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고린도전서06장-몸도 하나님이 구속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는 성도 간의 분쟁이고 두 번째는 육신의 문제입니다.
믿은자들 사이의 다툼
그러면 먼저 성도들 사이의 다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먼저 이 다툼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분쟁의 원인을 이해했다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한 것입니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한다면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절에서 11절 말씀에서 바울은 이 사람들이 다툼이 있는데 그 다툼을 해결하는 방법은 바깥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재판을 위해 법원에 가는 것이 합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사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목사님들도 계시고, 형을 선고받으러 법정에 가십니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욕심이고 거기에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에 분쟁이 생긴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것은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문제의 근본은 왜 사람들이 속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왜 고통받기 싫으세요? 반대로 당신은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모욕하며, 당신이 억압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형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매우 심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를 흔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공평함인데, 당신 안에는 옳고 그름의 관념이 있다. 당신 안에는 옳고 그른 관념이 있고, 당신 안에 있는 이 옳고 그른 관념에 따라 이른바 인간의 의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너무 불공평해서 그를 고소하고 싶기 때문에 이것이 뿌리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 해결 방법으로 축복을 받을 것입니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복된 길이 될 것인가 하는 선택이 사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소가 사람을 때려죽이는 사람, 혹은 사람의 무엇인가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구약성경에는 심판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얼마를 지불해야 하고, 저 상황에서는 얼마를 지불해야 합니까? 문제는 그러한 상태의 발생 자체가 복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 수 없고, 저주 가운데 살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조차 저주받은 부자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실망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열국 사이에 내동댕이칠 정도로 실망했습니다. 왜 그들을 주위에 던지기 때문에? 형제를 대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4장 8-17절을 읽어봅시다. 유다의 형제 중 한 명. 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모두가 순종했고 그들은 풀려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개하고 자유인 하인과 하녀를 다시 불러 하인과 하녀로 남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워 이르기를 만일 당신의 히브리 형제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 육 년 동안 당신을 섬기고 제 칠년에는 각각 그를 자유로이 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조상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내 말을 듣지도 않았다. 이제 너희가 돌이켜 내 눈에 옳은 일을 행하고 너희 이웃에게 각각 자유를 선포하며 내 이름으로 일컫는 성전에서 내 앞에서 언약을 세우라 그러나 너희는 뉘우치고 내 이름을 모독하여 자유를 얻은 남종과 여종을 각기 마음대로 불러들여 남종과 여종으로 남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각각 그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전파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자유를 선언하노니 곧 내가 너희를 칼과 기근과 역병에서 자유롭게 하고 너희를 세계 열국 중에 이리저리 던지리라. 이것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비로운 마음
즉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협박하고 갈취하고 쥐어짜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 당신이 참 신자인지 가짜 신자인지의 문제다. 정말 이것이 길이라고 믿습니까? 만일 당신이 정말로 이것이 길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당신을 파멸로 이끄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시고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기 때문에 당신도 똑같이 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언급된 율법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행동 규범입니다. 이보다 못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높은 사람이 반드시 성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낮은 사람은 참 안타깝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신조와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을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느냐의 여부입니다.
그 사람이 안식년이 되어도 당신이 그를 자유롭게 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부요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단점인데 어떻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든 기독교인이든 당신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고 사람들을 은혜와 긍휼로 대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5장 1절부터 11절에도 그런 구절이 있는데, 매년 7년 말에 면책을 시행해야 합니다. 용서의 규례는 이것이니 모든 채무자가 그 이웃에게 꾸어준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면제의 해가 선포되었으므로 이웃과 형제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인에게 빌려주면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신의 형제에게 빌려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면제를 놓을 것입니다.
빈곤의 저주는 어디에서 오는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큰 복을 주시리라 소유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라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그들에게는 꾸어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많은 나라를 다스릴 것이지만 그들은 당신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어느 성읍에든지 네 형제 중에 가난한 자가 있거든 네 마음을 버리지 말고 네 궁핍한 형제를 돕지 말라 항상 그에게 손을 펴고 부족한 것을 꾸어 주며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십시오. 너는 삼가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면제 칠년이 이르리라 하여 네가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하게 바라보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게 하여 그 죄가 계속되리라 너. 항상 그에게 베풀고 줄 때에 근심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길과 네 손으로 하는 일에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 그 땅의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이 땅에 있는 네 가련하고 궁핍한 형제를 항상 보내라 ("신명기" 15:4~11)
나는 이 문단을 읽었는데, 당신은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아십니까? 이 사람의 가난의 저주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헌신의 문제 외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불쌍한 형제에게 손을 놓으면. 너무 불합리한 규정인거 아시죠? 당신에게 돈을 빌리면 내년이 안식년이 되고, 오늘 당신에게 돈을 빌리면 내년에 잊어버리고 갚지 않아도 된다니, 이게 무슨 규정인가? 보통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내년이 이 사람의 안식년이고 내가 올해 당신에게 돈을 빌렸다면 당신이 내년에 갚지 않으면 내년에 없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빚을 탕감하리니 내 마음에 악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라 악한 생각이 일어난 후에는 그에게 빌려주지 아니하고 가난하게 두리라 그 사람이 부르짖어 구걸하면 여호와 앞에 너를 송사하고 너를 송고한 후에 그 죄를 네게 돌리리니 이것이 가난의 저주의 근원이니라!
가난의 저주 외에 다른 저주가 있다는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의 조상이 매우 부유한 지주였고, 저주가 오래되고 깊었다면, 그는 그런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자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집주인에게는 그러한 면제 연도가 없으며 이스라엘에는 면제 연도가 있습니다. 중국의 부자, 큰 자본가들은 면제 연도 없이는 당신에게 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다음 이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에 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면 이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님 앞에 도달할 것이고, 그러면 이러한 죄가 부자에게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이 부자들이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저주를 가져왔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을 읽고 난 후에 나는 사람의 재물이 그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축복을 베푸셨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내리시면 당신은 결코 가난한 날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가난해지고 싶지 않다면 내 말을 믿고 자신의 삶에서 단순한 삶을 살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 자매를 돕는 데 관대함을 나타내십시오. 그것은 축복이지 절대 가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께 속한 십일조를 꺼내서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제하여 버리리니 이로 말미암아 너희가 가난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내 말을 믿으세요. 이것 때문에 당신은 가난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고린도전서 6장으로 돌아가자 형제들이 서로 학대하며 자기 형제를 해하며 사람의 법 위에 설 수 있어도 하나님의 법 위에는 설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의 긍휼과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미 매우 부자라면 이미 매우 부자라고 가정해 봅시다. 정말 그 형제에게 정의를 구해야 합니까? 필요 없음!
자비로운 마음
그래서 앞으로 형제자매들 사이에 억울한 일이 생긴다면 빌려준 거니까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형제를 핍박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오늘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돈이 많고 적으면 평생 가난하지 않을 거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았으니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남을 억압하여 부자가 되지 말고 남을 억압하여 부자가 되십시오. 미래에 당신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짊어질 것입니다. 즉,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은 구약성경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뭐, 같은 맥락이니까 죄와 직결되니까 형제를 억누르고 학대하는 것도 죄야!
이것은 저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차라리 주님의 진노에 굴복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래서 앞으로 회사나 기업의 이사가 될 기회가 있다면 이 회사의 이사가 되거나 이 일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 은혜와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짜증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도록 사람을 몰아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형제를 학대하고 형제를 학대하려 하느냐? 탐욕스러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탐욕의 개념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시선은 더 멀어져야 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세상의 이런 것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긴 안목으로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인생에서 가장 바라고 붙잡아야 할 것으로 여기면 실제로는 이것들을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하기 위해.
몸의 구원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12-20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이 영과 혼과 몸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언급했습니다. 13절 하반절과 14절 앞절에 몸이 간음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또한 몸을 위하심이라 몸이 구속의 일부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몸은 성령의 전인데,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아닙니다. 구속의 은혜는 몸의 구속을 포함합니다. 몸의 구속이 이 구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구속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살아있는 동안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 삶의 죄를 엄격하게 처리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면 여러분의 몸도 건강한 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조상의 저주를 계속해서 다룬다면 인체도 또 다른 차원에서 크게 해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신학적 개념은 무엇입니까? 즉 육체와 정신이 하나인 것을 일원론(monism)이라고 한다. 일원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를 들면 이 몸이 곧 나의 몸이요, 이 영이 나의 영이요, 이 혼이 나의 혼이니 영과 혼과 몸이 하나가 되어 이것이 나다! 이해했나요? 그렇다면 육신의 죄, 영의 죄, 영혼의 죄는 모두 내가 지은 죄입니다. 그것은 저주가 되거나 속박이 될 것입니다.
영, 혼, 몸이 하나로
이 사람의 몸에서, 그의 삶에서 구속은 혼체의 완전한 구속인데, 누군가 그를 이원론으로 나누면 몸은 곧 몸이고 혼은 혼이다. 육신은 잃어도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것을 둘의 분리라고 합니다. 그 이원론은 매우 위험합니다. 즉, 이러한 잘못된 신학적 개념 중 많은 부분이 이 이원론에서 분리됩니다.
그들은 성경도 발견했는데, 예를 들면 육은 무익하고 영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니 이 일을 잘못 적용하여 예수의 말씀은 다른 뜻이 있느니라. 육신으로 여겨도 소용없으니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영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면 영과 혼과 몸이 분리될 수 없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것은 우리의 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무엇을 통제하든 그것은 또한 우리의 몸에도 반영될 것입니다. 즉, 영, 혼, 육은 각 수준마다 다른 제약을 받게 됩니다. 즉, 영이 자유로워야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야 하며, 몸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몸은 몸이고 영은 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원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원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육신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영은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몸이 곧 몸이고, 영이 곧 영이며, 혼이 곧 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읽은 경전은 노예와 종의 규칙에 관한 것입니다.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 영과 혼과 육의 자유이니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면제년과 안식년이 올 때마다 모든 종들이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라. 즉 그의 몸도 자유로우며 그의 영도 자유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러한 개념을 갖기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