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요한복음19장=하나님의 계획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서론

영적인 눈이 없으면 어떤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고통의 원인이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괜히 고통받고, 어떤 사람들은 괜히 고통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그 옆에 있던 두 강도도 고난을 당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강도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악으로 고통받는 줄도 모르고 슬퍼하며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고통의 문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고통을 겪는 이유는 설명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야훼 앞에서 싹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자라났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은즉 우리가 그를 볼 때에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느니라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얼굴을 가리운 것 같이 멸시를 당하고 우리도 그를 존경하지 아니하노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받은 줄로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니라 그가 징계하심으로 우리가 안전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 잠잠하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잠잠하였도다 그는 압제와 심판으로 끌려갔고, 그가 채찍에 맞고 산 사람들의 땅에서 끊어진 것이 내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그 동시대 사람으로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그가 강포를 행치 아니하며 궤사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악인들과 함께 장사되었으나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장사되었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를 상하게 하시고 괴롭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속죄제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그의 자손을 보고 그의 날이 길리라. 여호와의 뜻이 그의 손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수고의 결과를 볼 때 만족할 것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에 대한 지식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었고, 그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큰 자의 몫을, 강한 자의 탈취물을 주리라.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였느니라. ("이사야" 53:1-12)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5,600년 전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고 그의 징계로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지워졌음을 알기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요통이 있으면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채찍으로 인해 낫기를 반드시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채찍이 없이는 고침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과 우리의 평안으로 인해 자주 평안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모두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초를 맛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요한복음 19:30")

이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왜 그 순간에 성공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53장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평안을 얻고 치유를 받기 때문에 끝난 것입니까?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려는 것을 기뻐하노라 ("골로새서" 1:24)

구원은 이루어졌지만 구원의 길은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고난을 받을 의지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하라 하시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가 없느냐? 또한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가운데에서 채워졌다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 년 전에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고 육체의 고통, 즉 예수를 본 받았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가신 길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것인데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바울과 같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못한다면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은혜요, 바울이 받은 것은 높은 은혜였습니다. 사실 바울이 그런 상황에 이르러 골로새서를 쓰면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온전히 헌신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었고, 그 옆에는 두 명의 강도가 고통을 겪었고 그들의 고통은 무가치했습니다. 고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이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그도 고난을 받았으나 영광이 없는 자들이 있으니 이는 그가 예수 곁에 있던 강도와 같이 자기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라. 오늘의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바울이 목이 잘린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그러나 오직 이 방법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의 삶으로 기록되고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보다 더 좋은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절대 아무도 거짓말을 하고 목숨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베드로후서와 디모데후서는 그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그들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목을 베실 때가 이르렀고 나는 지켜야 할 말을 지켰노라 하라. 그들은 예수님처럼 목숨을 걸고 이 길을 떠났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이야기 전반에 걸쳐 대제사장들과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죽음으로 정죄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놀라운 구원이 이루어지고 마귀와 원수를 완전히 물리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무서워하여 다시 뜰에 들어가 예수께 여짜오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말했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욱 중하다. ("요한" 19:8-11)

권위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약간의 고통을 겪을 수도 있고, 약간의 불만을 겪을 수도 있으며, 너희가 경험한 일 중 어떤 것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다. 바울을 판단하든 베드로를 판단하든 예수를 판단하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권위를 존중하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정부에 대항하여 행진하거나 싸우지 않을 것이며,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며, 우리의 왕국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우리의 왕국은 하늘에 있으며,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몇 년 전 베이징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정부에서 모임을 금지하자 그들은 공원으로 달려가 모임을 갖고 정부에 맞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최근 저장(浙江)성에는 십자가가 많아 정부가 불편해 철거하기 시작하자 많은 교회가 시위에 나섰습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를 놓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매우 웅장하며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는 순간 너무 엄숙하고 엄숙하며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의외네요, 이 건물이 그렇게 수용인원이 많나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극히 황폐하고 건물 몇 채만 남아 있는 영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잘못된 신화에서 벗어나 권위의 개념을 갖고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땔 수 없고 조금 핍박을 받더라도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싸우지 않을 것이며, 우리 교회는 항상 좋은 시민이 될 것이며, 우리 형제 자매들은 항상 권위를 존중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이 권세를 행사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 권세에 순복하는 순복의 관념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여전히 노예라면 당신은 계속 당신의 노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의 모습은 당신의 내면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결코 거역적인 구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항하지 않았고, 바울은 제자들을 이끌고 거리로 행진하지도 않았고, 신도들이 스타벅스처럼 칼과 총을 들고 반란을 일으켜 싸우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중국 역사에 홍수전(洪秀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 신앙으로 태평천국을 세웠으나 후에 비참하게 멸망했다. 우리는 지상에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싸우지 않았고 베드로도 그들의 재판이 불공평했지만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개념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런 일은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주인을 배반한 자는 더 큰 죄가 있느니라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예수님을 심판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며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더 큰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백성이고, 우리를 심판하거나 핍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방관하시고 그들의 죄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후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자기 죄가 더 중하여 목매어 죽었고 그 죄의 중함은 자기에게 있고 아무도 능히 대신하여 짊어질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빛을 받고 하늘의 은혜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깨달은 자 중에 도를 저버리면 능히 회개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공개적으로 욕되게 하였느니라 여러 번 내린 비를 먹은 밭과 같이 밭가는 자가 기르기에 합당한 채소가 자라 하나님께 복을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면 버림을 받을 것이요 가까이 저주를 받고 끝이 불타리라. ("히브리서" 6:4-8)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후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당신의 결과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온갖 문제를 안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사역을 했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여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다시 그 구덩이에 빠졌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경배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바쁘게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나는 불완전한 조사를 했고 그들의 생활 조건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잠시 동안은 괜찮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삶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게 될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그들의 죄는 더욱 심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다

빌라도는 그 패에 다른 이름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그 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그가 친히 말하되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쓰라. 빌라도가 말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요한복음 19:19,21-22)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는 빌라도의 심령으로 그러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의 왕을 썼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성경에 기록되었고 한 가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유대인의 왕에 대하여 쓰지 말고 자기가 말하기를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였더라 빌라도가 말했다: 내가 쓴 것은 다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갈 때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도 우리가 왕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확실히 알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당신의 어머니!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요한복음 19:26-27")

어머니, 이것은 당신의 아들이고 아들, 이것은 당신의 어머니이며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형제들은 없었고 마리아와 요한만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형제자매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누가 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육체와 거의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고 누가 가질까 제비를 뽑자 하더라 이것은 그들이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뽑았다는 성경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군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19:24")

로마 군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들이 한 일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웁니다. 당신 주변에서 당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괴롭히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정하셨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은 식초를 맛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경전에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것을 쳐다볼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8,30,36-37)

"바이블 코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그것을 분석할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유대 수학자인 한 남자가 성경을 분석에 사용했습니다. 어떻게 분석했습니까? 일정한 간격으로 인물을 찍고, 3,400쪽짜리 책 한 권에 수학적 연구를 많이 했다. 뉴턴의 만유인력을 연구하기 위해 그는 그 안에서 검색하고 컴퓨터로 코딩한 결과, 같은 페이지에 있는 몇 단어와 일정한 거리에서 찍은 몇 글자가 모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충격을 안겼습니다. 성경은 문자적인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코드화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글이 있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나는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이 두루마리를 펴고 일곱 봉인을 떼기에 합당합니까?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두루마리를 펴서 볼 자가 없느니라 그 두루마리를 펴서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많이 울었습니다. 장로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를 펴고 일곱 인을 떼시리라 ("계시록" 5:1-5)

일곱 인의 개봉은 무엇입니까? 봉인은 컴퓨터의 열쇠이며 암호화된 책입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셨기 때문에 손에 일곱 인을 떼는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이 일곱 인에 속해 있으며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이 떼신 인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봉인을 떼셨습니까? 예수님이 인을 떼실 때 지구가 변하고 역사가 앞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앞으로 나아가나요? 그것이 교회입니다. 예수의 몸은 교회이며, 시대를 초월한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인을 쳤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르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계시를 주시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이 인을 뗄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처음 4장은 일곱 교회,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 완전히 이루어질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임하기까지, 그것이 말세의 도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구원을 이루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값비싼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고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습니다. 저는 온라인 교회를 짓는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굳게 믿습니다. 나는 온라인 교회를 짓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단계별 인도였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입니다. 모든 교회의 새로운 장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 새로운 계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세 구절은 모두 성경을 성취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즉, 경전에는 숨은 말씀도 있고, 쉬운 말씀도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사람의 것이고 비밀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비밀은 반드시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계시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초월적인 믿음, 계시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계시의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왜 기도하는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기도하는 교회만이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때 인류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향연과 성도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손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큰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요한계시록 8:4-5)

인류 역사가 진행되면 천둥, 번개, 지진이 있어야 하고 자연재해는 계속 심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부터 기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우리의 기도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또 한 번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충명한다

이 일 후에 예수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제자가 되니라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빌라도는 동의하고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습니다. 전날 밤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그들은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와 향료로 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산이 있었고 동산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한복음 19:38-42)

이것은 놀랍습니다. 전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제자였더니 이제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간청하더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영생이라는 것을 탐구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야 우리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논리이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이사야서를 잘 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았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징계하심으로 우리가 안전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참조, 이사야 53:5).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영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아이를 데려온 자매님을 불렀는데 아이가 귀신들려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ADHD를 앓아 지금은 집중이 잘 안 된다. 사람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면 20대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랜 세월 전통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한 신자가 아이의 상황을 보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었지만 제 말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권력, 권세, 구마, 석방,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 바울을 본받는 것에 대해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예수 같지 않고 목사가 예수나 바울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정상이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의 목사가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고 새 방언을 말하리라 하셨느니라. (마가복음 16:17 참조)

우리는 요셉과 니고데모에게서 배우기 시작해야 합니다.그들은 예수님의 전 생애, 특히 예수님의 봉사를 합쳤습니다.이는 세상의 구주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의 시신을 얻어 침향과 몰약과 함께 묻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도 유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전에는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제자를 삼았더니 이제는 그 두려움을 버리고 공개적으로 제자가 되려 하나니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를 것임이라 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오늘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은혜 베푸시는 것을 보고 조금 어긋난 일이 생긴다면 전체를 봐서 그 한 가지 때문에 혼동하지 말라. 고생 좀?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을 받고 그것이 은혜인 줄 모르고 억울함을 느끼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아도 다 이루었다, 이겼다고 하면 됩니다. 이기면 이 일곱 봉인을 깰 수 있고, 인류의 역사는 당신의 개인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이므로 당신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고 애굽을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못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일까요?

어떤 사람이 그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악마가 사람에게 와서 '와서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 주겠다'고 말했는데 모두 매우 아름다운 해변이었습니다. 해변을 걷는 것은 매우 편안하고 햇살, 비, 봄바람, 와우!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습니다. 바닷물이 수정처럼 맑아 보입니다. 그 남자는 '그래서 지옥은 이렇고,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어느 날 그는 죽고 그 사람은 지옥에 갔고 그곳은 불멸의 곤충이 필사적으로 물고 있는 불과 유황의 못이었고 악마는 계속해서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악마에게 '네가 보여줬잖아, 이건 아니야'라고 말했고, 악마는 '그건 데모일 뿐이야'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십자가에 죽은 것 같고, 겉으로는 핍박을 받은 것 같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기 전에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끌려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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