 자매들이 있으며,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그런 상태로 살고있는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사람은 멸망 할 때까지 점점 더 강퍅 해집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왜 그가 멸망 할 때까지? 왜 그 사이에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회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갇혀서 온 마음과 생각이 잘못 생각하고 귀신의 거짓말을 생각하고 어떤 식 으로든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고 그 부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은 매우 흔하기 때문에 저주가 깊을수록 마음이 더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시간을내어 스스로 알아 내고 더 많이 봉사하면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저는 길고 긴 질병, 무겁고 큰 재난, 마음이 굳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저만의 의미와 논리를 가지고 왜 그렇게되는지 설명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강퍅해집니다.
예를 들어, 여전히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절름발이로 태어난 사람을 내가 얼마나 잘 고쳤는지 봐요, 내가 어떻게 잘못했을 수 있겠어요? 5천 명이 저를 믿고 따랐다고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제 연초에 기도했더니 절름발이로 태어난 사람이 고침을 받았고, 3,000명이 회심했고, 5,000명을 더해서 8,000명이 회심했습니다. 그 8천 명이 자기 땅과 재산을 다 헌금하고 팔아서 얼마를 주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잘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이것에 대해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주를받은 사람들이 많고 그 결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많은 일들이 그를 혼란스럽게하고 실제로 그의 삶을 지휘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질문] 8: 목사님,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데, 베드로의 가르침이나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삶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건가요?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A: 성경에는 부정적인 교훈과 부정적인 교훈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누가복음도 썼는데, 누가복음의 주제는 많은 사람이 넘어지고 많은 사람이 일어나고, 넘어져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질문] 9: 목사님,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지 않으셨고, 베드로 자신도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몰랐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셨지만 그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3년 반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고, 그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그것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그것이 강퍅한 마음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 하셨지만 그는 그것을들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의가 너무 강력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 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많이 계시하셨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이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을 보고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베드로가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일으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지만 결국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를 주지만 계시는 우리의 의로움에 맞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자기 의가 있을까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그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볼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저는 바빠요. 왜 바쁜가요? 하나님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시간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죽었든 살았든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그것을 계시하지 않으셨는데 저는 그것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비극이 아닐까요? 구하라, 구하는 이에게 주실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천 번을 두드리지 않고 찾지 않는다면 천 번을 계시 받았다고해도 어떻게해야합니까? 당신은 멸망 할 것입니다.
오늘의 질의응답은 여기까지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