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마태복음17장-영원에 영광!

이 장의 주제를 찾는 방법

여러분, <마태복음>17장을 봅시다. 이 장을 읽고 나면 마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요약하기 위해 주제를 사용하는 것이 사실 조금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읽을 때 이 장의 많은 내용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마태가 글을 쓸 때 관련 없는 많은 것들을 함께 나열하고 싶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는 주제를 표현해야 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라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너희 앞에서 번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태복음 17:1-3)

우리는 같은 말씀 내용을 읽었으므로 계속 읽으십시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나는 모세를 위하여,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복음 17:4)

어떻게 세 개의 창고를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Peter와 다른 사람들이 밖에 살고 있습니까? 6개의 창고가 있어야 합니다. 챕터가 좋고 나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자. 이 구절을 읽을 때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이 조금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엘리야, 세례 요한의 변모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한 아이가 있는 사람이 있어 아이가 간질을 앓고 있어 물과 불에 여러 번 빠졌으나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니라 그때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마태복음 17:17)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 앞에서 몹시 슬퍼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나는 그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자들이 간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간질 귀신은 쫓아내지 못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만일 감기와 열병이면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겠느냐?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락은 이전 단락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맏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20-23)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예언하신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반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가로되 (마태복음 17:24-27)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챕터가 잘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사실 분단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번에 16장을 마치고 17장을 읽으면서 매일매일 고민하고 기도하고 구했습니다. 문득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며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계시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꼈습니다.

나는 마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찾아보았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마태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도록 영감을 준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영원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실 때 변형되사 세 제자들에게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영광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영원의 영광은 주로 17장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때 베드로의 세 사람은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더라.(마태복음 17:5-8)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화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메시아가 우리를 고통과 고통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언급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는데 엘리야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아마도 그 말의 내용에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말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으 ㄹ받으리라 하시니.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태복음 17:10-13)

예수님은 흥미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왜 세례 요한이라고 불렸습니까? 왜 엘리야는 아니지? 세례요한이 엘리야를 직접 불렀다면 좋지 않을까요?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혼란스럽게 하여 엘리야가 왔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였다. 우리가 전에 말한 대로 엘리야는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심을 보고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였느니라.

예수든 엘리야든 자기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한 영광임을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영원의 영광과 이어지는 경전의 관계를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영원한 영광은 어떻게 임합니까? 영원한 영광에는 대가가 따른다.

영원한 영광을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이유는? 예를 들어,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또는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 축구를 합니다. 놀랍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싶다면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려면 5개의 장애물을 통과하고 6명의 장수를 이겨야 하며 마지막 16, 8, 4, 4번까지 플레이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을 얻고 싶다면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운명신학은 은혜를 받는 신학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신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직업, 자녀, 가족을 축복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값을 치르고자 하는지 여부이며, 값을 치를 때만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 금메달, 당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나는 금메달을 원하지 않고 집에 가서 직접 만들 것입니다. 당신이 만든 금메달은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정교하고 순금으로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만든 것은 영광이 없는데 왜? 대가를 치르지 않았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고, 대회를 통해 우승 메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챔피언의 경우 월드컵에 가지 말고 집에서 놀자 너무 편안하고 편안합니다. 하지만 그게 챔피언십으로 이어지나요? 참을 수 없어!

대가를 지불하는 것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너무 큽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고, 예수님과 엘리야는 영원히 영광을 누리기 위해 대가를 치렀습니다. 엘리야는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까? 좋아요, 그들은 모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몸이 약하여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묻되 우리가 기다리는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결국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하여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사람은 젊어서 죽여도 별거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사람이 보기에 안타까운 것은 영원한 영광 안에서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30대에 살다 죽임을 당하셨고 영원토록 영광을 짊어지셨습니다. 이 영원한 영광이 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나타났습니다. 왜 보여?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영광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평생 추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원한 영광의 개념 없이 이 세상에서 일과 자녀와 가정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누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걱정합니까? 그는 어린 나이에 그것을 남겼습니다. 버려도 영원한 영광을 얻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성경"에 비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 아브라함은 70세에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70세였습니다. 후에 그의 아버지는 205세까지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고, 더 이상 "성경"은 그의 아버지의 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례식을 위해 하란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니요.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너무 비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영원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오랫동안 멸시해 왔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에 가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건 관습일 뿐입니다. 당신은 돌아가서 관을 보았습니다. 요점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정말 말이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도 사후는 고사하고 아직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까?

이 아브라함도 상당히 무자비합니다. 나중에 야곱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야곱은 여전히 삼촌의 집에서 양을 치고 있었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지만 그것은 영원히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린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어머니를 남겨두고 떠나셨고, 어머니에게 노후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영원히 영광을 얻으려 하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2:48-50)

모든 사람은 명확하게 생각해야 하고, 사람의 삶에는 많은 세상적 관념이 있고, 또한 이 세상의 많은 관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의 의미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삼베를 입고 효도를 하는 것을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그는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세 가지 견해를 뒤집습니다. 참된 길은 사람이 영원한 영광을 추구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아셨습니까? 그는 자신이 겪게 될 죄와 치러야 할 대가를 알고 계셨습니까? 그는 알고있다. 이것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가 만나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는 죽임을 당했다가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입니다.

이 엘리야는 사실 세례 요한입니다 엘리야의 영이 세례 요한에게 들어갔는지, 세례 요한의 영이 엘리야에게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니 헛소리하지 말자.

성경은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데 엘리야와 예수님이 나타내신 영원한 영광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가격이 책정되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는 원래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실제로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지위를 잃고 마침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아내와 결혼하고 장인을 위해 양을 쳤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양을 치는 사람으로 살면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모세는 누구를 위해 대가를 치렀습니까? 모세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지불된 대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는데, 처음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강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고 그의 인생은 엉망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 예수 그리스도 등은 모두 영원한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대가를 치렀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국의 운명신학은 사실상 대가를 치르는 신학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말씀합니다. 어떤 삶을 얻습니까? 이생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좋은 건 없어. 사람이 자기 목숨과 무엇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지불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영원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 말은 약간 공허하게 들리지만 대가를 지불하는 문제는 공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습니까?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 일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나 영광이 말할 수 없느니라. 나는 또한 어떤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온 후 하나님을 위해 치른 대가에 감탄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형제자매들은 장사를 많이 하고, 매일 아침 많은 목자들을 인도하여 단체에서 기도합니다. 한 번에 두세 시간씩 매우 주의 깊게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봉사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업을 운영합니까? 물론 봉사와 기도에 쓰는 것이 더 낫습니다. 비록 이 값이 예수님이 지불하신 값에 비하면 작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오랫동안 믿다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대가를 치를 때가 되면 사슬을 놓칩니다. 왜? 뇌에 장착된 것은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인 척 한다면 그의 목양은 효과적일 수 없다. 그가 보는 것은 세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했을 때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이해합니다. 원래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는데 세례요한이 잘하던 중에 왜 죽임을 당했느냐? 그는 신을 믿지 않습니까? 사실, 그것은 하나님과 영원의 영광을 위해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인지 알아내도록 노력할 것을 권장합니다. 당신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영원의 영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가 담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셨으니 우리가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을 위한 우리의 탐구입니다.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 받은 후에 하나님께 헌신하여 이 세대의 축복이 되느냐가 여러분의 믿음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지불하셨고 우리가 그 값을 지불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값을 지불하는 이 방법이 실제적이고 살아있는 방법입니다. 값을 치르지 않는 믿음이면 무엇을 얻겠습니까? 당신의 올림픽 금메달은 집에서 막 연마한 것이므로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챀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작은 연고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17-21)

그러한 영광은 무엇을 가져옵니까? 그러한 영광은 간질병을 고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대가를 지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값을 치르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누가 알아. 예수 그리스도는 대가를 치르는 분이고 당신은 그렇지 않으며 귀신들은 당신이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귀신을 쫓아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같이 되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될 것입니다.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기도하고 금식하지 아니하면 이런 귀신이 나오지 아니하리라. 그게 무슨 뜻이야? 즉, 대가를 치르지 않고 악마가 나가도록 몸짓만 하면 귀신이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의 두 스트로크를 알고 있으며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나가지 않으면 기도를 멈추지 않고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저녁도 무시한다. 내일의 아침, 점심, 저녁, 저녁은 먹지 않습니다. 마귀는 이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고 이 사람은 너무 강력했습니다. 귀신은 빨리 나갔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태복음 17:22-23)

이것은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습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루나 이틀이 모자라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중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치르겠다는 나의 결심을 물려받았지만 귀신들은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을 보자 다리가 절뚝거리고 겁에 질려 똥이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너희가 인내하여 이길 때까지 견디느냐,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귀신들은 예수님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믿지 않고 비뚤어진 세대. 왜 그렇습니까? 이 제자들은 영원 안에 있는 영광에 대해 매우 얕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멈추고 가로되 주여! 결코 그렇게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당신은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오늘날 사려 깊고 사려 깊은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매우 가난하면 사람들은 주지 말라고 요구하고 그 결과 이 ​​사람은 계속해서 빈곤의 저주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가를 치르신 분인데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본받으면 귀신이 우리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다! 이 왜곡된 시대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습니까? 다만 영원의 영광을 믿지 말고 그것을 갚는 것도 믿지 말라. 왜 그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그들의 믿음은 대가를 치르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안에 못 나가면 이틀 가고, 이틀 못 가면 사흘 간다, 그것이 악마보다 1분을 더 버티는 것이다. 왜 이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한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의 영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오늘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고 영원토록 영광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줄 믿으면 기꺼이 대가를 치르기 때문에 이 간질 귀신이 완전히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먼하리라.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거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7:26-27)

오늘 형제자매들은 저에게서 마귀보다 1분 더 오래 버티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직설적이고 아주 쉬운 믿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단지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는 결심,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는 결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삶과 이 영원한 영광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보면 이 사람이 하늘에서 온 사람인 줄 압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하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자, 그런 사람이 돈이 부족할까? 그는 돈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능할까? 그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영광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고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 입을 벌려 입에 1달러를 물고 세금을 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돈이 부족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에게 능력과 지혜가 부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때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이런 범죄를 당하고 이런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어야 합니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이 세금을 내셔야 합니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왜 세금을 내야 했습니까? 왜 그는 죽임을 당하고도 박해를 받았습니까? 세례 요한을 죽여야 합니까? 이렇게 고생해야 하나? 해서는 안됩니다.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은 작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 억울함을 느끼며 그런 대가를 치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의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조금의 억울함을 겪은 후에 모두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데 어찌 영원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영원의 영광은 값을 치르는 것뿐 아니라 값을 내지 아니할 때에도 있다 우리는 다 기꺼이 그 값을 치르기로 선택한다 죽임을 당하지 말아야 할 자는 죽임을 당하고 세금을 내지 아니할 자는 세금으로 돈을 받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합니다.

주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대로 살아라

나는 전체 챕터를 연결했고 그것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대가를 치르고, 갚아야 할 대가도 원망하지 않고 치르는데 이것이 승리요, 이것이 영원의 영광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충분해서가 아니라 그런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기꺼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형제자매들은 우리 하나님을 닮기 시작하고 주 예수님을 닮기 시작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몸에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 있으면 돈이 부족하겠느냐? 당신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시겠습니까? 원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믿지 아니하고 패역한 세대의 사람들은 영원의 영광을 믿지 아니하느니라. 우리의 현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살며 육신의 논리를 의지한다면 결코 풀 수 없는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발산하고 있다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20)

이 영원한 영광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과 자녀와 일을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선한다면 풀어야 할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자문해 보십시오. 나는 정말 영원한 영광에 관심이 있습니까? 내가 정말 그것을 믿는가 나는 정말로 그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 이 영원의 영광은 세상의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이전 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말 이해합니까? 이 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의 영광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친다면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영원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값을 치르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십시오. 본받을 줄 모르면 우리를 본받거나,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에 대한 어떤 견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사람들을 배려하여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나타난 것을 보고 예수님의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잇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나는 모세를 위하여,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복음 17:3-4)

알고 보니 베드로에게는 세상의 제도가 있었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여전히 세상의 제도였습니다. 영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에게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베드로가 사역하는 과정에서 아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합당한가? 그것도 합리적입니다. 그냥 가져 가세요.

그러나 그는 야곱에게서 온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야곱 편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 야곱이 가짜인 척 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참으로 사람의 뜻을 중히 여기므로 베드로의 후일 섬김을 예표하여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타락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뜻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은 은혜만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은 이와 같으며 이기주의의 논리체계는 인간의 의지를 따른다. 세상에서 덜 이기적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이기적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정말로 기꺼이 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과 이기심이 우리 안에서 싸우고 서로 얽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의 영광을 귀히 여기면 이기적인 논리를 이긴다. 우리가 이생에서 사람의 뜻과 이런 것들을 귀히 여긴다면 영원의 영광을 귀히 여길 길이 없고 그 대가를 치를 길도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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