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잘 못된 믿음이 풀기06-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오해를 없애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사람들은 종종 웹사이트, 동영상 등 온갖 정보를 접하게 됩니다. 며칠 전 한 형제가 Moments를 게시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메시지를 게시할 때 자신을 이해합니까? 그는 말했다: 이해하는 것 같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말했다: 그럼 그것을 전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형제는 말했다: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측면이 좋은지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기다림에 대한 메시지가 적지 않지만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가져옵니다.

집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자매가 있었는데, 형제가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시 이 자매를 만나러 가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방에서 노래하는 이 자매님을 보고 문을 두드리고 안부를 묻자 “요즘 날씨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로 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밀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그럼 지난 며칠이 지났는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결과 그녀는 말을 잘 할 수 없었고 매우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데,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때가 있습니까?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는 자매님에게 가슴에 손을 얹어 달라고 부탁했고, 가족 뒤에 있는 악령을 꾸짖으며 기도하도록 인도했고, 5분 만에 그녀는 나았습니다.

진실은 서로 대체할 수 없다
저는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문제는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혼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을 가까이 하면 귀신이 도망간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귀신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사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찾아보면 많은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실제 칼과 총으로 그 지역 사람들을 몰아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여하튼 신뢰가 가지 않는 것 같아요.

즉, 주의 깊게 조사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으며 많은 혼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6:17-18)

어떤 사람들은 신과 가까워지면 귀신이 도망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개념이 혼란스럽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마음이 아주 좋아지고, 그의 모든 상태가 바뀌고 뒤집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전부라고 느끼기 때문에 계속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연습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사물의 효율성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만 하면 언젠가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성경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신화를 없애는 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적극적인 전쟁은 대체할 수 없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는 능동적으로 여러 번 나오는데, 예를 들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보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소극적으로 저항하면 귀신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연습을 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지만 마귀가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신학적 진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이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진짜 칼과 총을 들고 가나안으로 달려갔습니다. 총, 총이 실제 칼과 총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검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검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검이 없는 것과 같지 않다. 우리에게 칼과 총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할 때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고, 칼과 총을 쥐어야 할 때는 칼과 총을 들어야 합니다. 신이 말했다: 여리고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여라.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여리고 사람들이 죽습니까? 그와 같은 일은 없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믿음의 개념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영적 전쟁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귀신을 쫓아내는 교회이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영적인 권세와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권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으며 믿음에는 큰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성령 충만과 직결됨을 알게 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16:17-18)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능동적 개념이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내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소극적 개념이 강하다. 우리는 마귀의 왕국을 위한 진지한 신학 체계가 있을 수 없으며 마귀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리는 오해

두 번째 혼란스러운 곳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울이 자기를 죽이기만을 기다렸다면 이것을 하나님을 기다림이라 합니까? 다윗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도망쳤는데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합니까?

저는 성경에서 다윗이 도망친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미친 척하고 어리석은 척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합니까? 다윗이 많은 일을 했는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다음 질문이 옵니다. 우리는 명확한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가지 농담을 하자면 홍수가 나서 한 가족의 문지방이 물에 잠겼습니다. 이때 작은 뗏목이 오더니 그 위에 탄 사람이 "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니요, 나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배가 떠났습니다. 이윽고 물이 2층까지 차올랐는데 이때 배가 왔고 배에 있던 사람들이 “어서 빨리 와라. 그 남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곧 물이 지붕에 넘쳤고 그는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헬리콥터가 날아갔고, 탑승한 사람은 다시 같은 말을 했지만 이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익사합니다. 익사 후 그는 말했다 : 하나님,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작은 뗏목을 보내어 너희를 태우지 못하였고 또 내가 배를 보내도 너희가 타지 아니하였고 헬리콥터를 보내도 너희가 타지 아니하였느니라 .

농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능동적인 시도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적극적으로 기다렸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하갈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으려 했으나 사라가 잉태하지 못하여 10년 이상을 기다린 끝에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많은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았고, 후에 하나님은 그도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고, 장차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기다림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성경"에서 예수님도 바울도 아브라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이스마엘의 후손과 야곱의 후손이 서로 원수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틀렸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그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몰랐기 때문에 시도했습니다. 이 하갈의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그가 항상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의 아들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이삭이 네 자손이로다. 그럼 이스마엘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기적을 통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라가 수태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실제로 그녀로 하여금 수태하게 하시고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기다림의 일부였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반면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며 사울의 추격을 피해 뛰어다녔습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신화를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적극적인 성품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란 능동적으로 믿는 것이지 수동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믿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수동적일 수 없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수동적일 수 없습니다.

종합해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진리입니까? 그것은 진실이지만 진실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믿음의 길에서 계속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능동적인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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