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引言
大家好,《尼希米记》第七章的主题是“着手恢复以神为中心的生活方式”。这一章讲了几个“开始”,第一个是从被掳归回的人开始,你别嫌他穷,因为他有一颗爱神的心,亲身经历过被掳。
第二个是从人的奉献开始,因为人过以神为中心的生活,是对自己有益处的事,不需要我整天在那唠叨,而是人自己得明白。
Q1:老师,过以神为中心的生活从哪些方面去做呢?具体要如何做呢?
人一定要从心思意念开始,心里相信神所说的话,神说:“你若谨守遵行我的话,我就祝福你所做的,祝福你的银行账户等等。”人心里头得明白,不要以为过以神为中心的生活会吃亏。
你看,有人就说:“老师,我都来查经、祷告了,你还要我怎样?”如果你以为这是吃亏,是做给我的,那你可就错了,我不太需要。所以你心里要明白,得从相信开始,神的话这么说,咱们就怎么信。那咱们建立华人命定神学,是从哪开始呢?就是从读神的话开始的。
比如说,“读了耶稣基督的福音,是让瞎子能看见,瘸腿能走路。”然后我就仔细查,看耶稣是否见到一个瞎子就说:“你属灵的眼睛要打开。”有吗?没有!而是说你眼睛开了,然后他就睁开了眼睛。
生来瞎眼的,瘸腿的,他不是假瘸子,结果他真的能走路了!原来耶稣是这么干的,然后我就相信。那我们开始所做的,很多都是抄耶稣基督的,但难在哪呢?病得医治很简单,让人活出神的形像才难呀!活出神的形像,你会缺东少西吗?不会。
咱们过以神为中心的生活,第一点就是先心里得明白这话,如果你不相信,心里想:什么瞎子看见,瘸腿走路,拉倒吧!我们说穷人有福音传给他们,然后你想:我这么穷,快拉倒吧!这就坏了。我们先读神的话,然后相信神的话,相信完了神的话,然后一点一点的摸着石头过河,一点点开始试。
咱们当中试过的可多了,经历的这个、那个的!小的头疼脑热,大的灾祸,就是从相信开始得救,相信完了以后,具体的一点点落实,别一下子冲上去,这不好使,因为心里都不信!信心是一点一点攀登上去的。
但是有一些人,相信后经历了恩典,回头又过原来的生活。那你说他有没有聚会呢?有聚会,但是他的心没有聚会。
Q2:老师,“这三家的人在族谱之中寻查自己的谱系,却寻不着,因此算为不洁,不准供祭司的职任。”请问这段经文说的是什么?
我告诉你,尼希米可了不得,不洁的人怎么能做祭司呢?神说亚伦和亚伦的后裔才能做祭司,亚伦是属于利未支派的,利未支派是做行政的,所以真正做祭司献祭的,是亚伦的后裔。
那这三家族谱之中找不着,那就是没谱了,不靠谱。尼希米数来数去,祭司是一个很严肃的问题,不是说:就这么滴吧!人家有这个想法,那就来吧!那为啥他没有族谱,要跑来做祭司呢?就像很多人其实相信的是贪腐,想得到贪腐的机会,然后混到领导班子里去了,但他根本不相信党,他相信的是利益。
这几个人怎么就混进来了?我们也不知道。但是他们没逃过尼希米的眼睛,一查就发现不对,然后先暂停他们祭司的职份。等我们有了乌陵和土明,乌陵和土明就是算命的,我们也不否定你,你可能是,也可能不是,就用乌陵和土明算一下。
比如两个硬币丢在地上,如果两个面朝上,你就是祭司;如果两个背朝上,或者一个背一个面,你就是混进来的。让神来决定,说明尼希米还是蛮严谨的。
Q3:老师,偶像的心态指的是什么?比如我看到一个偶像,我就会心里暗示说有一个邪灵就在那里,然后就比较紧张。
这个事挺有意思,偶像背后有没有邪灵呢?有,但是邪灵满大街都是,不是偶像才有邪灵,然后就很害怕!因为邪灵其实到处都是,弥漫在空气当中。
那怎么办呢?不是因为有个偶像,你就害怕偶像背后的邪灵,是你害怕那个东西不干净,就像沾了一身的大便,是大家厌恶,不是害怕,因为人沾染了污秽,神就很讨厌。就像你身上沾着大便,然后到朋友家去做客,你觉得怎么样呢?人就会说:“哎呀,出去!出去!太臭了。”就是这么回事,所以别沾染污秽。
所以不是害怕邪灵要害你,当你没看到偶像的时候,邪灵也照样害你,因为人心思意念肮脏。那为什么过以神为中心的生活好呢?因为邪灵不能再整你了。
有的人过以神为中心的生活,一开始只有百分之十,后来有百分之二十,直到我们完全属于神,那邪灵拿你一点办法也没有了,所以别紧张。如果你紧张,应该紧张自己没有过以神为中心的生活,这样的话就算没有偶像,在大街上邪灵都会搞你。
这一章的答疑就到这,愿神祝福大家!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느헤미야》 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기 시작하다”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 성벽을 쌓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성벽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평생 살아가면서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평생 수고와 슬픔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면, 삶에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는 일은, 어떻게 하든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52일 만에 성벽을 다 건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팀을 결속시키는 팀빌딩 사역을 완성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52일 만에 성벽을 세울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벽을 짓기 전에는 마음속으로 불안해하며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성벽은 수십 년간 방치되어 중단되었던 공사인데, 갑자기 열정이 넘치는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나타났네!’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팔짱을 끼고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건 사역이 어떻게 완수되었을까요? 그것도 겨우 52일 만에, 마치 집 한 채 인테리어 공사하듯이 끝낸 것입니다! 보통 집 인테리어 공사도 최소 두 달은 걸리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사역을 이루어 냈고, 사람들의 마음에 비전과 소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감탄이 나옵니다. ‘누가 이런 지혜와 안목을 가질 수 있겠는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느헤미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이 일이 완성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자, 우리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회복합시다”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사역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고 외친 사람이 있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에 바벨론의 통치를 뒤엎자고 소리친 사람은 있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이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장 큰 장점은 본받고 계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강의를 들어보셨다면 “이 사람 참 재미있네, 자기가 예수님이라도 되려는 건가?”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고 계승하려는 것입니다. 본받음과 계승은 저의 평생을 관통해 왔습니다. 저는 느헤미야도 본받고 계승하며,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거인들도 본받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얼마 전 제가 양육하던 한 사람이 사진 촬영에 쓸 소재를 찾고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헤매고 있길래 제가 “가게에서 쓸 만한 것을 하나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끙끙대며 너무 느리게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터넷에서 사진 몇 장을 찾아 그에게 보내주었더니,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끙끙대며 바퀴를 처음부터 발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잘했는지를 보고 그대로 본받고 계승하면 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정답을 보고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목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몇 분 만에 찾아서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혼자서 제멋대로 일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글씨를 따라 쓰는 것부터 시작하듯이, 모든 것은 본받고 계승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혼자 글자를 새로 발명한다면 그것은 오타나 틀린 글자가 될 뿐이고, 자기가 만든 글자로 글을 쓰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움이란 남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바울을 배우고, 성벽을 쌓으려면 느헤미야를 배우며, 성전을 지으려면 모세와 다윗을 배우고, 목양을 배우려면 화인 사명 신학 교회로부터 배우십시오. 엉뚱한 길로 가지 마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까지도 교회 안에는 근본 없고 터무니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이것은 변장된 축복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교회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은 계속 맹인으로 사십시오, 맹인인 것도 좋은 것입니다. 혈루증 앓는 사람은 계속 피를 흘리십시오! 피가 다 말라 죽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 죽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회 안에 인간이 스스로 지어낸 수많은 허탄한 논리가 가득 차 있지만, 그것들은 결코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의 복음을,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기력한 복음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허구한 날 “이것은 이단이다, 저것은 이단이다”라고 정죄하며 오직 자기만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다 소멸시켜 버리고도 스스로 정통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나라 잃은 포로의 세월은 지나가야 하고, 가난과 질병의 날들도 다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삶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예레미야 시대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변장된 축복”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애가가 바로 당신을 위해 불리는 슬픈 노래인데, 거기서 여전히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있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일입니다!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회개야말로 최고의 감사입니다.
성벽을 건축하고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우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벽을 수축하는 것은 결코 최종 목적이 아니며, 교회를 건축하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진정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껏해야 동네 친목 클럽 하나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모여서 서로 좋다고 하며, 매주 금요일 저녁 구역 모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삶에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닭곰탕 끓여 오고, 나는 오리탕 끓여 오고, 너는 햄을 가져오고, 나는 과일을 가져와서’ 둘러앉아 먹기만 한다면, 그것을 어찌 하나님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배(식욕) 중심’의 삶입니다.
놀랍게도 어떤 이들은 교회를 세울 때 정말 이런 먹거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읍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그런 것은 기껏해야 곁들임 반찬이나 양념에 불과하며, 진짜 메인 요리는 하나님 중심의 일입니다. 느헤미야가 왜 편안한 술 맡은 관원 자리를 마다하고, 그 멀고 삭막한 예루살렘까지 찾아와 텃세를 부리는 토호 세력들을 상대했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가 추구한 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교회의 목표가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짓는 데 있습니다. 건물이 들어서고 문도 달렸는데,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모여들었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사람은 가득 찼는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며칠 전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어느 교회의 한 지도자가 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제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그의 조카딸이 그분을 우리 모임으로 데려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암 환자는 잘못된 생각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걸핏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변장하여 주신 축복이다”라고 하더니, 또 어떤 때는 “고난에는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하늘에서 예레미야가 그를 위해 애가를 부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변장된 축복 운운하고 있으니, 그 독이 얼마나 깊이 퍼진 것입니까? 이런 상태로는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분은 집안 대대로 몇 대째 그리스도인 집안인데,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자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등 상황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영적 비밀을 나누자면, 그리스도인을 섬기고 사역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레미야 애가와 같은 처참한 영적 상태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을 섬기려 한다면, 먼저 그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는데 여러분이 날마다 그를 위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회개하고, 자기가 잘못 믿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내가 잘못 믿었습니다”라고 인정하기 전에는, 우리는 그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하고자 했던 일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수축하고 문짝을 다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벽을 수축하고 마음의 문을 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 뛰어난 자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느헤미야》 7:1-3)
도시 관리자(영적 파수꾼)를 배치하다
요즘 ‘도시 관리자(성관)’라고 하면 이미지가 다소 부정적이라 사람들의 불만이 많고, 노점상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괴롭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도 성벽과 성문을 지키기 위해 도시 관리자(경비 파수꾼)를 배치했습니다. 밤이 되면 악한 자들이 몰래 들어와 불을 지르거나, 사람을 죽이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닭 한 마리가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에 또 한 마리가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족제비가 들어온 것입니다! 족제비는 대단해서 아무리 좁은 틈이라도 몸을 구겨 넣는 재주가 있어 쉽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족제비가 제 몸을 줄여 들어온다 쳐도 닭을 물고 나갈 때는 그 큰 닭을 어떻게 빼내는지 저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는 도시 관리자를 세우는 일의 중요성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도시 관리자(파수꾼)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파수꾼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파수꾼들은 매우 강력합니다. 저는 적어도 80%는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듭니다. 왜 2시 전에 자지 않을까요? 그때 자는 잠이 간과 심장과 폐를 회복시키는 잠이라고들 하는데, 저처럼 하면 몸이 상하지 않을까요?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몸은 여전히 강건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많은 형제자매들이 이미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귀신이 언제 찾아옵니까? 한밤중에 찾아옵니다. 참으로 얄밉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신이 내 잠을 방해하려고 해? 그렇다면 난 자지 않고 성벽을 파수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수많은 사역자들이 바로 이런 훈련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제가 과거에 그들을 그렇게 섬겼고, 이제는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섬깁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장폐색을 앓고 있는 한 자매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그 자매를 섬겼을 때 매우 큰 치료의 열매가 있었고, 그녀의 생각과 마음이 변화되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미리 그녀에게 경고했습니다. 사역에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떤 상황에 부딪힐 수 있고, 귀신이 수법을 바꾸어 속이려 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졸개 귀신이 우리에게 얻어맞고 쓰러지면, 자기 상관을 찾아갑니다. 그 상관은 분명 졸개보다 능력이 큽니다. 처음에는 졸개 귀신 하나를 보내 감시하고 억압하다가, 그 상관이 오면 병세가 더 심해지는 법입니다.
오전에 제가 그녀를 사역하고 난 뒤, 졸개 귀신이 상관을 부르러 갔습니다. 그러자 우리 교회의 평신도 사역자도 자신의 영적 상관(저)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사역자가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 “목사님, 자매의 통증이 극심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제 예상대로였습니다. 귀신이 문앞까지 쳐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시간을 잡아라, 내가 직접 사역하겠다”고 했습니다. 졸개 귀신의 상관이라 한들 우리 사역자의 상관인 저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 귀신의 상관도 제 손에 꺾였고, 설령 그 위의 더 높은 우두머리를 불러온다 해도 마찬가지로 짓밟힐 것입니다. 제 뒤에는 가장 강력한 빽,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귀신의 상관이 귀신들의 왕을 불러온다 해도 여전히 발아래 짓밟힐 뿐입니다. 귀신이 보기에 ‘아이고, 이 사람은 내가 어찌할 수가 없구나. 이 녀석은 느헤미야 같아서 어떤 수작도 통하지 않고, 철저한 도시 관리자까지 세워두었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젯밤 그 장폐색 환자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의사를 찾아가 진통제를 맞으려 했습니다. 사실 모르핀 같은 진통제는 일종의 독약과 같아서, 맞고 나면 겨우 몽롱한 상태로 몇 시간 눈을 붙였다가 다시 밤새도록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합니다. 아침에 사역자가 연락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정오쯤 사역자가 통화를 연결했고 저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며 믿음을 세워주었고, 귀신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녀는 전통 교회에 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만 들었지, 귀신을 때려잡고 그 귀신의 상관까지 박살 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더 큰 귀신이 다시 올지라도 우리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발아래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나누며 권면하는 중에 그녀가 “목사님, 제가 이제 일어나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직도 아픕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아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 생기와 힘이 넘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귀신이 얼마나 악질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때 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도시 관리자입니다. 당신이 내 울타리 안에 있으니 나를 찾아오십시오. 나는 피곤을 두려워하지 않고 밤에도 쉬지 않습니다.”
제 말을 듣고 그 자매는 감격하여 거의 울 뻔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목사를 찾겠습니까? 반면에 저를 씁쓸하게 만드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암 환자를 제게 데리고 와서 “목사님, 같이 사역합시다”라고 했더니, “그건 안 됩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서요”라고 했습니다. 사역을 외주 주겠다는 것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여러분의 영적 도시 관리자(파수꾼)이며, 저는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살고, 하나님 중심의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성벽을 다 쌓고 문짝을 단 뒤에 승리 축하 파티나 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 대적은 언제라도 우리를 흔들고 공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군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여호와의 군대가 나온 것처럼,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영적 전쟁을 치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귀신의 왕이 찾아온다 한들 예수님보다 크겠습니까?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최고의 도시 관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성읍을 맡기시면 우리는 한 성읍을 다스리고, 두 성읍을 맡기시면 두 성읍을, 열 성읍을 맡기시면 열 성읍을 충성스럽게 관리할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도시 관리자입니다. 와서 방해하고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면 우리가 다 멸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귀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교회를 세우는 목적은 형제자매들이 마귀의 괴롭힘을 받지 않고, 은혜를 입어 자유를 누리는 삶 속에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도 영적 도시 관리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저와 함께 파수꾼이 됩시다. 밤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파수꾼은 즉시 일어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귀신은 두려워 떱니다. 귀신이 발을 뻗었다가 쇠판을 걷어찬 격이 되고, 파수꾼의 발에 걷어차여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통쾌한 일입니다.
느헤미야가 보니 성읍은 광대하나 그 가운데 백성은 적고 가옥은 아직 건축되지 않아 매우 황량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곳인데도 거주하는 사람이 심히 적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획을 세워, 그 성읍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에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림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평생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어머니는 저 같은 아들을 두신 덕분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면하셨는지 모릅니다! 의사는 예전에 어머니의 허리가 좋지 않아 전신마비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비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어머니의 허리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어머니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제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결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로 인하여 어머니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제발 어리석게 살지 마십시오. 제 평생에 그 누구도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와서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제가 귀를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어떻게 주 예수님과 사람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도대체 누구관대 예수 그리스도와 겨루려 합니까?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그 누구도 주님을 향한 저의 사랑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가 죽습니다. 여러분이 아내나 남편을 몹시 사랑하는 줄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평생 마귀에게 짓눌리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습니까? 귀신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보장할 수 있습니까? 결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저는 그 누구라도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시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한 사람을 맡기시면 한 사람을 온전히 섬기고, 열 사람을 맡기시면 열 사람을, 백 사람을 맡기시면 그 백 사람을 잘 목양할 것입니다.
지금 화인 사명 신학의 문이 활짝 열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수많은 사로잡힌 자들이 놓임을 받고 억눌린 자들이 자유케 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던 자들이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제가 그 장폐색 자매에게 말씀을 다 전한 뒤, 그녀는 제게 “목사님, 저도 여러분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좋습니다. 저와 함께 기도합시다. 제가 한 마디 하면 그대로 따라 하십시오”라고 한 뒤 기도를 인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예 용사가 되기로 결단하는 기도였습니다! “나는 충성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귀신이 덤벼든다면 완전히 박살을 내어 나가떨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 성경 원문에 담긴 순수한 복음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맹인이 보고 다리를 저는 자가 걷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귀신아, 올 테면 와봐라! 귀신이 왔다고 해서 “어머나, 어쩌지?” 하며 벌벌 떠는 것은 아무런 짝에도 쓸모없는 한심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 준비해야 합니다. 온 세상에는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고자 하는 열정을 지녔으나,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백성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니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흥왕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 또한 우리를 통하여 온전히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로잡힌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누구나 들어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부흥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온 땅에 가득할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일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로부터 시작하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는 돈이 많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자들입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사로잡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할 때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가계별로 계수하여 족보에 등록하고자 했습니다. 레위 지파, 유다 지파 등 백성들을 하나하나 명단에 올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족보 명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자들이니라 (《느헤미야》 7:7)
이 명단에서 우리는 스룹바벨 외에는 아는 이름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바로 이 사람들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참으로 기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귀신에게 쫓겨 고통을 겪은 뒤에야 교회로 돌아옵니다! 삶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비로소 회개합니다. 만약 삶이 아주 편안하고 기름지다면 회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에게 죄가 있고 저주 아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당신이나 죄가 있고 저주를 받았지!”라며 쏘아붙일 텐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이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귀환자들은 7080년 전에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한 시기는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약 8090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스룹바벨 시대에 마땅히 끝마쳤어야 할 일이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룹바벨부터 느헤미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백성들은 한때 격려를 받아 열정을 품고 “성벽을 짓자!”며 달려들었지만, 결국 중간에 흐지부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또 누군가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삽시다”라고 사람들을 모아보면 고작 서너 명뿐이었고, 나중에는 한두 명으로 줄어들다가 결국 자기 혼자만 남아 흐지부지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룹바벨부터 느헤미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들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주로 스룹바벨 당시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룹바벨 시대에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귀족과 관원들은, 성경에 기록된 이 명단의 인원들을 다 합치면 4만 명이 넘었습니다. 4만 명이 넘는 인원이 성벽 하나를 쌓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해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단 52일이면 끝낼 일이었는데, 스룹바벨부터 느헤미야 시대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끝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스룹바벨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논리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아직 성전과 성벽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미루고 또 미루다가 결국 느헤미야가 올 때까지 지체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답답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쩌다 이 사역을 흐지부지 망쳐버렸고 열정을 다 잃어버렸을까요? 마음속에 오직 돈 벌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선순위를 분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우선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먼저 출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일하고 돈을 벌다가 장폐색에 걸리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겨 큰돈을 날리거나, 사업을 하다가 또 다른 풍파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성벽을 건축하든 교회를 건축하든 마음에 믿음이 없으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 가지 교훈을 결코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생업을 가로막으시겠습니까? 하나님 중심의 축복된 삶을 사는데 돈이 부족하겠습니까?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포로로 사로잡혀 가겠습니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억눌림을 당하겠습니까? 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건대, 이 세상에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좋고 더 든든한 배경(빽)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절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죽음으로 치닫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마십시오. 죽어라 일만 하다가 정말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면, 다윗의 왕국이 심히 견고해지고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쳤던 것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원수에게 사로잡혔던 뼈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놓고서 왜 또다시 사로잡힐 짓을 하려 합니까? 제가 간곡히 권면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 중심의 삶이 포로 된 자들로부터 시작됩니까? 그들은 고통의 쓴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고통을 금세 잊어버립니까? 어찌하여 나라 잃은 노예 생활을 겪어놓고 또다시 노예가 되려 합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기이한 일입니다.
저는 수많은 목사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예전에 그들에게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교회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나누었더니, 어떤 목사님은 “당신이 말하는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많은 교회들이 전하는 믿음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 체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하는 목사 자신도 암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리며, 심지어 성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고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고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뉴스에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의 소식이 나왔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동 성추행 혐의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하고 악합니까? 그 사람도 복음주의파 출신이었습니다. 저는 복음주의파의 연약한 부분에 대해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강력한 능력을 지닌 복음을, 그저 마음의 평안이나 찾는 ‘대승불교’ 같은 종교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아, 괜찮아, 사로잡혀도 다 괜찮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포로에서 돌아왔다면,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고, 성전 중심의 삶을 회복하며, 사람들을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는 인생의 덫에서 구원해 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먹고사는 일(생계)을 도모하던 삶에서 영생을 도모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생계를 위한 삶에서 영생을 위한 삶으로 바뀌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것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어 포로 된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다가는 계속 사로잡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명단을 다 정리하고 계산해 보니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이었고, 그 외에 노비가 7,337명이었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말, 나귀, 노새, 낙타의 수까지 계수해 보니 실로 상당한 규모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풍성함을 다시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의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의심하지 마시고, 성경 그대로의 순수한 복음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사람의 헌금(봉헌)으로부터 시작하다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다릭과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 (《느헤미야》 7:70-72)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사람의 재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도 있습니다! 헌금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헌금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히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도, 헌금 이야기만 나오면 “하나님은 돈이 부족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푼돈 따위 필요 없으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 부족함이 있느냐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헌금(물질의 헌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 깊은 체험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진리를 배웠습니다. 초창기 개척 시절에는 헌금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다들 가난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많이 헌금하는 사람이었고, 먹는 것, 마시는 것, 쓰는 것을 포함해 교회의 모든 재정을 제가 다 감당했습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통닭, 구운 오리, 소고기 장조림, 소시지 같은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했더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효과가 있었을까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저 공짜 밥이나 바라는 먹보 무리를 모으는 데는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제 자신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헌신하고 대접했는데 왜 저주를 받았을까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통닭, 오리고기, 소고기로 끌어모았기 때문입니다. 통닭으로 사람을 유인해서는 안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무엇으로 유인하느냐에 따라 모여드는 존재가 달라집니다.
그 후 저는 깊이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사람들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세웠을 때는 저 혼자 헌금하고 다른 사람들은 와서 먹고 마시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통닭과 오리고기에서 도시락으로, 도시락에서 과일 한 접시로, 과일 한 접시에서 생수 한 병으로 바꾸었습니다. 심지어 그 생수 한 병을 마시려 해도 동전 1위안을 넣게 했습니다. 제가 2마오(0.2위안)에 도매로 떼어온 생수였지만, 그들은 1위안을 넣고 마셔야 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사람들을 모두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헌신자로 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어찌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공짜 밥이나 얻어먹으려 하지 말고 밥은 집에서 배불리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2마오짜리 물을 1위안에 팔아 이득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를 세우는 것은 헌신할 줄 아는 사람들을 훈련하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깊이 회개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앞장서서 본을 보이며 헌신했습니다. 그는 “나 혼자 다 드릴 테니 여러분은 와서 먹고 마시고 쓰기만 하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헌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헌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 공동체에는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하고 싶다고 해서 제가 무조건 그 자격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느헤미야 시대보다 더 엄격합니다.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바르게 헌금하여 온전한 축복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까? 결코 손해 보지 않습니다! 드리는 마음가짐이 비뚤어져 엉망으로 헌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헌금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드림이 결코 손해가 아님을 압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감사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빚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자체를 감사해야 합니다. 집안에서도 극도로 이기적이고 게으르면 관계가 좋을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개똥처럼 무시당할 짓을 하면서 남들이 자기를 존중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물질적 헌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됨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사람이 복을 받는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굳은 규칙을 만들어 여러분의 헌금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헌금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여러분이 복 받는 길을 결코 막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짓기 시작할 때도 백성들의 자원하는 예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할 때도 헌금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의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도 있습니다! 드림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바로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역자로서 사람들을 이끌며 목양하고 있다면, 제 권면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지금까지도 많은 목회자들은 헌금 설교를 할 때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헌금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민망해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헌금된 돈이 자기 주머니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도들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훈련하여 축복의 통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엉뚱하고 그릇된 길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헌신과 드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활동했던 또 다른 선지자 말라기 역시 온전한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그는 성벽을 온전히 재건하고, 백성들의 결속을 다졌으며, 하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본격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멘!
이번 성경공부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