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에는 지혜, 우매함, 오만함 시리즈의 여섯 번째 강의인 “지혜자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를 전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사람은 키가 작을 수는 있어도 대놓고 키가 작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키가 작다고 말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사실 사실대로 말한 것이지만, 그 사실이 덕을 세우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이 문을 봐라, 왜 이렇게 넓고 낮게 만들었냐? 뭉툭하고 뚱뚱해서 보기 흉하다”라고 말했는데, 옆에 마침 키 작고 뚱뚱한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참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람이 미련할 때 “당신 참 미련합니다”라고 말해주면, 그는 듣기 싫어하고 듣고 나면 괴로워합니다. 미련할 수는 있지만, 미련하다고 말해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그르쳤을 때 “네가 일을 잘못 처리했다”라고 말해주면 매우 언짢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알게 되겠지만, 지혜자의 말씀은 마치 찌르는 채찍(소 모는 막대기)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찌르는 채찍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찾아보니 소를 몰 때 쓰는 도구였습니다.
소의 고집이 한번 발동하면 어떻게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에 뾰족한 침이 달린 찌르는 채찍을 써야 합니다. 찌르면 아프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소를 상하게 하지는 않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이 찌르는 채찍은 누구를 위해 예비된 것일까요? 바로 고집불통을 위한 것입니다. 트집만 잡고 억지 부리는 사람, 완고한 나귀 같은 자들은 쇠고집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과 같아서 정말 그렇습니다. 지혜의 말씀을 듣고 나면 “세상에, 찔렸다, 찔려서 너무 괴롭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동의할 수 없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사실 지혜는 원래 그런 것입니다. 당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지혜는 여전히 지혜입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동의하지 않아도 지혜는 그 자리에 있고, 사물의 발전 법칙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합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은 기뻐하시나 보죠?”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그것은 사실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진리는 듣기 싫어하면서도 고난을 겪는 것은 사서 하니, 이것이야말로 참 해괴한 일입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암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암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암 환자를 섬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의 절친한 친구가 암에 걸렸습니다. 저는 큰 열심을 내며 “형제여, 내가 섬겨줄게”라고 했습니다. 결국 지나치게 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를 섬겼을 때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찌르는 채찍을 들이댈 용기는 없어서 점진적으로 섬겼고, 점차 호전되었습니다. 호전되자 저는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암이라는 것은 저주에 속한 것이다. 절대로 저주다.”
그에게 성경을 찾아주었습니다. 성경을 다 읽고 나니, 그 친구도 성경을 폈습니다. 그가 편 성경 구절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을까요? “까닭 없는 저주는 임하지 아니하느니라.” 국어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임한 것은 절대로 까닭 없는 저주가 아니며,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뜻인데, 그는 단지 ‘임하지 아니하느니라’만 읽은 것입니다. 임했다면 다 까닭이 있어서 임한 것인데 말입니다.
결국 그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제가 참 미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찌르는 채찍을 쓸 수 있지만, 때로는 쓸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쓰고 난 후에 그것이 오히려 당신을 찌르는 가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몇몇 목사님들이 저를 찾아와 우리가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설명하자 그분들은 너무 힘들겠다고 느꼈고, 저는 매우 말을 아껴야 했습니다. 어떤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스스로를 절제해야 했습니다.
그중 6년 동안 암 투병을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예를 들어 대놓고 “그것은 미련한 일이며, 사역을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해봤자 논쟁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온갖 설명을 늘어놓을 수는 있어도 설명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일을 그르쳤다면 여전히 그르친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 좋아하지만, 그런 말을 많이 들으면 미련해집니다.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주변에는 아첨하는 자들뿐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다가와 당신의 비위를 맞추고 기분 좋게 해 주어 유익을 얻으려 할 뿐입니다.
때로는 스스로에게 속아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모를 수가 있습니까? 능력이 없으면 그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무 유익이 없고, 듣기 싫은 말이 도리어 큰 유익이 됩니다.
예를 들어, 상하이 사람들이 저를 ‘새끼 고슴도치(가시 돋친 놈)’, ‘짐승 같은 놈’이라고 욕했습니다. 왜 나를 욕했을까요? ‘아, 내게 정말 고슴도치 같은 면이 있구나. 그렇다면 정말 고쳐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형제자매 여러분, 제 어느 부분이 고슴도치 같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왜 제가 고슴도치 같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깊이 반성하고 나서 다시 찾아봬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수년 동안 하면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만 꺼내면 버럭 화를 냅니다. “누구더러 하는 소리야? 누가 고슴도치라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늙은 고슴도치지!” 얼마나 듣기 싫은 소리입니까? “내가 고슴도치다”라는 말은 욕설이니 듣기 좋을 리 없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고집통이(트집쟁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찾아보니 고집 센 나귀를 뜻하는 욕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것이 대단한 진리입니까? 그런 진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혜의 말씀도 이와 같다는 점입니다. 만약 당신이 날마다 ‘내가 어느 부분을 잘못했지?’라고 깊이 생각한다면, 고슴도치라고 욕을 먹든 고집통이라고 욕을 먹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습니다. 욕하면 욕먹는 것입니다.
자신이 미련한 사람인지 깊이 반성해 보십시오. 어쩌면 정말로 고집통이이고 정말로 고슴도치일 수도 있습니다. 제 논리를 들으면 “이게 무슨 논리인가?” 싶겠지만, 지적을 받았으면 그 고슴도치 같은 가시를 뽑아버리면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만큼 고치면 됩니다. 10%의 고슴도치 기질이 있다면 그 10%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마귀도 실수하지 않으며, 오직 우리만 늘 실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늘 실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리게 될까요?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우매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하시는 말씀은 고슴도치라는 말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찌르는 채찍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몸에 저주가 왜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금칠할 생각 말고 찌르는 채찍으로 찔러서 얼굴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들을 뜯어내고, 우리 뼛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히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찌르는 채찍이 여전히 채찍으로 느껴지겠습니까? 마음을 부드럽게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돌아본다면, 그 찌르는 채찍은 더 이상 아프게 찌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 채찍이 그토록 아프게 찌르고 고통스럽게 느껴질까요? 알고 보면 자신이 고집통이이자 완고한 나귀처럼 제 갈 길로만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우리를 찌르지 않으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총명한 자는 자기 뜻대로 걸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물의 본래 법칙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저는 우리 중에서도 종종 이런 사람들을 봅니다. “목사님, 전 목사님이 하신 말씀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사실 제 마음속으로는 ‘당신이 동의하고 말고 할 수준이나 되는가, 수준이 한참 떨어지면서 무슨 동의를 논하는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말했지만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뛰어나신가 봅니다. 아니면 더 뛰어난 사람, 당신이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십시오”라고 답하고 돌아섭니다. 속으로는 ‘마음대로 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는지조차 모르고,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대개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진리이겠습니까? 진리는 결코 평범한 대중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중의 안목과 수준이 딱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왜 자본은 대중을 부추(희생양)처럼 여길까요? 본래 부추이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부추로 태어났으면서 요리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까? 자본은 사람의 우매함을 철저히 연구했습니다. 정부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철저히 연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이런 철부지 같은 무리를 통제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는 대개 대중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추의 신세에서 벗어나 요리 재료가 될 수 있을까요? 자라나면 잘리고 또 자라면 잘리는 부추의 삶을 끝내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의 우매한 것들을 제거해 줄 그 찌르는 가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에는 거대한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거대한 승리는 우리 모든 형제자매가 더 이상 저를 찌르는 채찍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가 그 채찍을 자신에게 찔러 넣고 스스로 자기 문제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자각하지 못하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 말도 참 명언입니다. 스스로 죄를 깨닫지 못하면 고생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저는 말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말해봤자 제가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바보같이 일일이 말해주었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합니다. 고생을 좀 더 해보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의 예전 목양 방식은 옳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예전에는 틀렸지만 지금은 부드러워졌고, 잘못된 것을 알면 즉시 고칩니다.
이제는 총명한 사람에게만 총명한 것을 말합니다.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상대방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 각성의 단계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를 좀 분석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분석해 주면 얼굴색이 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 되겠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서둘러 수습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깨닫기만 해도 이미 절반은 해결된 것입니다. 왜 많은 형제자매가 거대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말합니까? 이미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이미 절반은 해결되었습니다. 지혜자의 말씀은 더 이상 당신을 아프게 찌르는 가시가 아니며, 당신 또한 고집 센 나귀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결과는 자신의 갇힌 생각과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인식 수준이 매우 낮은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매우 강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자존심이 강한지 돌아보십시오. 인식 수준이 낮은 사람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매우 취약합니다. 인식을 높인다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식이 맞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입니까? 만약 우리의 인식이 온통 우매한 것들뿐이라면 정말로 조정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9-14)
기도
하나님, 오늘 주의 지혜로운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 깨워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행하사 우리가 깨어나 스스로 죄를 자각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안에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며 지혜와 총명을 주사 우리로 전도자가 되게 하시고, 지혜를 얻어 묵상하고 연구하며 선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의 말씀이 기쁨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완고함과 거역하는 태도에서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하나님, 주의 말씀이 더 이상 찌르는 채찍으로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의 말씀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우매함에서 벗어나 주의 은혜를 풍성히 받게 하시고, 평생토록 주님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솔로몬은 전도서의 마지막 장을 쓰면서 한 문장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바로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찌르는 채찍 같을까요? 그는 고집 센 나귀와 가시 돋친 고슴도치 같은 자들은 너무나 많은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적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말을 마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헛되고 헛되다면서 궁전은 왜 그렇게 많이 지었습니까?”라며 트집을 잡으러 왔을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따지러 온 것입니다.
그의 아들도 아마 그런 꼴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은 고집불통이어서 평생 늙을 때까지, 어릴 때는 작은 고집통이, 늙어서는 늙은 고집통이였습니다. 어릴 때는 작은 나귀, 늙어서는 늙은 나귀였습니다. 감당이 되겠습니까?
사람은 늙고 나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어릴 때도 못 고쳤는데 커서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고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걸핏하면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만 붙들지 마십시오. 바보 같은 짓입니다.
늙어서 고생하는 날이 닥치면 돌이킬 힘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정말 막막해집니다. 가끔 깊은 탄식이 나옵니다. 그러니 젊을 때,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서둘러 창조주를 기억하고 지혜를 많이 쌓으십시오. 살아가다 결국 또 하나의 치매 환자가 되는 결말을 맺지 마십시오.
제 말이 뼈아프게 들리겠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를 아무리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점차 자신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아직 그 나이에 도달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아무리 동의하지 않아도 당신은 또 다른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도 젊었을 때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늙어서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유전자가 그대로 있으니 어떻게든 닮게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보니 늙어서는 고칠 수가 없는데, 젊은이들은 과연 이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평생 거두는 것은 모두 자신이 심은 것입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8)
나이 들어서 쉽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심은 대로 거두며, 자신이 심은 것은 반드시 자신이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탄식하게 됩니다. 젊어서 나귀였던 자는 늙어서 늙은 나귀가 되고, 젊어서 꾀가 많던 자는 늙어서 노회해집니다. 젊어서 가시였던 자는 늙어서 아주 단단하고 억센 가시가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을 전도자로 훈련하고, 지식과 지혜를 가진 자로 훈련하여 지혜의 말을 들을 때 기쁨의 말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로운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찌르는 채찍으로만 느껴진다면 우리는 끝장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훈계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권면을 마친 후 일의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마지막은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다가 늙어가는데 어찌 고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하는 말이 여러분에게 작은 충격이 되기를 바라며,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까? 그것이 축복과 저주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가 보십시오. 축복과 저주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정말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이 저에게 “유 목사님, 전해주신 내용이 너무나 훌륭하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많은 사람을 괴롭히던 문제들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에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있는데, 오늘 저주를 심는다고 해서 내일 당장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하나 심고, 내일 하나 심고, 또 하나를 심다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거두기 시작합니다. 수십 년 뒤에 거두기 시작할 때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자신이 심은 것은 자신이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의 결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세상은 축복과 저주의 분명한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것은 반드시 저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지혜의 말씀으로 자신을 찔러주어야 결정적인 큰 찔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압살롬은 얼마나 영악했습니까? 어머니는 공주였고 아버지는 다윗이었습니다. 다윗도 대단한 인물이었고 어머니도 영특했으니 압살롬은 그야말로 비범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저주를 심었습니다. 압살롬은 저주를 심어 결국 다윗의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찬탈한 후 그는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일깨우던 가시 같은 경고의 말들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뇌가 흐려지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기 시작하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결국 더 큰 찔림이 찾아왔습니다. 큰 찔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렸을 때 사람들이 창(큰 가시)으로 찔렀습니다. 그 가시는 지혜자의 말과 같아서 찌르는 채찍과 같았습니다. 지혜자의 말이라는 채찍은 압살롬에게는 그저 간지러운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렸을 때 그 큰 가시가 한 번에 그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전의 가시가 통하지 않자 뒤에 온 큰 가시는 확실하게 통했고, 그의 인생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저주를 심고 내일 저주를 심어도 당장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이 닥칠 때는 목숨을 앗아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니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문제가 다시 도지는 것을 볼 때, “목사님, 지난 10년 동안은 아무 문제 없었는데 왜 갑자기 다시 문제가 생길까요? 1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지금 이럴까요?” 같은 미련한 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입니다. 당신이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단지 너무 지나치게 현실에 집착하며 먹고 마시고 쓰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진리입니까? 그것은 우매함입니다. 지혜 시리즈의 첫 번째 강의가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다”였습니다. 다들 우매하여 그저 먹고사는 삶만 윤택해지기를 바랍니다. 죽기 전까지는 자기 자식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물론 배움이 부족한 시골 아이가 이를 통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운(사명)이 좋아서 이를 꿰뚫어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2장을 쓰면서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과 같아서 들을 때는 불편하지만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지혜, 우매함, 오만함에 대한 지난 강의들을 정리해 보면 전부 가시와 같아서 저 역시 심하게 찔렸습니다. “어떻게 찔렸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6편의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살갗이 한 꺼풀 벗겨지는 듯했습니다. 이 찌르는 가시들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다
X선을 찍어보면 심장은 다 왼쪽에 있습니다. 제가 X선을 찍으러 가서 의사에게 “심장이 어느 쪽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왼쪽에 있습니다. 그걸 굳이 묻습니까? 바보같이, 당연히 왼쪽에 있죠”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매한 짓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다는 것은, 원래의 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래 우리 뜻대로라면 그렇게 행동했겠지만, 지혜의 뜻에 따르면 이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매자는 마음이 왼쪽에 있는 방식대로 행하지만, 지혜를 따르면 사람의 뜻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권자가 당신에게 분을 내면, 내 뜻대로라면 당연히 그와 따지고 들 것입니다. “당신 말 중에 내가 틀린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따지지 마십시오. 따지고 나면 손해를 보니 윗사람과의 관계를 잘 풀어야 합니다. 또한 구덩이를 파는 자, 담을 허무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 위험을 알아야 하고, 도구가 무뎌졌으면 도구를 잘 다듬고 날을 갈아야 합니다.
철 연장이 무뎌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는 법이니, 이것이 다 지혜가 아닙니까? 일을 너무 느리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참 묘해서 이런 지적이 다 찌르는 가시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우매함이 있다면 일 처리가 늦을 수는 있지만 남이 늦다고 지적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일을 그르칠 수는 있지만 남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찌 된 사람입니까?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전도서 10:12-13)
우매한 자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다 이렇습니다. 말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니 고생만 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제가 얼마간 전했던 말씀들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습니다. 뜯어고칠 수 있는 만큼 돌이키십시오. 이 말씀이 언제나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게 하십시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듣기에 찔리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처에 소금을 뿌립니까?”라고 반응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혜자는 죽음을 마음에 둡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습니다. 이 말이 귀에 들어옵니까? 들어오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평안히 안식하십시오”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는 날이 사는 날보다 나은 것은 세상의 수고를 그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해 보십시오.
전문 의사가 “당신은 살날이 6개월 남았습니다”라고 해서, 당신이 그 사람에게 “당신 살날이 6개월 남았습니다”라고 말하면 그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당신 살날이 6개월 남았소”라고 하면 당장 뺨을 후려칠 것입니다.
그것은 가시로 찌르는 정도가 아니라 뺨을 맞는 일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기록한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저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언짢아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 제 머리가 맑아집니다.
‘훗날 내가 저 관 속에 누울 때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며칠 전 한 목사님이 흥미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유 목사님, 훗날 목사님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정해 두셨습니까?” 후계자라니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가 죽은 뒤에 교회가 어떻게 되든 망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며 웃으시더군요. 그것은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관여하실 일이니 저는 맡기면 그만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까지 신경 쓰겠습니까? 저는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쉴 텐데, 쉬면서까지 남들의 수고에 참견할 수도 없고, 제 짧은 안목으로는 정확히 볼 수도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마음에 담아둔다 한들 제가 하나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는 것이지, 제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택함 받은 것은 은혜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분명히 예비하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병원에 가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해 보십시오. “무슨 짓이야? 나를 저주하는 거야?”라며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우울증에 걸립니다. 살아있는 것에만 집착하면 비참해집니다. 제가 관찰해 보니 저처럼 생사를 초탈한 사람은 오히려 잘 죽지도 않고 오래 삽니다. 반면 지나치게 현실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너무 심각하게 살아갑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돈이 끝없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50세까지 산다고 계산해 보면, 100세부터는 몸이 쪼그라들고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 부품, 내일은 저 부품을 갈아야 하니 마치 5km 달릴 때마다 대공사를 해야 하는 고물차를 모는 꼴입니다.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60대에 ‘150세까지 살아야지’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져 서둘러 돈을 벌어야 합니다. 암 투병을 몇 년씩 하면서도 15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돈을 벌려고 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것은, 죽고 나면 돈 쓸 일도 없고 세상의 수고를 그치며 이전의 염려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 말이 오해를 산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80일 금식 기도를 택할 것이다”라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실천하지 못했고 아마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니 그런 길을 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알아듣고 “세상에, 자살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80일 금식 기도를 할 마음이 있다면 자살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금식 기도 2~3일 만에 회복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언젠가는 떠나야 하며 늦게 떠나는 것보다 일찍 떠나는 것이 낫습니다. 침대에 누워 수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거나 휠체어에 의지하다 떠나는 것보다, 건강할 때 깨끗하고 깔끔하게 떠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총명하다면 장수를 구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떠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이 말도 알아듣는 사람에게 해야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면 온갖 줄을 주렁주렁 꽂고서라도 살려고 발버둥 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꽂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
사람은 자신이 한낱 인간에 불과함을 모릅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셨는데 하나님은 손가락 하나로도 수많은 사람을 굽게 하실 만큼 전능하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뒤틀린 사람을 내가 기어이 곧게 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펴놓으면, 하나님이 다시 구부리시고, 내가 또 펴면 하나님이 다시 구부리십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대적하며 살아가는 꼴이니 그것이야말로 지나치게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일들을 관찰해 보니 실상은 다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라보면서 ‘일단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잘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환자를 보고 ‘아, 죽을 때가 되었구나’ 싶으면 굳이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맙시다. 임종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만약 때가 아니라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오히려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며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암 환자를 두고 예전에 3시간씩, 심지어 20시간씩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제가 어떻게 쫓아내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억지로 펴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도 있고, 악을 행하면서도 장수하는 악인도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법칙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를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도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한 영혼을 열심히 목양하고 있는데 제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와 판단(이치)을 분별하라
때와 이치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사업을 할 때도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안 됩니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 HP에서 작은 자판이 달린 기기를 내놓았고 저도 써보았습니다. 블랙베리라는 회사도 작은 화면에 자판을 달아 출시했고 저도 써보았지만 결국 다 망했습니다.
애플이 물리적 자판을 없애고 화면 터치 자판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때와 이치를 장악했습니다. 그러자 3G 통신망이 보급되면서 수많은 거대 기업이 탄생했습니다. 지금은 통신업계가 힘을 쓰지 못하고 3G에서 5G에 이르기까지 기세가 꺾였습니다.
통신업은 어렵지만 화웨이는 일찍이 전환하여 전화위복을 이루었습니다. 이전의 네트워크 거인에서 스마트 자동차, 스마트폰, 반도체 칩 분야로 전환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성취되는 때와 이치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다면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때와 이치가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무거운 짐이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저는 때와 이치를 분별하는 삶에 대해 많이 전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수고하는 중에 자신이 얻은 것을 누려야 합니다. 996(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근무), 007로 일하며 찌들어 사는 사람들을 보며 저는 그들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거의 모든 직장인을 뛰어넘었습니다. 일을 매우 열심히 하며 이는 조금의 과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고 중에 누리는 제 방식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세뇌하려 든다고 여깁니다.
우리 중에도 제가 세뇌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수고 중에 누리지 못하면 무엇 때문에 일합니까? 학창 시절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괴롭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저는 아주 편안하게 공부했습니다. 일할 때도 저는 누리며 일합니다. 누리지 못한다면 무엇 하러 일하겠습니까? 제가 일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다면 다들 부러워할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제 모습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여유롭고 당당하게 일하는가? 긴장하지도 않고 완급을 조절하며 일도 빠르다.” 과장이 아니라 제가 혼자 생산해 내는 콘텐츠의 양은 어떤 교회의 목사 열 명이 모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백 명이 모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저는 많은 일을 해냅니다.
어떤 이들은 시기합니다. 컴퓨터,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인테리어까지 수많은 일을 해내면서 교회 사역까지 훌륭하게 이끄니 약이 오르는 것입니다. 저는 수고 속에서 누리기 때문입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쓴 오이 같은 표정으로 일하는데 어떻게 일이 잘되겠습니까? 일하면서 누리지 못하고 매사에 스트레스만 받는다면 일을 할 줄 몰라서 그런 우매함입니다.
일을 할 줄 모르는 것은 비극입니다. 누리지 못하고 엉망으로 처리하는데 어찌 누림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때와 이치를 분별하는 것은 일을 성사시키는 비결이지 목숨 걸고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때와 이치를 분별하는데 어찌 삶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남들이 약이 오를 만도 합니다. 저와 치열하게 경쟁하려 들면 결국 제 페이스에 말려들고 맙니다. 그렇다고 저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원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뇌암에 걸린 목사님을 섬긴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왜 뇌암에 걸리셨습니까?”라고 물으니 “목사는 일주일에 하루밖에 못 쉽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대형 교회의 훌륭한 목사님이시지 않습니까? 저는 20대 때부터, 아니 중학생 때부터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지만 뇌암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잠을 잘 잤습니다.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잔다고 타박했지만, 제가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주말 내내 공부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약 오르는 일 아닙니까? 주말에 다음 주 공부할 내용을 다 읽어두었으니 수업 시간에 자지 않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루는 사람들에게 일찍 자고 푹 쉬라고 해놓고, 저는 누웠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프로그래밍을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결과물을 올려놓고 “내가 만든 것을 보라”고 하니 사람들은 “우리는 다 자라고 해놓고 혼자 일하셨습니까!”라며 성을 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아끼고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십니다. 이 말도 듣기에 꽤 약이 오를 수 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살면서 하늘을 탓하고 땅을 탓하고 별과 달을 탓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십니까?” 어딘가 잘못된 말 같지 않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희락)입니다. 일을 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면 하나님이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사역과 일을 너무 무겁게만 여겨 삶에 자유가 전혀 없습니다. 매일 먹는 것에만 집착하고, 살아남는 것에만 집착하며, 손에 쥔 일에만 짓눌려 살아가니 언제나 스트레스가 산더미(亚历山大, 알렉산더) 같습니다.
하나님이 차라리 당신의 이름을 ‘알렉산더(스트레스 산더미)’로 바꾸어 주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알렉산더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인생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인생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말없이 가만히 있어 보여도 저는 삶의 이치를 명확히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걸핏하면 남 탓을 하고 핑계를 대며, 일을 그르쳐도 고치거나 조정하려 하지 않고 때와 이치를 깨달으려 하지 않으니 고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번 몇 번의 강의는 모두 찌르는 가시를 담고 있습니다. 이 가시들이 우리를 찌르게 하십시오. 우리를 찔러 깨우게 하사 우리로 기쁜 사람, 효율적인 사람,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수고를 통해 하나님께 억지 공헌을 바치려 하지 말고 수고 중에서 온전히 낙을 누리십시오. 누구를 본받아야 할지 고민이라면 저를 본받으십시오. 더 많이 얻고자 한다면 그 비결을 이 강의들에 다 담아두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혜를 얻으십시오.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