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이사야53장-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도다!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누구에게 나타나느냐?
이 장은 다음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가 몇 분이나 계시나요? 하나만 있습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며, 예수께서 하신 일을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성경을 모른다면 당신은 그가 말한 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팔이 결코 짧아지지 아니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그 시대에 예수로 말미암아 하신 일을 지금도 이 시대에 행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변치 않으시며 그분의 권능의 팔이 그분의 종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이 지혜로워지고 존귀해지며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팔은 예수님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오늘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닮고자 갈망하고 예수님만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느끼며 세상의 이런 일들을 보면 예수님이 너무 필요함을 느낍니다.
나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으러 갔고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내게 나타나셔서 그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이 다 같은 간증을 들었는데 H자매가 방금 한 간증에서 월급이 2000위안 이상에서 6000위안 이상으로 올랐는데 어떻게 1년 만에 이렇게 많이 올랐을까?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H 자매에게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우리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기이한 축복을 체험하지 못했는데 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지 못했을까요?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나타나시므로 우리 모두는 이 사람을 닮고자 예수님을 닮기를 열망해야 하며, 예수님을 닮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이고 두 번째는 바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본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신약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팔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한 일과 예수님이 한 일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바울이 예수님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의 팔이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이것이 매우 흥미롭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는 야훼 앞에서 싹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자라났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은즉 우리가 그를 볼 때에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느니라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얼굴을 가리운 것 같이 멸시를 당하고 우리도 그를 존경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53:2-3)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만하고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권능의 팔을 보여주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식구들은 하나님이 내 손을 통해 하시는 일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사부 XX는 정말로 내 능력을 갖고 돈을 벌고 싶어하지만 나는 결코 이 능력을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바울은 자기가 못생기고 말이 천박하다고 말했지만(고린도후서 10:10)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바울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 그래서 오늘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강한 팔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도 미래에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마음에 할례를 받아 우리 육체의 악한 정욕과 정욕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길
오늘날 우리 형제자매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때 그것이 매우 간단하고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려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믿음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믿음을 바탕으로 그 길을 걷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에 근거한 길은 훌륭합니다. 생각을 바꿀 시간이 없었지만 뼛속에 작은 농민 생각이 있다면 끔찍할 것입니다!
오늘날 왜 형제자매들이 저주를 받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기 때문에 우리만의 논리 체계가 있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많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저주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논리대로 하면 아주 간단한 일인데, 하나님이 반드시 돌이키실 것이라고 믿으면 반드시 돌이킴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저주받은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뒤집히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잡초를 뽑고 있고 풀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십일조도 드리고, 단기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을 붙잡고 계속 믿습니다!
제가 처음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 저는 직장을 옮겨야 했고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우셔서 직장을 구하고 십일조를 냈는데 첫해에 월급이 아주 천천히 오르고 제 삶은 여전히 조금 긴장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내는 것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불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하나님은 은혜롭게 저를 재정적으로 축복해 주셨고 지금까지 저는 재정적으로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내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받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것과 같은 것도 할 것이요 또한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한복음 14장 12절)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행하는 것이 성경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예수와 바울이 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나타나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니라 그가 징계하심으로 우리가 안전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곤욕을 당하셨으나 고난을 당하실 때에는 잠잠하셨으니 (또는 번역:그는 핍박을 받으셨으나 겸손하여 잠잠하셨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잠잠히 계셨더라 . 그는 압제와 심판으로 끌려갔고, 그가 채찍에 맞고 산 사람들의 땅에서 끊어진 것이 내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그 동시대 사람으로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그가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고 궤사한 말이 없으되 악인과 함께 장사되고 또 강포하지 아니하고 궤사하지 아니하여도 악인과 함께 장사되매 죽어서 부자와 함께 장사되니라 그러나 그를 상하게 하고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주님의 뜻(또는 번역: 기쁨)이었습니다. 야훼는 그를 속죄 제물로 삼았다(또는 번역: 그는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쳤다). 그가 그의 자손을 보고 그의 날이 길리라. 여호와의 뜻이 그의 손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수고의 결과를 볼 때 만족할 것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에 대한 지식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었고, 그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다. ("이사야" 53:9-11)
다음으로 9-11절을 보겠습니다. 이 성경구절에서 축복으로 들리는 말씀이 다 고난의 말씀이 아닌데 여기 기록된 것이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보셨습니까? 여기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과거 이야기는 싫어하고 오늘 이야기는 좋아했는데, 이 문장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사실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우리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도 갇히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8-11)
사실 이 말씀은 바울이 자주 어려움에 부딪히지만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바울이 전도할 때 겪은 일이 정말 놀랍고 가는 곳마다 기적을 행하지만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고 그는 그곳으로 도피한 후 매우 염려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썼습니다.
그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여 제자들을 그리로 보내어 보게 하시고 그 곳 사람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이 주밖에 듣지 못하여 세움을 받았고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매우 강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교회마다 퍼졌는데, 사람들이 핍박이 있을 줄은 알면서 왜 핍박을 받는지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박해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박해받는 이유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을 따른다면 형제 자매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기뻐할 것입니다. 요점은 고통이 아니라 그가 고통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럽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고난을 받되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려 하여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교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보충해야 합니까? 당신이 여호와 하느님의 종이라고 일컬어지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회가 받는 고난도 아닌 자기 욕심 때문에 고난을 당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핍박을 받으려면 교회의 형제자매를 섬기고 고통을 받으려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이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권능도 나타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축복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늘부터 섬기는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완합니다. 완성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시요 교회가 몸이니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도 우리에게 나타나서 이 세대에게 축복을.
사람은 자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자신을 위해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왜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이 하나님의 강력한 팔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이사야" 53:4)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도 바울을 본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될 때까지 나는 여러분을 위해 다시 출산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19)
해산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고통이 사도 바울에게 지금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매일 걱정하는 것은 교회 건축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약하고 내가 약하지 않습니까? 누가 걸려 넘어지는데 나는 불안하지 않습니까? (고린도 둘째 11:29)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하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니라 그가 징계하심으로 우리가 안전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곤욕을 당할 때에 그 입을 열지 아니하며 (또는 곤욕을 당하면서도 스스로 낮추고 입을 열지 아니하도다)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 그래서 그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이사야" 53:5-7)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시작하고 싶습니다 형제자매들에게 매우 침착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이지만 결코 싸우지 않고 거리에 나가지 않으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항의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거리로 데려가는 것을 언제 보았습니까? 아니요.
곤욕을 당할 때에 입을 열지 말고 자신을 위하여 쟁론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쟁론하라. 그를 심판하는 재판관들 앞에서도 그들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약간의 불만을 겪었습니다. 그냥 삼키십시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억울함을 이야기하면서 많은 고충을 겪었고, 그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가고, 감사할 줄 모르고, 가족애가 없고, 당신은 그들을 잘 대해주지만 그들은 당신을 심하게 대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은 배은망덕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봉사에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우리가 목양하는 사람들의 육신적인 본성이 드러날 때 우리는 배은망덕한 상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섬기는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에 섬기는 과정에서 종종 환난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다시 산고를 당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준 것은 세상의 왕들이 아니라 그가 섬겼던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바울은 이 교회를 자기 손으로 지어 1년 반 동안 교회에서 한 푼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일로 돈을 벌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그가 떠난 후에 또 다른 무리가 와서 바울이 너희를 이용하려 하였으나 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자기들을 이용하려는 줄로 믿었다.
그들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는데 바울이 쓴 후 사람들은 바울을 더욱 미워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두 번째 편지를 썼고, 우리가 나중에 본 "고린도후서"는 사실 세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의 경험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그가 세운 교회는 그를 반대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직접 섬기고 축복한 사람들이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입니까! 그들의 죄로 인해 참으로 치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러한 일에 상처받지 않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태어나려고 이 세상에 왔고, 이 세대를 축복하러 왔습니다. 그들이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들의 생명 성장 과정에서 종종 약간의 작은 반복이 있으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든 간에 이 사람은 변할 거라 믿어요. 한 사람을 성공적으로 회심시킨 적이 없더라도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면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이 회심할 때까지 섬기기 시작하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사실 가끔은 정말 아프고 마음이 힘들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을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이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봉사에서 나는 여전히 선언합니다 그들이 회심하리라는 믿음으로.
영생의 개념을 가진 사람이 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여 고통을 주기로 작정(혹은 기뻐하심)하셨고 여호와께서 그를 속죄제로 삼으셨다(혹은 자기 자신을 속죄제로 드리게 하셨다) 그가 그의 씨를 보고 그의 날은 길 것이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는 수고의 결과를 볼 때 만족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의 의로운 종에 대한 지식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다. ("이사야" 53:10-11)
나는 이와 같은 단어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들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고 바울을 본받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오늘은 정말 만족해요 눈물도 안흘리고 고생도 많이했는데 만족해요 대박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 그거 알아? 한자어가 참 신기해 행복하다는 말은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고, 고통을 느끼면 행복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 발언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수고의 열매를 보는 것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가을에 거둘 때에 만족하는 것과 같으니라. 당신이 뿌린 씨앗, 흘린 땀과 눈물, 언젠가 당신은 당신의 수고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우리 손에서 번성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후손을 해변의 모래와 같고 하늘의 별과 같게 하며 날이 길리로다. 우리의 날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가 아니라 영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각을 바꾸기 시작해야 합니다. 설령 예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사람의 성육신이라 할지라도 그의 손을 못으로 박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울 것이고 그의 생명을 빼앗기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생의 관념이 있기 때문에 고통 중에도 결실을 맺을 때까지 섬김을 택합니다. 사람에게 영생의 개념이 없으면 계속 섬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생에만 머문다면 이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허영심의 허무함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날을 연장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 중 일부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기 위해 오늘날 강해질 수 있습니까?
우리의 관념이 모두 이생에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영생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영생을 믿지 않는 것 같고 소망이 온통 이생에 있다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을 때 영생을 믿었습니까? 영생을 믿지 않는다면 세례를 받는 것은 목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영생을 믿지 않는데 무엇을 위해 세례를 받습니까?
자손을 보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예. 그러나 그는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그가 우리를 보셨습니까? 봤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 구절을 올려다볼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보좌에 앉아 내려다보고 계시며 우리를 보실 것입니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한 가지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늘에는 관람석이 있고 그곳에서 모든 성도들이 매일 내려다보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연극을 보는 것처럼 투명하게 그분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극에서 우리를 봅니다. 당신의 플레이가 좋을 때 그들은 천둥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들을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은 당신의 후손으로 보실 것입니다. 그가 징계하심으로 우리가 안전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여기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마침내 그의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는 수고의 결과를 볼 때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귀인과의 몫을 주고 권세 있는 자와 탈취물을 나누리니 이는 그가 자기 생명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이니라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였느니라. ("이사야" 53:12)
이런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존귀한 자와 나누게 하시며 강한 자와 노략물을 나누시리로다 상대방이 아무리 힘이 세도 똑같이 나눠먹는다. 전리품의 공평한 분배란 무엇입니까? 너와 함께 싸워 이기고 전리품을 너와 나눈 전능하신 분이다.
당신이 권력자 사이에 있다면 당신은 강한 사람이고 번영하는 사람이며 적을 약탈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적들을 포로로 잡았습니까? 약탈. 약탈자들은 모두 금은보화이며, 가짜도 아니고, 돌에서 변형된 것도 아니며, 진짜 금은보화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지상에서 사는 동안 강자와 약탈물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왕으로 존귀하게 되셨지만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예수님께 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쓴 것입니다. 2,000년 이상 전에 발견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날 일,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형제자매들이 기도하는 중에 이상을 많이 보았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현재 상황에서 한 물결이 가고 또 한 물결이 오면 만족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번영해야 합니다. 너희가 섬기는 양같이 길 잃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각각 제 갈 길로 갔으나 너희 수고의 열매를 볼 것이요 너희 수고의 열매를 마음에 영원히 산다.
"계시"는 매우 분명합니다. 당신의 일의 결과는 영원히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계시록" 14:13). 하늘에서는 이런 섬김이 필요 없고 오직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을 때에야 이 세상에서 그 영광을 나타내어 큰 자의 몫이 되고 큰 자의 몫이 되고 강한.
타협하지 말고 삶을 쏟아라! 주님을 믿는 믿음은 다음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제 머리를 당신께 바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제 발을 자르는 것은 여전히 옳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믿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쏟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면 고통을 받습니까? 절대적으로하지. 그것이 내가 봉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 말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삶을 쏟아부으십시오. 그러면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사람은 큰 사람과 몫을 나누고 강자와 전리품을 나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영광의 면류관을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적이고 가벼운 고난이 무중력의 영원한 영광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광을 하루빨리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은 내 믿음으로는 참된 줄은 알지만 본 적이 없고 오직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하신 팔을 보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볼 것이고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사야" 52:15)
이 무중력의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우리의 눈에, 우리의 믿음으로 보입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 같으나 본 것 같으니 그런 소망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요,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나타나는 것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능하신 팔을 나타내기 원한다면 겸손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겠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야훼 앞에서 싹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자라났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은즉 우리가 그를 볼 때에 부러워할 아름다움도 없느니라. ("이사야" 53:1-2)
"그는 외모나 미모가 좋지 않고, 우리가 그를 볼 때 그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더라도 그를 부러워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몇 초 안에 악마를 죽이기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계속 걸어갑니다. 거리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속으로 우리는 참으로 사람의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것, 즉 남의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냐하면 당신이 서로 사랑할 때 그가 당신을 불쌍히 여겨도 당신은 그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불쌍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때려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미움과 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을 누가 믿으리요 이사야가 심히 감동하였나니 이는 하나님의 능하신 팔의 복음이요 포로 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하나님의 자손을 자유케 하며 그 날을 연장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복음이로다 누가 믿겠느냐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이런 자에게 우리가 예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하면 너도 만족하리라 이 영원한 영광이 공허한 날에 이루리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