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로마서-제04장-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서론
주제를 정하는 것은 문맥에 따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한 장에서 논의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장은 이전 장의 연속으로 작성되었음을 아십시오.
성경을 읽을 때 저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다른 것을 말하고 당신이 다른 것을 이해한다면 얼마나 이상할까요! 마치 내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후 당신이 이해를 표명하고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아니, 그게 당신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무슨 말인지 귀를 기울이면 계속 소통할 수 없겠죠? 나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말했다: 아니, 당신은 그냥 나를 무시. 이렇게 계속 소통하다 보면 정말 힘들 것 같아요.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많은데 가장 놀라운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없는 교회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오늘날 이 세대에 교회가 많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안 하시고 안 하신 것은 많이 하셨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은 어디를 가더라도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뿌리로 돌아가야 할까요? 즉, 당신은 당신이 누구를 믿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석가모니처럼 행동한다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예 혹은 아니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고, 이것이 제가 실천해 온 길입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성경을 읽은 후 실천하기 위해 찾은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왜 예수님을 닮지 않은 교회가 많고 믿음의 길을 걷지 않아서 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 가는지 믿음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번에 어느 자매님 집에 갔는데 그녀의 두 자녀가 제 입에서 종교 용어가 나오지도 않은 채 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언니의 아이는 왜 나를 둘러싸고 싶어하는 걸까?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고,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이 내 손을 통해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오늘 로마서 4장의 주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첫 장에서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믿음은 조금씩 자라나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믿음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정오에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생 열심히 일해서 어깨 결림과 허리 통증이 있는 큰언니가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치유받기를 원하는지 물었고 그녀가 치유받기를 원하면 자매는 말했다: 예! 나는 그녀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줬고, 이 자매에게 내가 기도하도록 인도하겠다! 그 결과 어깨와 등이 많이 풀렸다.
믿음으로 이루지 것이다
사물은 보되 유행은 보지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사물은 보되 유행은 보지 않는 것도 일종의 무지입니다. 때때로 나는 어떤 사람들을 인도하여 기도하게 했는데 그들의 몸 상태는 실제로 많이 개선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나의 몸 상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몸의 통증이 많이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어 전보다 나아졌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정말 이전보다 훨씬 낫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까? 그는 나에게 말했다 : 몸에는 여전히 통증 증상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치유되었거나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가르치고 트렌드를 관찰하는 법을 배우며 여러분의 자신감이 조금씩 커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게나 굴을 키우는 경우, 오늘 보면 여전히 어제만큼 클 수 있지만 성장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추세를 보고 믿음으로 시작하여 계속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믿지 아니함으로 짐승과 같이 사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믿지 않을 때 그는 영생의 개념이 없으며 그의 모든 목적은 이생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이 상태를 짐승처럼 사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이 사는 것처럼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짐승에게 일어난 일이 또한 일어났음이라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같으니 이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저 사람도 죽었고 호흡은 그대로라 인간은 짐승보다 강할 수 없으며 모두 허영입니다. (전도서 3:19)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왜 신령한 사람이 됩니까? 그의 편지 때문입니다. 나는 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는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는 한 그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만 본다
"로마서" 2장에 이르면 우리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계속 믿으며 하나님께서 행실대로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을 여러 번 보게 됩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보복의 결과를 볼 줄 알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사람을 행동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은 행동을 통해 사람을 심판하십니까? 아시다시피 우리가 보는 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하는 행위는 겉모습이며, 하나님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대로 사람을 판단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영계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말해도 듣지 않고 육신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실 때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따라 심판하시니 만일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다 악하면 네 마음의 생각을 따라 너를 심판하실 것이요 이 시대를 잘 살고 싶다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느냐 안 믿느냐가 사람의 삶에 일어날 일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장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3장 자신감을 근본으로 삼는다 우리 인간은 외모를 좋아하지만 본질을 파악하는 사람과 외모를 파악하는 사람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우리는 뿌리를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 몇 가지 불안한 옵션을 적어 우리가 잘못 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을 때 어디로 갔습니까? 표면을 읽으십시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의 핵심을 파악하도록 인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읽기가 어렵습니다. 즉, 읽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모든 단어를 알고 모든 문장을 발음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결과는 다양한 해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4장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근본을 파악하고 행동이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결과로 이렇게 행동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신앙의 결과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횡령을 하려고 하면 경찰이 자신을 체포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어느 날 체포되었을 때 "내가 어떻게 잡혔지? 잡혔을 때 그는 여전히 우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이 사람이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는데 그가 이것을했을 때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느 날 빨간불에 달려온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은 빨간불에 달려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다시 시도했더니 내일 빨간불에 달려도 괜찮았다. , 그 결과, 그는 어느 날 맞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충돌한 차의 속도를 시속 60km로 계산해 보자 60km를 달리던 두 대의 차가 서로 충돌했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볼보를 사고 싶다고 말합니다. 볼보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철로 만든 자동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철이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계속 빨간불을 켜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영상을 봤는데 볼보 차량의 중앙이 두 부분으로 잘려서 나오는 장면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제가 주님을 믿는 과정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두 명의 교인을 개인적으로 보냈는데, 한 사람은 이전 교회의 젊은 목사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매우 사랑하는 부부였습니다. 재판의. 내가 한 말은 아주 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을 치르는 무대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면 아래 사람들은 저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 친하고 차를 너무 좋아해서 차와 함께 망가져 버린 것은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본질과 마음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글자가 아니라 영을 중시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글자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새기고자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 1절에 말씀하신 것을 새기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지상의 모든 가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1-3) **아브라함처럼 땜납으로 이마에 의식을 태우지 말고 마음에 낙인을 찍어야 합니다. 의식이 아닌 정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법을 배우십시오
1장, 2장, 3장에서는 믿음을 기초로 이야기하는데, 4장에서는 어떤 믿음을 이야기합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주의 깊게 읽어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이고, 이 두 단어를 본받는 것은 정말 마음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모방에 의한 것입니다. 요즘은 붓글씨 연습을 좋아하는데 이제 이 붓글씨 도구는 사용하기가 너무 편해요 흰물에 담가서 쓰면 글씨가 검게 변해서 재사용이 가능해요 이거 아주 깨끗하고 거기에 검정 잉크 한 병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약간의 부주의가 사방에 퍼질 것입니다.
유류를 쓰면 유류가 되고, 구식을 쓰면 유럽식이 되고, 연식을 쓰면 연식이 된다. 카피북이 왜 있는거죠? 카피북 없이 열심히 연습하고 백지 한장만 줘도 괜찮을까요? 연습할 수 없다면 흉내낼 수 없습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불을 피워 배우기 시작하면 늙어서도 여전히 석기시대에 있고, 인생의 70, 80년대에도 여전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배운다. 수학 학습에서 우리는 하나의 매듭을 하나의 밧줄로 묶고 두 개의 밧줄을 두 개의 밧줄로 묶는 것으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한자는 고대인이 발명했지만 선생님이 어떻게 쓰는지 모두 배웁니다. 카피북도 마찬가지고 남의 서예를 베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일에서 모방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매우 슬플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를 모방합니까? 이 믿음의 길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을 본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힘이 세서 믿음의 길을 개척하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의 아들 이삭이 그를 능가하고 야곱이 이삭을 능가하고 요셉이 야곱을 능가하였다.
뿌리까지 모방하다
최근에 우리는 성경 소개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라면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빨라야 하고, 느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틀 전 홍콩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홍콩 사람들이 빨리 걷는데 이렇게 빨리 걸어본 적이 없었다.
이 길은 아브라함이 시작한 믿음의 길입니다. 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후에는 모세, 사무엘, 다윗, 솔로몬, 베드로, 요한, 바울 중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은 대대로 이어지므로 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방의 시작부터 뿌리까지 본받아야 하는데 이 뿌리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인가 행위인가?
우리 하나님은 구덩이를 많이 팠는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데, 모세가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3)
이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원래 죄인이었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제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의인으로 여기지 않으셨고, 나는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에서 살고 있고, 저주 아래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수 없습니다.
즉, 내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온 마음이 믿음이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석가모니의 관념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지 석가모니가 아니다. 나는 "성경"을 믿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해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과 행위로 인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행함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내 의견입니다. 성경을 잘 읽으십시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라
내가 한 말 중 일부는 바울이 한 말인데 나중에 야고보서를 읽었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는 말했다: 하나님, 이 구덩이는 너무 깊습니다. 야고보나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중에 나는 바울이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야고보가 한 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고 싶지 않고 바울을 본받을 뿐이다.
바울이 나에게 준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 누나를 만나면 평생 고생해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말했다 : 그럼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니? 그녀는 간절히 말했습니다. 예, 건강하게 사세요. 누가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동급생이 있는데 종교적 신념이 있는지 물었고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그의 팔은 뻗어 있었고 근육은 위축되어 있었고 그 팔은 약해져서 생수병도 들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면 당신의 팔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습니까? 팔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싶습니까? 저는 이 일을 할 뿐입니다. 나도 자랑을 잘하는데 자랑을 다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그의 팔을 잡고 5분 동안 기도했고 그의 힘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 은혜를 받는데 너희는 우리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생각하느냐? 우리 하나님은 너무 좋으십니다! 태산 기슭에서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이마를 두드리고 한 걸음으로 태산 정상을 두드린 다음 머리를 박으로 두드릴 필요가 없습니다.이 사람들은 여전히 말합니다. 오, 나는 충분히 경건하지 못하다! 그 경건은 수고한 일이고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신데도 그것을 모르십니다.
그래서 우리 남매가 오늘부터 해보기로 했어요 지난 이틀 동안 누나 집에서 살았거든요 엄마, 주님을 믿고 싶나요? 그들이 대답하는 경우: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주제는 여기서 끝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 지금 몸이 너무 불편한 거 보이시죠. 기분이 나아지고 싶나요?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들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가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 많아 병든 자가 내게 오면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실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신병자가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나아오면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오면 나도 고쳐 주겠다.
나병환자와 앉은뱅이가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고치시더라 만일 예수께서 이같이 하시면 나도 그의 본을 따라 하리라 그것을 실현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고 하나님이 능치 못하신 일이 없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항상 자백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아직 그들을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죄를 자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기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 특징은 주님,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마치 예수님이 자신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치유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나는 내가 용서받았고 주 예수께서 내 죄를 도말하셨다고 믿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퇴각시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 몸에 불법체류자고 내 몸은 성령의 전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알기에 우리의 믿음은 기초가 생기기 시작하고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믿음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병이 그 오랜 세월의 수고로 인한 것이든, 죽은 사람을 살리신 하나님이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우리 하나님이 무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보다 더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우리를 위하여 이기신 사실에 근거한 것이니 만일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고 모든 저주를 제거하실 것이요 이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계속 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성화되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와 대적과의 싸움을 시작하리니 얻지 못하였으면 얻은 듯이 행하라 범사에 이처럼 각별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이렇게 각오하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자요 약속을 받았을 때 일어나 싸워서 이겨야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한 진리입니다.
결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믿음은 한 눈에 보았고 수천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기까지 보였습니다. 4000년 전 아브라함, 3000년 전 다윗, 2000년 전 예수를 본받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사방이 에워싸여도 도처에 믿음의 길이 있고 원수에게 둘러싸여도 갇히지 아니하느니라 오늘 우리에게 이런 소망과 소망이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저것이 두렵지만 사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주 만물을 붙드실 수 있으니 이 땅의 작은 자 너와 나를 붙드실 수는 없느냐? 우리 형제자매들이 아브라함 믿음의 후손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