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마태복음22장-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마태복음 22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장의 제목은 "하나님께 쓰이지 못하는 백성"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쓴 것은 특징이 있는데, 그는 끊임없이 두 가지 제도, 즉 세상의 제도와 하나님의 제도를 논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부터 시작하여 두 나라, 두 추구, 두 기초, 두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마태는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막 마쳤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마태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마태가 말한 개념대로 공부하면 마태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벗어나서 읽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 이 종파들은 성경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의 견해는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그것은 거기에 설치된 일련의 논리 시스템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있다면 기독교에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는 종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종파를 명확하게 연구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제도 안에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제도 안에 있는지이다.

세상의 제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능부들에게 세로 줄찌닌이다.(마태복음 21:41)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하 ㄴ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태복음 22:7)

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까? 그 속에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세상 제도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쓰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 악인들을 독이 있는 손으로 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더 잔인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이 선한 사람, 특히 산타클로스와 같은 선한 사람이라면 그런 잔인한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접근은 더욱 잔인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 제도에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곳의 모든 백성을 멸절시키거나 쫓아내신 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옳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잘못하셨습니까? 티끌에 불과한 우리가 어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논평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논리가 있는데, 하나님이 멸하시려는 사람이라면 내가 왜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상 주시려는 사람이라면 나는 왜 그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든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간단하지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그들의 선택이다! 하나님께 도태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도태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실 사람의 삶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상의 시스템을 없애고 하나님의 시스템을 세우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왕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청한 자들을 청하되 오기를 거절하니라. 왕이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잔치가 준비되었고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잔치에 오라 하라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떠났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갔다. 왕은 매우 화가 나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그들의 도시를 불태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천국은 마치 자가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천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역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천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릐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하 ㄴ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엇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으 ㄹ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느 ㄴ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올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복음 22:1-14)

예수님은 여기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옵니다. 음식과 음료가 준비되었는데 왜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는 일련의 고유한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으며 하늘에는 파이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수 있습니까? 잊어 버려! 그래서 누군가 그냥 떠납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에 갔고, 한 사람은 장사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것은 괜찮지만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까지 죽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정확히 하나님의 사자를 죽였습니까? 바로 종교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빌라도가 아니라 유대인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순결한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대적하는 자가 먼저 종교인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 나가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고, 하나님의 사자를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왜 죽였을까요? 이것은 매우 이상합니다.

기독교계는 종파라는 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도 없고 관심도 없고 교회 안에 있는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을 알지도 못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물고 꼬집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 세상에 속한 논리체계와 약간의 종교가 있다면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매우 확신하고 있으며,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이단자로, 예수를 속이는 자로 단정했습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요한계시록 20:7-10)

"계시록"은 매우 흥미로운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년 동안 왕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사탄은 무저갱에 던져졌습니다. 천년이 지난 후에 사탄은 무저갱에서 풀려났습니다. 그 결과 땅의 모든 민족이 미혹되어 해변의 모래같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제자들을 공격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통제하에 천년 동안 통치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갑자기 당황했을 수 있습니까? 사탄이 무저갱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왜 혼란에 빠졌습니까? 사탄은 천 년 동안 이 땅을 통치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귀라고 믿게 만들었고, 그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전쟁이 있고 그것이 정당한지 불의한지 논할 수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등 오늘날의 세대는 모두 파병을 의병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정의로운 일인가? 사실 이건 정말 정의도 불의도 아니고 그저 은폐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정말 옳은 일입니까? 그것은 의견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옳다고 믿고,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믿자, 그들은 그들을 죽였고, 마침내 왕은 분노하여 그 살인자들을 몰살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는 것은 저주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유대인들이 한 말: 이 사람의 피를 흘린 죄는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로 돌아가리라. 그 결과는 정말로 그들의 후손에게 떨어지며 그들의 후손의 저주는 매우 깊습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깨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2:8-13)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당하거나 흑암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이 쓰시지 못하는 것은 다 저주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비합리적인지 말하지 말고 하나님과 의논하라 나는 감히 하나님과 의논할 수 없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만큼 좋지 못함을 느낀다

한 사람은 밭에 가고 한 사람은 장사를 하고 둘 다 돈을 벌러 가는 것이 우리의 이런 상황과 같은지 여러분이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하나님보다 일과 사업을 더 중요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오늘날의 교회들도 많은 세상 제도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시스템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속한 제도는 실상 살인 방화가 아니다 살인 방화 배후에는 종교의 영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매우 심각하게 다룬다 종교의 영은 매우 치명적이고 무섭고 두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이 확고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항상 주님을 믿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사실 우리가 세상의 제도를 따른다면 어디에서나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 제도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1년여 동안 나는 세상의 논리 체계를 사람 안에서 해결하는 데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세 자녀가 피부병이 심하고 손발이 온통 축축한 한 자매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그녀 안에 있는 세계의 논리 문제 시스템을 다루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면 누가 내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누가 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내 아이는? 그러나 그것은 최근에 바뀌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능력 있는 복음이라 이 자매님은 기도하고, 숙제하고, 메모하는 등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 아이의 손과 발의 피부는 기본적으로 치유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이나 일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항상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며, 사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상태를 결정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함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육신의 분별과 세상의 분별과 선악 분별이 다 없어지면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 열매는 여전히 여러분의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하나님께 잔치하러 왔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돈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 주어지지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모두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이 인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모두를 부르셨는데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고 싶습니까? 희귀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백성이 되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거나 버려져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논리체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살론하고.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도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제과 이 글이 뉘 것이냐?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태복음 22:15-22)

왜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세상에 속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고 돈을 매우 중시하지만 돈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의 돈이 성경의 논리에 따라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돈 때문에 일련의 논리 시스템이 생성됩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

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편애를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의견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도 괜찮습니까? 하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듣고 싶었던 것은 매우 종교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도 그들과 같은 혼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돈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누군가에게 고스트 페이퍼 더미를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관심이 있으십니까? 누군가에게 달러 한 뭉치를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유령 종이 한 뭉치와 미국 달러 한 뭉치 사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세금을 보면 이 표는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 또 다른 예수년의 돈을 가져가면 골동품이 됩니다. 앰퍼샌드는 카이사르의 것인데 카이사르도 나중에 죽지 않았나요?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미 마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과소평가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할까요? 세금을 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우리는 세금을 내기 싫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금 한 푼도 내지 말고 내야 합니다.

기회가 되시면 지난주 간증을 보시면서 형제자매들이 봉급이 인상되었는지, 보조금과 상여금이 인상되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신종 코로나 전염병 동안 형제자매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이 얼마나 많은지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주 간증에서 한 자매가 웹사이트에 기록된 기도를 따라 간증한 후 치유되었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녀는 고침을 받은 후 에로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에로스를 많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치유받기를 원하는 기독교인에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기독교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불리한가요? 그녀는 손실을 입지 않았고, 수입이 두 배로 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돈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라면 많은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돈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라면 많은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야곱이 몽둥이를 들고 삼촌네 집에 왔을 때는 돈이 없었지만, 돌아와 보니 동네 부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데 문제가 있습니까? 괜찮아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도 가난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공물로 바친 금이 수백 톤인데 오늘날 당신의 손에 수백 톤의 금이 있다면 그 가치는 얼마입니까? 그래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세상의 논리체계에 속한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드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엇나이다.그런죽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태복음 22:23-28)

이 말은 절대적으로 세상의 말입니다. 사람의 부활도 모르면서 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부활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사실 부활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에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난미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태복음 22:29-33)

바리새인과 헤롯당과 사두개인은 다 세상 논리를 가졌고 돈에 집착하거나 세금을 내는 것과 같은 세상 일로 혼란하여 혼란이 생기니 이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이 가득하여 그들은 많은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다른 교회에서 왔다면 많은 가르침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교회가 많은데 이런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실 인간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

엊그제 밤에 영상을 받았는데 보름 전 80세 누나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귀가 잘려 귀 전체가 썩었습니다. 사진상으로는 귀와 눈이 1개밖에 남아있지 않아 귀인지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그 결과 홈페이지에서 저희 기도록을 1편씩 들어보게 되었는데 그제 밤에 영상이 올라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적적으로 귀가 자라났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폭탄에 맞아 발의 절반이 날아갔고, 멀쩡한데 발이 절반밖에 안되었다는 증언을 읽었습니다. 한 사제가 발을 끌어안고 기도를 드렸는데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을 가리던 천을 펴자 발이 자라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약간 긴장하게 들렸다고 생각했지만 기꺼이 믿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을 때 예수님께서 그 귀를 만지시자 다시 자라난 것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일을 접하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내가 한 말을 듣고 당신도 내 이전 의견과 같은 느낌을 받고 이것이 약간 걸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생활의. .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하지만, 사실 성경 전체에서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죽은 후에는 축복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살아 있을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실제적이어서 당신의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명기 28장을 읽어야 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집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명기 28:1-4)

혼자 밭에 가면 뭐해? 내가 땅을 심지 않으면 작물이 스스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의 제도에 깊이 얽매여 있습니다. 사업에 종사하는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으면 사업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 세상적인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람이 가장 알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축복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입니다 복은 없고 저주만 있으면 장사를 어떻게 하든 어떻게 하든 ,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으면 그가 심는 땅도 복을 받고 그의 하는 일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밭에서도 복을 받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그와 같이 오늘 봅니다 Fu의 형제 자매처럼. 하나님께 쓰임받고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되기 싫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수 있고, 일을 해서 형통할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점차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시작하십시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맺는 열매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결국 우리가 맺는 열매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전히 헌신하여 우리 안에 있는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어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태복음 22:24-28)

예전 그룹에서는 이런 종류의 지루한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사람은 신이 창조한 것인데 누가 신을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그가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느냐? 그냥 헛소리가 많을 뿐이고, 이 말들은 내가 할 일이 없을 때 지어낸 헛소리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짓을 할 수 있고 신처럼 살게 할 수는 있지만 살 수 있고 번성 할 능력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결과 또 다른 바리새인의 물결이 와서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을 잠잠케 하실 수 있다 함을 듣고 모여 이르되 와, 그들이 어떻게 사두개인들을 잠잠케 하겠느냐.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러 오려니와 율법사들은 성경에 정통하니 오늘은 로마서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외웠다 하면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변호사일 것입니다. 이에 저희가 예수를 시험하러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는 진지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여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울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율법사는 좋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아마도 그 율법사는 성경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워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이 두 계명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가르침의 총합이니라 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절반은 혼란으로 가득 찬 독서법의 절반인 세상의 체계입니다.

이들은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논리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두 왕국, 두 추구, 두 제도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의 논리 체계는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전부이시며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데 아까지? 이것은 논리적 체계의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실 차례였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서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태복음 22:42-45)

이 질문은 즉시 바리새인들을 압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바리새인들은 영의 세계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의 세계에 무지하면 육신과 세상의 논리 체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이 문장을 보면 압도당할 것입니다 질문을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날 영의 세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영의 세계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이 있음을 안다면 그 이름은 승리의 이름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원수 마귀를 사로잡고 그 결과 많은 표적과 기사가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적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자연 법칙의 문제도 아니며, 우리는 자연 법칙의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제들이 자연의 법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당신은 자연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사람이고 오늘날 우리 모두 자연인이라면 우리 모두는 세상의 법에 따라 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러한 것들에 대해 어떻게 혼란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시고 영적으로는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이시니 영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연속되는 혼란의 세계 영혼의 세계. 오늘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가 먹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도다!

오늘날 우리 안에 아직도 어떤 세상 논리가 있다면 우리 안에 있는 혼란스러운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의 주제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육신에 속한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혼란과 고난이 가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드릴 수 있습니다. 육신과 세상에 속한 것은 다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승리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광의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능력 있는 교회를 세우는 승리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능력 있는 교회를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길을 닦으실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제도를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며 자기를 온전히 드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이 말이 다소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점차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칠십 팔십을 바라보면 잘 살 수 없지만 영원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 이생이 아닙니다. 살다. 당신은 기꺼이 자신을 헌신할 것이며, 이 세대를 축복하고 섬기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권능을 갖게 될 것입니다.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중국의 운명신학은 영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영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세속적인 체계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 체계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 마지막 세대에 이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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