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갈라디아서02장-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2016년 "갈라디아서" 2장의 지난 녹음을 틀려고 했는데 그 당시에 제가 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그때 보내드리니까 오늘 다시 할게요 2장 공유할게요 2014년에 처음 공유드린건데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좀 적절치 못한것 같습니다. 내가 그 몇 년 동안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아니면 지금 잘못된 것인가? 나는 이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장입니다.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초기에 쓴 편지의 문체와 후에 쓴 편지 문체는 다릅니다.

이 장의 주제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앞뒷면을 합치고 주제는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느니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의지하는 것이 번거롭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큰 성품이 있습니다.

1장에서 바울은 내가 여전히 사람의 마음에 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사람을 보면 남의 이야기를 하고 귀신을 보면 헛소리를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잘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을 때는 그가 전한 순수한 복음을 그 누구도 더럽힐 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갈라디아서」를 쓰기 전에는 사도 바울이 영접한 때부터 시작된 2장을 쓴 지 14년이 지나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9장과 10장을 보면 시간적으로 바울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4~5년 후에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승천 후 17-18년, 즉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사도행전 15장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오직 하나인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 장에서는 "복음의 진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에 대해 바울이 했습니다. 이전에 제가 2014년에 말씀드린 장의 주제는 행함에 믿음을 더할 수 없으며 행함이 조금이라도 더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건전한 복음을 위해 지불한 대가

갈라디아서는 2장, 15장, 3장이 더 통합될 것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잘 나누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순결한 복음의 사도 바울이 많은 일을 하여 14년 후 곧 사도행전 15장 예수살렘에서 대집회를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 우리는 하나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바울을 도우셨다거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머니 뱃속에서 뽑아내어 그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의 손에 구별되었습니다.

14년 후, 나와 바나바는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내가 계시를 따라 올라가서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한 복음을 내 형제들에게 전하되 오직 유명한 자들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다 (갈라디아서 2:1-2)

이 진술에서 바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 등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고, 한 사람은 예수의 동생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든 직접 예수를 따랐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평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할 수 없거나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지금 또는 과거에 헛된 달음질이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매우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바울은 왜 그가 헛되이 달릴까봐 걱정했는데 모직물?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교회의 기둥이요 하나가 하나요 둘이 둘이면 바울이 순결한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상대방이 내려가라고 하면 내려가야 했습니다 .올바른 상황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베드로와 야고보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은 교회의 기둥이고 매우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당신은 누구입니까? 별거 아닌데 이 불균형하고 불균형한 상황에서 야고보가 바울을 내려보내라고 하면 바울이 내려가야 하고 바울이 올라오도록 허락하면 바울이 올라와야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에 이 일을 거론하고 전에 예루살렘에 갈 때에 이 일을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의 달음질이 지금이나 과거에나 헛될까 두려워함이러라.

나중에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이런 것들을 언급했는데 왜 감히 그것을 썼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교회에서 매우 강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교회는 스스로 설립되었지만 그의 이전 지위는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희가 전하는 복음이 순수한 복음이 아니라 너희가 아무리 순수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 시대에 바울과 함께 하셨고 바울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셨습니다.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했습니까? 그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혼동하지 않도록 제가 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있습니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에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가 보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하였으나 바울은 그들을 밤빌리아에 두고 함께 일하러 가지도 아니하고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래서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고 헤어지기까지 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떠나 형제들이 그를 주의 은혜에 넘겼더라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굳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15:36-41)

그 때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의결하니 그 택한 자는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라 이 두 사람은 형제들 사이의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너희는 할례를 받고 모세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옛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이 된 몇 사람을 택하여 우리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너희에게 가느니라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었은즉 저희가 이 일을 자기 입으로 말하리라 성령과 우리가 다른 짐을 지우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몇 가지만 할 것이니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간음을 멀리할 것이니라 너희가 스스로 삼갈 수 있을진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행 15: 22-29)
이 편지를 이렇게 썼으니 이 일이 사도 바울의 뜻을 이루었느냐? 도달, 즉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입니다. 당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이런 편지를 썼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이 바울들이 복음의 진리로 인해 우리 가운데 존재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사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와 함께 갔던 디도는 헬라인이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거짓 형제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 그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너희 가운데 머물게 하려 함이라 (갈 2:3-5)
그 때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의하고 택함을 입은 자는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형제 중에 인도자인 실라더라 사도들과 장로들아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하니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서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너희 마음을 혼란케 하려 한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노라 (여기에는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고대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뜻을 같이하여 몇 사람을 택하여 우리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이 두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습니다.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자기 입으로 이 일을 말할 것이요 성령과 우리가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몇 가지 사항,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러한 일을 자제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당신이 안전하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15:22-29)

좋은 남자 캐릭터는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의 인도 하에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상한 일들이 많았는데,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더라도 그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나는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 그들은 모세를 믿고 교회에 섞여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의 자유를 바라보며 어떤 자유를 보았습니까? 디도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디도는 이방인이요 반은 유대인이지만 반은 유대인이라 그들에게는 사마리아인이라 일컬어지는 자들이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때 야고보와 베드로와 같은 유명한 사도들이 바나바의 연고나 다른 연고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을 영접한 것인데,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순종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이 거짓 형제들입니다. 이때 바울은 그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잠시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성품을 바꾸었다고 한다면 어떤 성품입니까? 그는 좋은 노인인데 그가 무엇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착한 성품으로 대치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곤란하고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택하실 것이나 다행히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택하사 우리는 오늘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의 진리가 있습니다.

후기 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항상 성경의 정경으로 여겨왔습니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런 거짓 형제들이 여전히 있지만 사도 바울의 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난 후 사실 교회가 점점 더 부패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 갑자기 들은게 있는데 뭔데? 즉, 우리 중 한 자매가 차에 치였습니다. 왜 그녀는 차에 치였습니까? 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가족을 위해 울고 기도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타락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결국 이 자매가 그녀에게 말한 대로 그녀는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그런 가르침은 정말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녀에게 이것을 말한 사람은 그녀의 목사님이 아닙니다. 이 언니는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특별히 골라서 하는 성격인데 사실 이런 성격은 치명적이다. 그녀는 외출할 때 차를 타고 갔다. 나중에 그녀는 그의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 우리 중에 이런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특히 좋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 좋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설탕 코팅 포탄이라고 합니다.

선한 사람은 순수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고 갈라디아서 2장을 썼습니다. 교회에 거짓 형제가 많으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교회에 거짓 형제들이 많아지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왜 그렇게 많은 거짓 형제들이 있습니까? 이런 것을 리더십 실패라고 말씀드리자면, 가짜 형제들이 교회에 섞여 들어왔는데 왜 그냥 놔둡니까?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왜 그것을 무시했는가? 내가 사람들을 이렇게 통제하면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친절! 그들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들로 말미암아 많은 죄를 사랑으로 덮으시려 하십니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여전히 존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줄곧 알았습니다. 리더라면 교회에서든 회사에서든 좋은 사람이면 안 되는데 좋은 사람이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우리 중에 아직 선한 사람이 있다면 목자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나바는 좋은 사람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선한 사람은 사람에게 거슬리는 일을 하기 싫어하지만 사람에게 거슬리는 일을 하기 싫으면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으니 너희는 좋은 말만 하느니라 그 자매님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면서 몇 가지 생각과 아이디어를 줘서 상대방에게 큰 위로가 되지만 그것이 복음의 진리는 아니잖아요. 큰 문제? 그래서 종종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좋은 사람들에 의해 발생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이미 이방인 가운데서 그의 지위가 확립되어 베드로나 야고보에게 쓴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와 교회 주변에 있는 이 거짓 복음에 이끌려 온 자들에게 쓴 것은 복음의 진리가 그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글을 쓸 때 매우 골칫거리였습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즉,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 게바, 요한입니다. 교회의 기둥이 선한 사람들의 무리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기업은 좋은 사람을 관리직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그들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을 보십시오:

유명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든 나는 그들과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내게 아무것도 보태지 아니하였고 오직 주께서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내게 맡기신 것을 보았나이다. 베드로가 할례당의 사도가 된 것이 나도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이라 불리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고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주며 우리에게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저쪽에 할례자에게로 가라고 하거늘 가난한 자를 기억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열심을 내어 이 일을 행하려 하였나이다 (갈라디아서 2:6-10)
바울은 오직 복음의 진리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읽고 난 후 어떤 느낌이 드나요? 행간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도 바울이 그들 가운데 세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서슴지 않고 이 교회들의 기둥들을 거스르는도다. 마음을 상하게 해도 괜찮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일으키셨습니다. 바울은 우리 가운데 복음의 진리가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자기가 전하는 것이 복음의 진리인 줄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바울을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마지막에 육체의 악은 성령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우리 가운데 살게 한 것은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압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면 어떻게 연약함을 살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신을 의지하여 율법을 지키면 잊어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형제자매들이 이 순수한 복음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애쓰고 그들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가지고 이방인에게로 가서 이방인 가운데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거짓 복음을 대적하고 그 선한 사람들의 거짓 복음을 대적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결론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강한 성품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믿음으로 다시 강해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3장에서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데 율법을 행함으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냐?

너희가 율법을 지켰으므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 자가 아니냐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갈라디아서" 3:5)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보다 높은 표준을 좇아 삽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합니까? 나는 신을 믿기 때문에! 그 결과,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해도 괜찮을까요?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피상적인 노력은 아닙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허용됩니까? 전적으로! 절대 피상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 크신 능력과 능력을 의지하여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복음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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