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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사무엘상 31장 - 사울의 비극적인 결말!

2023-01-25 45,064 撒母耳记上 撒母耳记上31章 撒母耳记上第三十一章 命定 网罗 拣选 认识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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撒母耳记上31章-扫罗和他儿子的死
  • 1 非利士人与以色列人争战。以色列人在非利士人面前逃跑,在基利波有被杀仆倒的。
  • 2 非利士人紧追扫罗和他儿子们,就杀了扫罗的儿子约拿单、亚比拿达、麦基舒亚。
  • 3 势派甚大,扫罗被弓箭手追上,射伤甚重,
  • 4 就吩咐拿他兵器的人说:“你拔出刀来,将我刺死,免得那些未受割礼的人来刺我,凌辱我。”但拿兵器的人甚惧怕,不肯刺他;扫罗就自己伏在刀上死了。
  • 5 拿兵器的人见扫罗已死,也伏在刀上死了。
  • 6 这样,扫罗和他三个儿子,与拿他兵器的人,以及跟随他的人,都一同死亡。
  • 7 住平原那边并约旦河西的以色列人,见以色列军兵逃跑,扫罗和他儿子都死了,也就弃城逃跑。非利士人便来住在其中。
  • 8 次日,非利士人来剥那被杀之人的衣服,看见扫罗和他三个儿子仆倒在基利波山,
  • 9 就割下他的首级,剥了他的军装,打发人到(或译:送到)非利士地的四境,报信与他们庙里的偶像和众民;
  • 10 又将扫罗的军装放在亚斯他录庙里,将他的尸身钉在伯·珊的城墙上。
  • 11 基列·雅比的居民听见非利士人向扫罗所行的事,
  • 12 他们中间所有的勇士就起身,走了一夜,将扫罗和他儿子的尸身从伯·珊城墙上取下来,送到雅比那里,用火烧了;
  • 13 将他们骸骨葬在雅比的垂丝柳树下,就禁食七日。

《答疑解惑》

1. 사울의 일생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우라

  1. 사울에게는 가장 훌륭한 제사장 사무엘과 가장 훌륭한 사위 다윗이 있었지만, 손에 쥔 좋은 패를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2. 사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했기에 왕위가 그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2.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지 말라

  1.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어 평생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사람 일생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붙들 수 있는지는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는다면 결단코 어떤 원수도 우리 앞에 설 수 없습니다.

3. 결코 왕위를 너무 중하게 여기지 말라

  1. 사람은 결코 자신의 자리를 너무 중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자리를 너무 중하게 여기면 사울처럼 될 것이며, 그 끝은 비극입니다.
  2.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사람의 올무와 얽매임이 됩니다.

4. 반드시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임을 알라

  1. 자신이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이상 이생만을 위해 살지 마십시오.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살아 있는 시간이 길지 않고 인생이 짧다는 것을 알면,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5. 요약

  1. 사울의 일생에서 배우는 교훈이 다윗에게서 배우는 교훈보다 더 낫습니다! 정신을 더 번쩍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임을 분명히 깨닫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상》 31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은 사울의 비극적인 최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장의 주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사울의 비극적인 최후"라는 주제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의 일생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우라

우리가 조금만 되짚어 복기해 봅시다. 사울이 정말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사실 되짚어 본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보아온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리석어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갈 날이 고작 6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그 자리에서 돈을 세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 죽어가면서도 밀 다섯 자루를 가지고 따지거나, 자기 형제자매와 돈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암 환자도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죽음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결말이 찾아온다는 것을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그때가 되면 은행에 있는 예금을 누가 쓰게 될지 알지 못하고, 영구 소유권이 있는 집이라 해도 결국 누구의 차지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의 일생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사울은 처음에 젊은 나이에 집에서 나귀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귀를 잃어버려 사방으로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나귀를 찾는 것이 사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나귀는 찾지 못하고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울은 단지 사무엘에게 점이라도 쳐서 나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던 것뿐이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바로 그분이 택하신 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하늘에서 굴러떨어진 것 같은 횡재가 사울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까요? 왕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왕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수많은 배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늘에서 떡이 떨어져 왕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국 왕위는 사울에게 큰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떡이 아니라 커다란 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의 저자가 이 장에서 우리에게 이 사건을 전해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심한 부상을 입어 죽어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칼로 자신을 찌를 힘조차 없어 결국 다른 사람의 칼 위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들과 무기를 든 자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사울은 꽤 괜찮은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의 부하들은 그와 함께 죽기를 원했으니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사무엘상》 31:1-6)

당시 사울이 나귀를 찾다가 사무엘을 만난 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성령이 사울에게 부어져 그로 하여금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행하셔야 할 일들을 다 행하셨지만, 결국 왕위는 사울 일생의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왕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삼가 지키며 행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구하기만 하면, 사람의 일생에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위와 다른 모든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전쟁을 할 때 백성 몇 명이 흩어지자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했습니다. 비록 자기 한 사람만 남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승리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을 두려워하고 이것저것 두려워하여 온통 심리 상태가 엉망이 되었고, 결국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게다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그는 굳이 듣지 않고 하나님의 원수에게 동정심을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게 될까 늘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제가 사울의 부정적인 본보기에서 배운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동정심을 베풀었지만 저는 베풀지 않습니다. 사울은 백성을 두려워했지만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세우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새로 세우셨을 때, 만약 그때라도 사울이 회개하고 왕위를 다윗에게 넘겨주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는 다윗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더 합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때 물러났더라면 이런 비참한 결말을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의 일생에는 회개할 기회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사람의 일생에도 수많은 기회가 있는 것처럼, 어느 때든 진심으로 회개하고 현실을 직시하기만 한다면 만회할 여지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완전히, 철저히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왕위는 남아 있고 나라도 남아 있지만, 사람은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사울 왕과 같지 않은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이나 사업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저를 자주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이 온통 그런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원로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가장 훌륭한 아들 요나단, 가장 훌륭한 사위 다윗, 가장 훌륭한 선지자 사무엘이 있었지만 쥐고 있던 좋은 패를 완전히 망쳐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사울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의아해합니다. '사울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어떻게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패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다윗은 싸우러 가기 전에 블레셋 왕 아기스의 수하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싸워야 하는 엄청난 난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우셔서 그 곤경에서 건져내셨고, 그가 시글락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가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 가족들이 모두 아말렉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갔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 형세를 역전시켰습니다. 다윗에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많으며, 사울에게는 우리가 경계로 삼아야 할 부정적인 점들이 많습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은, 당시 하나님께서도 선지자도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삶입니다.

다윗이 아말렉을 쫓아갈 때, 지쳐서 전쟁에 나가지 않고 머물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윗은 괘념치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말렉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와 물건을 지키던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역사이지,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모든 사람이 한 몫씩 받게 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이 게을러져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까 봐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천군천사를 보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사울은 13년 동안이나 다윗을 추격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에 관한 소식만 들으면 군사를 이끌고 쫓아갔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에는 정신과 약도 없었기에 그는 매일 몹시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이전에는 다윗이 수금을 타서 귀신을 쫓아주어 편안함을 얻었지만, 나중에는 다윗마저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가 다윗을 추격한 이유는 오직 자신의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길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후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울은 돌아서자마자 다윗이 베푼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제가 사울이었다면 즉시 병거와 말을 보내 다윗을 데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제 말의 뜻은,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두 번째로 다시 다윗을 쫓아갔고, 다윗은 이번에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때라도 사울이 깨달아 '다윗은 내 사위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으니 지금이라도 다윗을 모셔오자'라고 했다면 늦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집에서 은퇴하여 노후를 편안히 보내며, 고문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고문위원장을 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만만을 죽이고 사울 자신은 천천을 죽였으니, 만만을 죽이는 다윗더러 전쟁터에 나가 싸우게 하고, 사울은 그 고생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와 집에서 여생을 편안히 보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중국 역사에도 왕위를 양보하는 선양(禪讓)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데는 결코 늦은 때란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어코 고집을 부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있을 줄 알았고, 그 왕위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사울의 생각에는 그 왕위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 그 왕위는 올무에 불과했고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섬기며 마지막을 배웅했던 분들에게 종종 이런 일을 하곤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그를 위해 기도하며 사망의 영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뒤돌아서서 그 사람이 듣지 못할 때 '하나님, 이분을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사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속히 데려가 주십시오." 제가 제 자신을 대하듯 여러분을 대하는 것이니 여러분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남이 나를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을 대접합니다. 여러분이 이치를 따져 물어도 저를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지 말라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서 다시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하나님의 영이 당신 위에 임하셨고,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며 하나님께 크신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셨는데도, 기어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을 추구했습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처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결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쳐 매국노 노릇을 했습니다. 배신자나 부역자 같은 처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위급한 순간마다 번번이 위기를 모면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은 비할 데 없이 좋은 것이니,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소멸시키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저는 형제자매들을 보며 가슴을 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악을 분별하고 남을 헐뜯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데는 대단한 재주를 부리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임재를 귀하게 여기는 일에는 형편없이 무기력합니다.

사울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더라면 백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 언약궤를 가져오네 마네 할 필요도 없었고, 어떤 상황에서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규정을 둘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짓이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종교적 색채만 가득할 뿐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사울은 또한 접신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세워 신접한 자들을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겉으로는 대단한 열심을 내며 오늘은 이 이단을 잡고 내일은 저 이단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세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들과 함께하신다면, 어찌 그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겠습니까? 《사무엘상》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은 평생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히 여기며, 껍데기뿐인 종교성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나 저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사람 속의 선택이 동일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 선택이 사울처럼 될지 누가 알겠으며, 여러분의 선택이 다윗처럼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사울처럼 되지 말자고 늘 경계합니다. 차라리 노자(老子)처럼 살지언정 사울처럼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릴 바에야 차라리 노자처럼 불로초 단약이나 달여 먹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동일하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명령은 《성경》에 흑백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화인 사명신학(華人命定神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읽어내고자 하는지 발견하셨습니까? 그러나 인터넷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성경 읽기나 성경공부는 흠을 잡으려 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허풍이 아니라 여러분의 지금 수준으로 읽어도 많은 문제점을 짚어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은 동일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읽는 《성경》이 개역개정판이든 NIV든, 제가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각자의 깨달음이 달라지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타락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제가 언급한 작은 부분들에 비하면 실로 빙산의 일각입니다. 물론 그들도 가끔은 승리를 거두기도 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이 평생 군마를 타고 동정서벌하며 뼈 빠지게 고생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걸핏하면 비판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옳다 여기는 자들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대단한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울 역시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으나,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여러분,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마시고, 하나님의 원수에게 동정심을 베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원수는 단순히 '아말렉'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말렉 사람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친형이니 본래는 친척 간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아말렉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을 완전히 멸하려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육신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육신의 안위를 위하고 체휼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이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착각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까?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초등학교 수준의 학력만 있어도 《성경》을 그렇게 읽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육신을 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이며, 아말렉이며, 에서입니다. '행복 모임'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온갖 명절을 챙기는 것은 그저 사람들을 교인으로 끌어들여 지옥 자식이 되게 할 뿐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다소 무겁게 들릴 수 있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두렵지 않으며 비난이 저에게 닿지도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과연 《성경》에 부합하는지는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화인 사명신학은 육신을 다루는 일에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육신을 철저히 쳐복종시키는 프로젝트와 훈련을 연속해서 진행할 것입니다. 만약 오프라인 교회라면, 저는 다음 날 모임 시간을 새벽 3시로 바꾸고 싶습니다. 미주와 유럽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배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모두가 자기 육신을 한번 세게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팔이 울리면 모두 일어나야 하고,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라도 육신을 쳐복종시켜야 합니다.

군대에 있는 군인들은 기상 나팔 소리를 들으면 무조건 일어나야 하며, 일어나지 않으면 징계를 받습니다. 물론 지금은 하나의 비유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도가 십중팔구 효력이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안일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거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길지라도, 예수님의 눈에는 마귀의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비가 마귀라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의 백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제가 사소한 것까지 다 간섭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유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는 공평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붙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는다면, 결단코 원수가 우리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십시오. 세상에는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하나님과 원수 되며 종교적 냄새만 가득하고 성도들을 두려워하는 교회는 너무나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고자 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극히 드뭅니다. 여러분은 제가 저 자신을 자랑하며 나만 잘났다고 말하는 줄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연약하기 그지없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잃을까 두려워 매일같이 살얼음판을 걷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왕위를 너무 중하게 여기지 말라

사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소멸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첫 번째 교훈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결코 왕위를 너무 중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낳습니다. 예전에 한 목사님이 담임목사라는 자리를 너무 중하게 여겨 그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제가 그 상황이었다면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아들은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자기가 일군 터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서 떡이 떨어져 그의 머리에 떨어진 것뿐이지, 사람이 일군 터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많은 형제자매들도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성도가 5만 명, 1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교회들은 연간 헌금 수입이 천문학적이어서 수천억 원에 달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걷는 헌금이 정부가 걷는 세금보다 더 많을 정도입니다. 정부는 저소득층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도 않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월 소득 3천 싱가포르 달러 이하이면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을 저소득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나눌 때, 많은 형제자매들은 그 목사의 아들이 참 좋겠다며 얼마나 폼나느냐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폼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은 암에 걸렸습니다. 그 자리는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팀을 아들에게 맡겼지만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고, 하물며 그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한 가지 습관을 들였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너무 중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점차 깨달아 간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을 때, 어떤 형제가 말하기를 "목사님은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아직 목사님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죽어도 하나님이 계시니 그런 일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자주 말합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이 사람들은 다 끝장납니다."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이 자리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떡을 제 머리 위에 떨어뜨려 주신 것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임재를 귀하게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택하셔서, 이 땅에서 제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얽매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작은 구역장 직분 하나를 맡았을 뿐인데도 그 자리를 지나치게 중하게 여깁니다. 다른 구역장이 한마디만 해도 벌컥 화를 냅니다. 이런 사람도 사울과 같습니다. 어떤 사역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역 자체를 너무 무겁게 여기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울과 같으며, 조만간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서 있든지 그 자리를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생명도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 자체도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올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의 목사가 목사의 자리를 지나치게 중하게 여기고, 사역의 리더가 사역의 자리를, 구역장이 구역장의 자리를 너무 중하게 여긴다면 사울과 같은 비극이 재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목숨처럼 중하게 여긴다면 그 사업이 여러분을 비극적인 결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직장이 일생의 궁극적인 추구가 된다면 직장이 여러분의 올무가 될 것입니다. 가정을 너무 중하게 여긴다면 가정이 비극적인 결말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저는 사실 매사에 꽤 초연한 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인이 그런 말을 쓰느냐고 의아해하지만, 이는 제가 매사에 집착하지 않고 사물을 꿰뚫어 보며, 그 어떤 것도 나를 얽매는 올무가 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울의 일생을 보면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듭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교회는 여전히 남아 있고, 화인 사명신학도 남아 있겠지만 저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제 섬김의 열매를 볼 것이며, 그 열매를 가지고 영원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이 갈등하고 번민하는 까닭은 자기의 핵심 이익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로 번민한다면 그것들을 너무 무겁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이 곧 여러분의 올무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비참한 결말뿐입니다. 물론 저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죽어도 하나님은 계시기 때문이며,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그저 건투를 빌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분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하나님의 임재를 귀하게 여기는 길로 이끄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평생 결단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그 어떤 것도 지나치게 무겁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설령 제가 세운 화인 사명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저와 큰 상관이 없으며, 저는 이런 것들이 저의 올무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반드시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임을 알라

그 이튿날에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진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사무엘상》 31:8-10)

이생의 일들을 너무 중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울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어야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을 죽인 후 그의 갑옷을 아스다롯 신당에 두고, 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으며 머리를 베어냈으니 참으로 끔찍하고 잔혹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고서도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능하고 자기들의 우상 아스다롯이 대단하다고 착각했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이 현실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신접한 자를 찾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살아가는 일에 너무 깊이 집착하는 것은 다 문제가 됩니다. 어떤 자매가 제게 자기는 집을 사지 않겠다고 했는데, 죽은 후에 물려줄 자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그런 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이것을 명확히 깨닫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히 여길 것이며, 자신의 직장이나 왕위 따위를 너무 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그런 왕위조차 없습니다. 사람이 탐관오리가 되거나 악덕 상인이 되는 것은, 까놓고 말해 조금 더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 때문이지만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맙니다.

사람은 죽음을 명확히 직시하고,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오래 살 것이라고 착각하여 이생을 위해 이것저것 온갖 계획을 세우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집을 깨끗이 정돈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라고 가르치지만, 결국에는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드시 사명을 붙들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수고스럽더라도 기쁨으로 대가를 지불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죽을지라도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사람이 죽음이 모든 사람의 결국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70세인 분이 있다면, 앞으로 며칠이나 더 살 수 있는지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사실 제가 만나본 연세 드신 분들 중에는 생사를 우리 그리스도인보다 더 달관하여 꿰뚫어 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사람은 오직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이 진정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인 사명신학에서 말하는 사명이며, 따라서 섬김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쓸데없는 일로 다투지 않으며, 종일 다툼과 갈등, 변명 속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사울 왕에게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만세"를 외친다고 해서 자신이 진짜 만세토록 살 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 무게를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대의 수많은 황제들이 단명했던 이유는 "만세"라는 그 무거운 칭호를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들의 평균 수명이 일반 백성들보다 더 짧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살아가는 이 일들을 명확히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성경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약하며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관찰하고 바라볼수록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것을 보면, 다가가서 "그렇게 하면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곁에서 '저 사람이 어느 부분을 잘못 다루었는가, 나라면 어떻게 해야 바르게 처리할 수 있을까, 바르게 된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울을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이 다윗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인물을 통해 배우는 교훈이 긍정적인 인물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정신을 훨씬 더 번쩍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수많은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심지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지 못한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가 알고 지내던, 꽤 친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는 것을 보았을 때 제게는 매우 큰 경종이 울렸습니다.

저는 종종 이를 두고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오직 주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평생 주를 사랑하고 평생 주의 도를 지키며 마침내 주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신실하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뚜렷이 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이 복된 일입니다!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이 교훈들을 마음에 새겨 영적으로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이 어떻게 그 쥐고 있던 좋은 패를 완전히 망쳐버렸는지를 똑똑히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좋은 패들을 여러분의 손에 쥐여주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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