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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사무엘하 6장 - 내가 더욱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2023-06-30 11,054 撒母耳记下 撒母耳记下06章 撒母耳记下第六章 我必更加卑微 看自己为轻贱 人当有的态度 神看重人里面的态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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撒母耳记下06章-运约柜到耶路撒冷
  • 1 大卫又聚集以色列中所有挑选的人三万。
  • 2 大卫起身,率领跟随他的众人前往,要从巴拉·犹大将 神的约柜运来;这约柜就是坐在二基路伯上万军之耶和华留名的约柜。
  • 3 他们将 神的约柜从冈上亚比拿达的家里抬出来,放在新车上;亚比拿达的两个儿子乌撒和亚希约赶这新车。
  • 4 他们将 神的约柜从冈上亚比拿达家里抬出来的时候,亚希约在柜前行走。
  • 5 大卫和以色列的全家在耶和华面前,用松木制造的各样乐器和琴、瑟、鼓、钹、锣,作乐跳舞。
  • 6 到了拿艮的禾场,因为牛失前蹄(或译:惊跳),乌撒就伸手扶住 神的约柜。
  • 7  神耶和华向乌撒发怒,因这错误击杀他,他就死在 神的约柜旁。
  • 8 大卫因耶和华击杀(原文是闯杀)乌撒,心里愁烦,就称那地方为毗列斯·乌撒,直到今日。
  • 9 那日,大卫惧怕耶和华,说:“耶和华的约柜怎可运到我这里来?”
  • 10 于是大卫不肯将耶和华的约柜运进大卫的城,却运到迦特人俄别·以东的家中。
  • 11 耶和华的约柜在迦特人俄别·以东家中三个月;耶和华赐福给俄别·以东和他的全家。
  • 12 有人告诉大卫王说:“耶和华因为约柜赐福给俄别·以东的家和一切属他的。”大卫就去,欢欢喜喜地将 神的约柜从俄别·以东家中抬到大卫的城里。
  • 13 抬耶和华约柜的人走了六步,大卫就献牛与肥羊为祭。
  • 14 大卫穿着细麻布的以弗得,在耶和华面前极力跳舞。
  • 15 这样,大卫和以色列的全家欢呼吹角,将耶和华的约柜抬上来。
  • 16 耶和华的约柜进了大卫城的时候,扫罗的女儿米甲从窗户里观看,见大卫王在耶和华面前踊跃跳舞,心里就轻视他。
  • 17 众人将耶和华的约柜请进去,安放在所预备的地方,就是在大卫所搭的帐幕里。大卫在耶和华面前献燔祭和平安祭。
  • 18 大卫献完了燔祭和平安祭,就奉万军之耶和华的名给民祝福,
  • 19 并且分给以色列众人,无论男女,每人一个饼,一块肉,一个葡萄饼;众人就各回各家去了。
  • 20 大卫回家要给眷属祝福;扫罗的女儿米甲出来迎接他,说:“以色列王今日在臣仆的婢女眼前露体,如同一个轻贱人无耻露体一样,有好大的荣耀啊!”
  • 21 大卫对米甲说:“这是在耶和华面前;耶和华已拣选我,废了你父和你父的全家,立我作耶和华民以色列的君,所以我必在耶和华面前跳舞。
  • 22 我也必更加卑微,自己看为轻贱。你所说的那些婢女,她们倒要尊敬我。”
  • 23 扫罗的女儿米甲,直到死日,没有生养儿女。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사무엘하》 6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한 사람의 태도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며, 그것이 곧 신앙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신 거지?” 심지어 하나님의 처사에 트집을 잡으며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잘못하셨다고 여기지만,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마다 늘 ‘내가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틀리신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바로잡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묵상해 보십시오. ‘화인 사명 신학(华人命定神学)’이 존재하는 이유는, 스스로 늘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여기며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큰일 납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 제가 이것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제가 매번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마다, 매 장이 마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제 껍질은 잘 벗겨지고 또 벗겨져도 견뎌내며, 갈고 닦여 이마가 반짝반짝 빛나니 얼마나 좋습니까! 왜 껍질을 벗겨내야 할까요? 저 역시 단번에 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은 읽기만 하면 다 아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제가 읽자마자 다 안다면 매일 이렇게 자신을 갈고 닦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다윗이 날로 강성해지는 과정을 다루었고, 이번 장의 주제는 《다윗은 더욱 낮아져 스스로를 천하게 여길 것이다》입니다. 이 제목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어리석은 자들은 늘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껍질을 벗겨내듯 깊이 묵상하고 다시 읽어보니, 다윗이 더욱 낮아져 스스로를 천하게 여긴 것,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이것이 참된 지혜임을 압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천하게 여겨 보십시오. 여기에는 엄청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미련한 짐승으로 살려면 지혜가 필요 없겠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이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지혜입니까?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천하게 여기는 지혜입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거나 기분 상하게 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면 누굴 무시하겠는가?’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평소처럼 밥 잘 먹고 잠 잘 잡니다. 누군가 내 돈을 뜯어가도 괜찮습니다.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면 앞으로 고난을 덜 겪게 되고, 자신을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무시를 당해도 따지고 들며 괴로워합니다. ‘저 사람도 나한테 잘못했고, 이 사람도 나한테 잘못했다’며 억울해하는데, 그것은 늘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가 어떻게 도출되었을까요? 앞 장에서는 다윗이 날로 강성해졌다고 했고, 이번 장에서는 강성해진 후에 다윗이 더욱 낮아져 스스로를 천하게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대단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에서 다윗은 3만 명을 모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새 수레까지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한 일이 부족했습니까? 충분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치셨을까요? 이것은 정성의 양(量)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는 ‘태도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미 아주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네가 왕이 되었다고 대단한 줄 아느냐? 3만 명이나 동원했다고 대단해 보이느냐? 내게 소달구지나 만들어 태우려 하느냐? 벤츠 같은 고급 승용차라도 가져와야 할 것 아니냐!” 사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궤는 사람이 어깨에 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달구지를 끌고 옵니까? 당신이 블레셋 사람입니까?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는 것을 보고 마음에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오히려 꽤 잘했다고 여겼습니다. 언약궤의 위력이 이토록 무시무시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마치 건드리면 터지는 원자로 같고, 품에 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들여놓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오벧에돔은 이제 큰일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 화를 입었을까요? 아닙니다. 오벧에돔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지혜롭다 여겼으나 오히려 미련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훗날 다윗은 이 일을 총정리하고 자신을 바로잡았습니다. “내가 더욱 낮아져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그리하리라.” 이것이 바로 위대한 지혜입니다! 만약 그가 “내가 날로 강성해진 것은 내 공로요, 나는 대단한 존재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위해 새 수레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라고 생각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여전히 교만하여 “내가 이제 왕인데, 하나님! 제가 수레까지 만들어 드렸으니 체면을 세워드린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면 큰일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재빨리 반응하여,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장의 제목은 《내가 더욱 낮아져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대단한 줄 알았으나, 사실 하나님 앞에서 대단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가 교회를 세우는 나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식의 태도를 저는 가장 혐오합니다. 왜 싫어할까요?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필요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 계시는데, 자기가 와서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돕고, 또 나를 돕는다고 생각하며 서로 얽매여 있다면 그것이 온전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 계시며, 저는 단지 그분의 손에 쓰임받는 도구일 뿐입니다. 저는 언제나 ‘나 같은 보잘것없는 자가 하나님께 쓰임받다니, 내게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은혜를 입었는가? 조상 대대로 큰 은덕을 입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 교회를 세운다는 식의 태도를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저조차도 감히 하나님을 도와 교회를 세운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 제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도록 택함받은 이 은혜를 입다니,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이런 복을 누립니까?”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때로는 제가 여러분을 향해 조금 엄하게 말할 때도 있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 스스로를 천하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늘 기쁩니다. 여러분은 제 안의 기쁨을 결코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째려보아도 저는 집에 가서 밥 잘 먹고 잠 잘 잡니다. 나에게 침을 뱉어도 여전히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잡니다. 왜일까요?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니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화인 사명 신학의 창시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을 창시했다고 해서 대단합니까? 전혀 대단할 것 없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제 속마음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내게 어찌 이런 복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섬김이 은혜요, 사역이 은혜임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로를 내세우며 교만해져서, 자기가 회사에 큰 공헌을 하고 많은 가치를 창출했는데 사장이 어떻게 자기한테 이럴 수 있느냐며 괴로워합니다. 승진을 시켜줘도 괴로워하고, 승진을 안 시켜주면 더 괴로워하며 사서 고생을 합니다. 반대로 저는 남들이 저를 승진시켜주지 않아도 ‘그들이 무슨 이유로 나를 승진시켜 주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늘 기쁜지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에게 가장 나쁜 것은 늘 자기가 대단한 존재(한 접시의 귀한 요리)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딸과 엄마가 왜 늘 다툴까요? 엄마도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딸도 자기가 대단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둘을 합쳐놓아도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다윗의 태도는 나중에 변화되었습니다. 왜 바뀌었습니까? 그가 직접 고백했듯이,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라며 악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겸손한 태도이며, 여러분 자신이 한낱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임을 안다면 평생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손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조금만 걸리면 시험에 들고, 눈물 두 방울을 짜내며 대단한 억울함이라도 당한 것처럼 굽니다. 여러분의 기준대로라면 제가 겪은 억울함은 눈물 두 방울로 끝나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겸손해야 하는데, 하물며 작은 목사, 교구장, 셀리더에 불과한 우리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일평생 참으로 이런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이 지혜가 없으면 늘 자기가 대단한 줄 압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 지혜를 가졌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서 왜 한 사람은 열납되고 다른 한 사람은 열납되지 않았습니까?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에서 사람을 쓸 때도 능력이 없는 사람보다 태도가 나쁜 사람을 더 두려워합니다. 태도가 바르지 못하면 절대 안 됩니다. 속에 반골(反骨) 기질을 품고 있다면, 태도가 틀어진 이상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울이 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까? 태도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제사장이 한 사람이라도 더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다윗이 제사를 드렸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다윗은 충성된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잘못 행하고 있다면 깊이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사람 중심의 태도이다

제가 때때로 왜 일부러 여러분의 화를 돋우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을 한번 자극하여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보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찔러도 반골 기질이 튀어나옵니다. 겉으로는 매우 충성스러워 보이지만, 속마음 깊은 곳에는 충성심이 없습니다. 제가 살짝 자극해 보면 이 사람 속에 반골 기질이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웃사는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도우려 했고, ‘하나님도 내가 없으면 안 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치시지 않고 누구를 치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면 ‘내가 당신의 교회 개척을 돕고, 이것저것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정말이지 추호도 필요하지 않으며, 교회를 무작정 크게 키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언제 대단한 업적을 탐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베드로처럼 한 번 설교해서 삼천 명, 오천 명이 주를 믿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천 명 중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다섯 명만 건져내도 족합니다. 저는 그런 겉치레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어떻게 여길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듯이, 누가 나를 개 같다고 하면 “무슨 개입니까? 저는 개똥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나를 애완견에 불과하다고 하면 “너무 과찬이십니다. 저는 개똥 한 무더기에 불과합니다”라고 받아칩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하면 여러분이 더 이상 무슨 수를 쓰겠습니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제 비결은 아주 강력합니다. 바로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태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셨을까요? 첫째, 저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이 있어 죽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둘째, 저는 스스로를 천하게 여깁니다. 저는 왜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없고, 하나님이 왜 돈을 그렇게 좋아하시느냐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에 죽어 마땅한 자였고,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이미 어디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구원해 주셨으니, 내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 마음의 태도는 주님을 믿은 첫날부터 이미 이러한 겸손의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겸손이란 사람들 앞에서 이렇고 저런 모습을 꾸며내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자신이 한낱 사람에 불과함을 알고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었고, 화인 사명 신학을 세웠습니다. 제 말투가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저는 “여러분은 참 복을 받았습니다.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는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로부터 이런 사람은 많지 않아 5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들 같은 사람이 5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자를 찾기가 어찌 이리도 어려운지 탄식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겸손하고 비천하게 여기는 삶, 이것이 바로 제가 가진 생각입니다.

여러분, 공원에 놀러 갔다가 개똥을 밟아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개똥을 자주 밟아서 개 키우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사람은 그 중심의 태도를 보십니다. 언약궤가 웃사의 집에 머문 지 적어도 50~60년은 되었습니다. 웃사가 태어났을 때부터 언약궤는 줄곧 그들의 집에 있었지만, 그는 언약궤를 귀하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작은 헛간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아두고 그저 낡은 궤짝 하나 정도로 여겼으며, 자리만 차지하니 기회만 되면 경매에 넘겨버리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웃사의 태도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사무엘하 6:3-5)

사실 다윗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이 된 후 날로 강성해지자 몇 가지 일을 벌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3만 명을 뽑고, 새 수레를 만들었으며,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를 불러 소달구지를 몰게 하고는 스스로 일을 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잣나무로 만든 악기와 비파, 소고, 제금, 꽹과리로 연주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사람 중심의 태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드럼을 치고 유명 연주자처럼 화려하게 북을 두드립니다. 노래도 음정이 정확하고 피아노도 잘 치며 율동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겉치레를 받아 무엇하시겠습니까? 그런 것을 보고 싶다면 콘서트에 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진작에 그런 겉치레를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중심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를 천하게 여겨 사역자가 여러분을 조금 서운하게 하더라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온갖 것들을 준비했고, 그 결과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습니다. 다윗이 직접 레위 제사장 가문을 통해 언약궤를 어깨에 메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의 태도는 반드시 바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태도입니다.

아비나답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보냈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사람의 보호가 필요 없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언약궤를 지키십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이 스스로 언약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주민들을 치셨고,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약 5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보물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지만, 그 집에 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복을 받았다면 성경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으므로 그가 이러한 복을 받았다”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언약궤는 그저 집 안의 작은 헛간에 방치되어 있었고, 어쩌면 경매에 넘겨버리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비나답의 태도는 “에휴, 그냥 궤짝 하나일 뿐인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보물로 여긴 적이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그 궤짝을 대하는 태도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설탕물처럼 물과 설탕이 하나로 녹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사는 “우리 집이 저 물건을 50년 동안이나 돌봐줬는데, 저게 그냥 궤짝이지 별거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 대충 언약궤를 들어 소달구지에 실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경고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태도가 바르지 못하면 헛믿는 것입니다. 태도가 발라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가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얼마를 드리든 기꺼이 바치고자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까지 헌신했는데 저더러 더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얼마나 악한 태도입니까! 이런 목회자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주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태도가 틀어지면 손에 보물을 쥐고 있어도 그것이 보물인 줄 모르니,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아비나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그의 온 집안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위해 궤짝을 맡아주고 있다. 우리 집이 아니었다면 이 궤짝은 비바람 맞고 볕에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궤를 지키지 않았더라도 바람에 날리지 않고, 비에 젖지 않으며, 햇볕에 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궤 하나 지키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악습입니다. “우리 집이 하나님을 위해 궤를 지켜드린다”는 극히 불경한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도 “내가 당신을 도와 교회를 세워준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당장 물러가십시오. 이곳에 와서 저주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태도가 글러 먹으면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인정하는 목회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인정할 만한 그리스도인도 많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 오벧에돔과 같은 태도를 가진다면 실로 대단한 일이며, 저 역시 여러분을 매우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나답의 태도는 보나 마나 형편없었습니다.

오벧에돔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사무엘하 6:11)

웃사가 언약궤 때문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죽었는데, 여러분이라면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 싶겠습니까? 당연히 원치 않겠지요? 그러나 오벧에돔은 대단했습니다.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집에 들인 후 그는 하나님을 극진히 경외하며 생각했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이런 은혜를 입었는가? 내가 어떻게 이런 기회를 얻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집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는가, 내게 어찌 이런 복이 임했는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때 오직 오벧에돔만이 모셔 들였습니다. 사람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는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며 오직 진노만을 받게 되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온전히 받아 누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한 인자하심을 받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만을 받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기회가 다시 온다면 반드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복을 주셨습니까? 어느 방면에 복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오벧에돔의 집을 살펴보게 했을 때, 오벧에돔이 하는 일마다 번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메마르고 곤두박질친다면 그것은 복을 받지 못한 것이며, 중심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헌금을 예로 들어봅시다. 제가 예전에 어떤 사람을 섬겨준 적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은 후 그는 복을 받아 경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헌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권면했더니, 그는 “고작 200위안 가지고 그럽니까? 옛다, 가져가시오!” 하며 저를 깎아내렸습니다. 제가 밥을 빌어먹는 거지나 탁발승입니까? 됐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 훗날 그는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재앙이 아닙니까?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두려운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설령 왕이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만유의 주재이시요 심히 두려운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왜 여러분을 그토록 정성껏 섬기겠습니까? 여러분을 섬기는 것을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속에 눈물이 흐르고 아무리 육신이 원치 않아도, 저는 저의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결코 제 뜻대로 행하지 않고 사람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섬길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섬김은 은혜요, 일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꺼이 일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섬김이 은혜라는 것은 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들을 귀가 있다면 들으십시오. 만약 먹고 마시고 즐기는 세상 풍조가 좋다면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치매나 걸리십시오.

오벧에돔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마땅합니다. 그는 언약궤를 기쁨으로 집으로 모셨고, 사양하거나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비나답을 택하셨으나 온전치 못했고, 훗날 오벧에돔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비나답을 택하셨으나 잘못된 선택이었고, 이후에 오벧에돔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제사장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오벧에돔과 다윗을 본받아 하나님이 가장 귀한 보물임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두 가지 면모를 나타내십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복을 예비하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 자신의 선택입니다. 이 땅에 충성된 제사장이 하나 더 생기면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실 수 있고, 또 생기면 또 맡기십니다. 예전 공기업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의 기업에는 일꾼이 부족하여, 충성된 제사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왔을 때 이미 맡은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여 맡기실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오벧에돔은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방금 전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으로 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셔 들였습니다. 남들은 다 두려워했지만 그는 담대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지난 세월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진 언약궤를 보며 오벧에돔은 마음이 몹시도 간절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저 언약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습니다. 다윗이 웃사의 죽음을 보고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이 바로 오벧에돔이었는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을 잘 준비하십시오. 제가 “모두 와서 섬깁시다!”라고 외칠 때 “알아서 배치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런 중심이 있다면 제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여러분을 지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택하시기 때문입니다! 단, 여러분에게 바른 태도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바로잡다: 나는 더욱 낮아져 스스로를 천하게 여길 것이다

다윗은 사람을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내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하게 했습니다. 웃사가 죽자 다윗 왕조차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본래 좋은 일이라 여겼는데 시작하자마자 한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다윗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셔서 하는 일마다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이 만두가게를 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옆집도 만두와 죽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일 뿐입니다. 오벧에돔이 만두 장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유이니 따지지 마십시오. 예전에 오벧에돔이 날마다 “만두 사세요!” 외쳐도 손님이 없었습니다. “만두” 대신 “만두국”이나 “햄버거”로 메뉴를 바꿔도 손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들어오자마자 문 앞에 긴 줄이 늘어서고, 문 앞 도로에 천막까지 치게 되었습니다. 단속반도 단속하지 않았습니다. 줄을 선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2시간씩 줄을 서서 그의 집 만두와 햄버거를 사 먹고 옥수수죽을 마셨습니다. 동서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단속반원들조차 줄을 서서 사 먹어야 했고, 그의 집 햄버거를 사 가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먹으면 꿀맛이었고, 어떤 집 음식보다 맛이 좋았습니다. 다윗이 보낸 사람이 이를 보고 돌아가 다윗에게 보고했습니다. “오벧에돔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주 잘살고 있습니다. 단속반도 천막을 철거하지 못할 정도로 노점 장사가 엄청나게 대박이 났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웃 만두가게와 햄버거집은 배가 아파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고, 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시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습니다. 훗날 오벧에돔은 언약궤 주변에 경비대를 두어 남들이 빼앗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실 경비대는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은 사람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오벧에돔에게 언약궤를 다시 내어달라 하여 다윗성으로 모셔오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바로잡았습니다. 소달구지는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이고, 언약궤는 사람이 메어야 한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어떤 춤인지 아십니까? 웃통을 벗어젖히고 넥타이만 맨 채 신명 나게 탈춤을 추듯, 양다리를 좌우로 힘차게 흔들며 언약궤를 성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웃통을 벗고 넥타이를 맨다는 것은 해학적인 비유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나 다윗은 스스로를 낮추리라.’ 어떤 왕이 이렇게 하겠습니까? 예전에는 3만 명의 군사와 새 수레를 준비하여 언약궤를 맞았으나, 이번에는 자신이 친히 맨 앞에 서서 스스로를 낮추고 더욱 천하게 보일지라도 그리하겠다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다윗의 태도가 바로잡히자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왕조는 날로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인자하심을 입을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참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웃사나 아비나답처럼 되지 않고 오벧에돔과 다윗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도라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며, 한순간의 생각 차이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반면교사로 삼을 인물인 미갈의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갈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미갈은 사울의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낮추거나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대단히 높였습니다.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니 웃통을 벗고 춤을 출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정장을 갖추어 입고, 손에 창을 쥐고 말 위에 올라타 투구와 갑옷을 두른 위풍당당한 모습이어야 사진이 멋지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사진을 나란히 놓는다면 사람들은 다윗을 청소부나 미치광이로 보았을 것입니다. 청소부 아니면 경비원, 그저 보잘것없는 잡부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울을 보면 체격도 크고 잘생겼으며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겨 영락없는 모범 사진감입니다. 천안문 성루는 아닐지라도 동네 어귀에 걸어두면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머릿속의 태도가 잘못되어 속에는 온통 오물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갈은 다윗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 아버지 사울처럼 위엄 있게 굴면 얼마나 좋은가!’ 여겼습니다. 누각에서 내려다보니 다윗이 경비원이나 청소부처럼 웃통을 벗고 있으니 얼마나 망신스럽습니까! 그녀의 인식 수준은 고작 그 정도였습니다.

미갈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답지 않게 너무나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힐난했습니다. 미갈의 마음속에 이스라엘의 왕은 자기 아버지 같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체격이 당당하고 준수하며 멋져 보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쓰레기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비록 보잘것없는 잡부처럼 보였을지라도 말입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목살이 붙어 우스꽝스러운 희극배우 같았을지라도, 백성들이 보기에는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웃음을 자아내는 친근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미갈의 머릿속에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잘못된 관념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 체계입니다. 겉보기에는 훌륭한 목사 같아 보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저처럼 겉모습도 볼품없고 말투도 투박하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슨 자격과 능력이 있어 나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미갈은 사울의 속된 세상 체계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사무엘하 6:21-22)

다윗은 폼을 잡지 않았으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다윗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머릿속이 썩어버린 미련한 자였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서 무엇하겠습니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다윗과 오벧에돔은 본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비결을 배운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로 대단해질 것이며, 참된 지혜자가 될 것입니다. 미갈, 사울, 웃사는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모두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 눈에 보배로운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이번 장을 여기까지 정리하느라 공을 좀 들였습니다. 주제는 참으로 명확하며, 이전에 전했던 말씀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으로 도약했습니다. “나 또한 더욱 낮아져 스스로를 천하게 여길 것이다.” 이 말씀은 황금률입니다! 이제부터는 결코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이러한 겸손한 습관을 길러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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