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사도행전07장-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복을 쫓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이 장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설명할 것입니다.

문제에 대해 생각

하늘의 축복이 손에 닿지 않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습니까?

세상의 축복에 자주 속으십니까?

영생의 희망을 추구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온갖 악한 일을 꾸며 너희를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이전의 예언자들도 이와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 5:11-12)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의 상이 큼이라 너희는 하늘의 상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천상의 상이 별거 아니라고 여기며 헤매는데 천상의 상이 진짜라면 너와 내가 목숨을 걸고 대가를 치러야 이 천상의 상을 받을 만하다.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축복이 진짜임을 어떻게 증명하십니까? 예를 들어 급여 인상, 새 직업 찾기, 이것들은 모두 아주 좋고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늘의 축복이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한 무리의 사람들은 믿었고 다른 많은 무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능하신 팔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광야에 이르자 많은 백성이 즉시 믿지 아니하였고 믿지 아니한 자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더욱 가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생물 중에 수백만 명이 있는데 바알을 숭배하지 않은 사람이 7,00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열왕기상 19:18)

이것이 바로 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데, 당신은 하늘의 축복을 귀히 여겨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축복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까? 이 바알 숭배자들은 매우 영적입니다! 장사를 번창시키기 위해 바알을 섬기러 갔는데 그 후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축복이 아니라 바알 숭배자들이 다 죽고 지옥에 떨어져서 지옥이 실재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자가 말했다: 나의 조상님! 그런즉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는 형제 다섯이 더 있으니 저희가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 증인을 삼게 하소서 ’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 그가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요 ’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누가복음 16:27-31)

그 당시 예수님의 기적이 헤드라인이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굳게 잡으라

죽어도 천국에서 복을 받아야 하는 그런 무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증명하십니다.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저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순교하게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때가 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순교자의 수가 가득 찰 것입니다. 신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복음의 문이 닫히기 전에 순교자의 수가 채워져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천국의 큰 축복을 얻기 위해 핍박을 받았고,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여 천국의 축복이 진짜임을 증명했습니다.

스데반을 포함하여 확인된 축복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그것이 거짓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정말로 믿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그의 목을 베려고 한다면 분명히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로서 세상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땅 위의 작은 것에 집착하고 하늘의 것은 잊어버립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도전합니다. 하늘의 축복이 진짜라면 그것을 붙잡겠습니까? 어린 나이에 스데반이 죽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손뼉을 치며 하늘의 축복에 대해 그를 찬양합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하늘로부터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Stephen과 같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핵심은 당신이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믿는 만큼 대가를 치루고, 목숨을 바친 사람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물론 모든 사람이 이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목이 베였으니 너희가 알겠느냐?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절대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아브라함은 고귀한 왕자이지만 발바닥으로 밟을 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셨고,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그 땅을 주기를 원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그는 공동묘지 외에는 아무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축복을 확언하는 스데반과 순교자들을 봅니다. 이 하늘의 축복이 없으면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매우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장난감을 만들어 주셨고, 아버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가신 지 5년이 흘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20년 전 일이 눈앞에 다가왔고, 곧 하루하루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천국에 소망이 없다면 사람에게는 참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천국 소망이 없으면 삶 자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도 소소한 일상을 살고 있다면 회개하라! 스데반은 천국 소망을 굳게 붙들기 시작했고, 천국 소망을 위해 큰 상을 받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삶을 포기하는 방법입니다. 천국의 희망은 진짜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믿든 안 믿든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믿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세상 사람의 서로 다른 선택

신령한 사람은 세상 사람에게 핍박을 받는 것이 무서운데 예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Stephen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까? 신령한 사람은 세상 사람에게 핍박을 받고 그 후에 나 스데반은 너희에게 핍박을 받고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 전에 눈이 밝아져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셨느니라 놀라운 은혜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핍박한 창세기: 세상 가인이 영적인 아벨을 핍박했는데 아벨을 위해 싸우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핍박의 법을 정하였으니 나와 너희가 박해를 받는 것이 정상이요 너희가 박해를 받지 아니하면 정상이 아니니라.

후에 에서가 야곱을 핍박하고 에서보다 먼저 아브라함을 핍박하여 실상 아브라함은 그 세대에 왕으로 존귀함을 받았으나 그에게 쉽지 아니하여 설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후에 족장 야곱의 열 한 아들이 이 영적 요셉을 핍박한 것은 요셉이 영적 상징이기 때문이요, 후에 세상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핍박한 것이요 두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고 모세가 그들을 조금 설득하려 하였을 뿐이라 박해를 받고, 거의 죽임을 당하고, 떼를 지어 달아나야 했습니다.

더 뒤를 돌아보면 모세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광야로 데리고 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모세는 고라 족속부터 모세를 핍박했던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적을 행했지만 때때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모세는 열심히 일했고 영적인 사람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다윗은 누군가에게 박해를 받았고 사울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나는 이것들을 간단히 열거하고 당신이 한 가지를 알기를 바랍니다.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에게서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박해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사람의 육체로 응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특성이며, 예수님과 스데반에게 전해 내려온 특성입니다. 스데반은 주님을 위해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으로, 죽기 전에 예수께서 죽기 전에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아버지,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4).

우리는 정말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지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어떻게 박해에 직면합니까? 신령한 사람은 핍박이 닥쳐도 죽여도 천국 소망이 있기 때문에 세상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생사의 문제가 큰 일이 아니나 하늘의 복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생사의 문제가 천국에서 가장 큰 문제일 뿐이며 죽은 후에는 참으로 가련하고 끝난 것입니다.

우리 신령한 자는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도 하늘에 상이 있는 줄을 알거니와 돌로 치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히고 핍박을 받고 목이 잘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죽었을지라도 이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면서도 한 가지 아는 것은 우리가 절망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끝까지 말했을 때 그는 무엇에 대해 말했습니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고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너희 열조와 같이 너희도 그러하니라 당신의 조상들에게 박해를 받지 않은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도 죽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의인을 팔아 죽였습니다. 너희가 천사들에게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사도행전 7:51-53)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렵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인데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를 포함하여 예루살렘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씩 죽임을 당했고 선지자 이사야도 죽임을 당했고 그는 잘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영적인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설교하는 방식에 대해 목숨을 바칩니다. 당신이 기꺼이 당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면 누군가 당신을 이용하거나 당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것입니까? ? 필요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사람은 소극적이기 쉬우니 죽겠다고 말하지 말고 남의 말을 못 참아라. 오늘날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까 스데반의 생명과 예수의 생명과 이 선지자들은 빼앗았으나 그 세대를 욕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다 그 세대의 식구가 되었느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들이 돌에 맞아 죽는 동안 스데반은 주님께 간청하여 말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그런 다음 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지우지 마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는 잠이 들었다. 사울도 자신이 죽임을 당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7:59-60)

이 스데반은 예수님의 모형일 뿐이며, 그런 사람은 세상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스데반과 선지자를 죽이고 쉽게 화를 내는 것들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Stephen은 단지 몇 가지 진실을 말하고 몇 가지 진실을 말했고 결국 한 무리의 사람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지만 스데반은 또한 이 범죄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당신과 나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내가 하늘의 축복을 붙잡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님께 처리해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 그리고 그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도 모두 100% 느꼈습니다. 100가지 이유. 후에 바울이 된 이 사울도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기뻐하였으니 이 사람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느냐?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자기 안에 있는 일을 잘 처리하라고 정말 권하고 싶습니다.

스데반이 한 말은 매우 반성적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이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그 선지자들을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은 결국 예수님도 죽였고 우리는 놀랐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늘의 축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온통 땅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상이 큼을 안다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땅의 것을 좇고 부당하고 부당한 것을 좇는다면 일어나 대적해야 합니다. 성경을 봅시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골로새서 3:2)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되 축복만 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14 참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하늘의 복을 귀히 여기는 자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공정성이 없습니다. 땅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죽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늘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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