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빌립보서02장-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주님을 믿는 것이 구원과 같은 것입니까?
빌립보서 2장은 구원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당신은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결국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인도하여 주를 믿게 하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떤 사람들은 만나는 작은 일마다 불평하고 담대하지 못하여 광야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두 번째 연에서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이것이 바울의 눈에 보이는 구원입니다 바울의 신학적 관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당신이 구원받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목사로서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구원에 대해 이러한 맹목적인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맹목적인 낙관주의이며 매우 위험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바울의 신학입니다. 당신은 히브리서와 빌립보서를 읽은 다음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 그것이 당신에게 분명해질 것입니다. 포괄적으로 살펴보고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였으니 다 이루었느냐? 아니요! 완료되면 계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에 관한 동일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기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그가 앞으로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하면 그가 구원을 받았다면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바라볼 때 잠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평생 주님 안에서 주님을 붙잡고 살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이 복음을 천박하게 만듭니다.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10:9-10) 성경의 말씀입니까? 예! 그러나 그것이 바울의 신학의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강조하지만 편지라는 단어의 지식은 위대합니다! 정말 믿는다면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때 믿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믿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기록한 두렵고 떨림이 요구하는 구원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면, 구원 사역을 하는 것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끝까지 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은 이상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절벽 아래로 반쯤 떨어지면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으니 그 길은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요 두렵고 떨리는 길입니다.
한번은 화산을 오르러 갔다가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산 정상이 줄처럼 좁았습니다! 산등성이에 서서 여기에 심연이 있고 거기에 심연이 있습니다. 그날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자 우산이 단번에 날아갔어요 다행히 우산을 잡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떨어질 거에요! 내 말은 재미를 느끼며 화산 정상에 오를 때도 겁이 나고 겁이 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부주의 할 수 없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을 걸을 때면 더욱 그러합니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노력으로 들어간 것이니 수고하는 자가 얻으리라(마 11:12). 노력은 바울의 두렵고 떨림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내가 겸손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매우 겸손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의미: 겸손, 복종
왜 바울은 여기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일을 하라 하였느냐? 그 이유는 이 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구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마음에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품고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됩니다. (빌립보서 2:1-2)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동일해야 하며 일치를 가져오는 것은 동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권면과 위로와 교제라면 마귀에게서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자비로운 권면도 있지만 그 자비로운 권면은 시비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당길 뿐 아니라 많은 마귀도 끌어당긴다! 마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를 어지럽히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다면 마귀는 그것을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이미 그곳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바울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두려워하고 떨라고 말한 이유를 차근차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인상, 생각, 통찰은 성령에게서 오기도 하고 어떤 것은 마귀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어떤 위로나 영적 영감, 연민, 권면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감동과 권면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나 감동이나 권면이 있다가 입 밖에 내어 시비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처음 두 구절을 마친 후에 바울은 다음으로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 분파를 구하지 말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각자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익도 돌보도록 하십시오. (빌립보서 2:3-4)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낫다고 본다면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까? 할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인데, 내가 너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너도 나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의논하고, 서로 겸비하고, 서로 섬기면 주님께 감사합니다. 성령님이 정말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순종”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이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는 순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하여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뿐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은 지금도 더욱 그러하도다 순종에 관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같이 순종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두려움에 떨지어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분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교회가 사역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와 순종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웨이보에 복음을 올리고 매일 전달하는데 분쟁이 많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목회 오리엔테이션입니다. 그것은 순종 지향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소그룹이나 특정 사역에서 모두가 말을 하면 신이 나고, 신이 나면 다투기 시작하고, 다투면 마귀가 들어온다. , 그게 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왜 이해하지 못합니까? 이 문제는 원래 좋은 것이었지만 논란 때문에 마귀가 사용하는 나쁜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매우 조심해야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에게는 자질이 있어야 하며, 이 자질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없고 구원의 표적도 없습니다. 이 사람 안에는 여전히 악마의 이미지가 많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겸손과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교만하거나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다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형상을 갖기를 원하지 않고 예수님의 형상을 살려고 노력하는데, 예수님의 형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즉, 5-11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 사람처럼 생겼으니 겸손해야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은가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당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다면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위험합니다!
더 아래를 봅시다: 당신은 사람으로 나타나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 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좋습니다!
최고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겸손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자로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는 가장 높은 길이 있고 가장 낮은 길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길은 겸손과 복종이고 가장 낮은 길은 교만과 오만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모든 사람이 뼛속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과 패역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보고 하나씩 버려야 합니다. 순종함이 없기 때문에 마귀가 반드시 들어올 것이고 그가 들어올 때 분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에 순종이 있고, 순종에 일치가 있고, 일치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성령의 역사에 모든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목적은 순종과 구원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다툼이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는 이 세대에 빛과 같이 빛나고 생명의 말씀을 알리라. (빌립보서 2:13-16)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썼는데 빌립보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오늘날 빌립보 성도들을 비교해 봅시다.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뒤처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멀리 있는 사람이 있어도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요구를 완화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하루 종일 앉아서 구원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루가 이렇게 가고 하루가 지나면서 아직도 구원을 받을까 말까 고민합니다. 그 결과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마귀의 간계가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내 안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 생명의 길을 비추고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두려워 떨 필요가 있다면 우리 모두 지금 이 무리 사람들 가운데서 두려워 떨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구원받았다면 어떻게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작동합니까? 무엇을 하든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바울이 성경에 계시한 복음이 중요하니 바울이 가르친 대로 행해야 한다.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음으로 바울은 자신을 언급합니다. 이런 순종과 이런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그 위에 제 전제를 붓는다 해도 그것으로 죽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 사실 나에게도 그런 소망이 있다. 만일 내가 이 무리의 형제자매들을 인도하여 빌립보 교회를 세우면 죽어도 아깝지 않다.
17절은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사람인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며칠 안 있으면 처형당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나는 달려야 할 길을 달리고, 지켜야 할 길을 지키며, 싸워야 할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할 뿐입니다. (디모데 둘째 4:7)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 나는 단지 내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논의일 뿐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바울이 세운 이 목표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계속 달려야 합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중에 두 인물을 더 지명했는데, 하나는 디모데이고 다른 하나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조금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거의 죽게 되어 죽어도 상관하지 아니하였느니라(빌 2:30). 보여? 그는 자신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중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결코 말을 그치지 않고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비할 데 없이 더 나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직장에서 일이 잘못되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인생에서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두려워하지 않을 때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놀랍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고 밖에서 바울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어느 날 그는 병에 걸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보라, 그는 바울과 함께 있었고 바울은 그를 고치지 않았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는 거의 죽을 뻔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은 죽고사는데 관심이 없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죽지 아니하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죽어야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왜?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당신을 위협하지 못하므로 죽음의 영을 몰아내고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영이 정말 우리를 이 몸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속 노력하고, 계속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기준이 매우 높은 것은 하나님의 기준도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표준이 너무 높은데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가 한 것이 아니라 디모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못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더군다나 당신이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도 말자. 내가 못 하면 아무도 못한다. 그것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점은 무엇인가? 바울과 디모데는 모두 살과 피였으며 에바브로디도도 그러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와 같은 혈육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관념을 바꾸고 항상 스스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이 방향으로 달려가고, 우리가 달려갈 때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흠 없는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개념을 길러야 합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누군가 환자에게 손을 얹고기도하면 누르지 않아도 괜찮지 만기도 후 환자가 죽으면 나중에 잊어 버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손을 얹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을 표준으로 삼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자신감은 진짜 자신감이 아니어서 좌절을 만나면 바로 무너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번에는 잘하지 못했지만 계속기도하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점점 더 강해지고 다음에 갔을 때 환자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가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오늘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관념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힘든 생활 방식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기 시작할 때 구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개념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