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对于出尔反尔的信徒,一会儿承认神的医治,一会儿否认,这样自以为是刚硬的人,开窍在乎神。我们如何对待才是正确的?
其实啊,我跟大家说,我们千万不要替他求,“神啊给他悟性”,没有用的,是他要自己求。圣灵充满是要他自己求,“神啊,愿你的灵充满我!”人自己不求,神根本不做工。比如说一会儿相信神会医治,一会儿相信神不会医治。其实,这样的人就是脑子不好使。你想帮助他的话,如果跟你关系比较近,你经常损一损他,就你这脑子,算了吧!你什么脑子啊!你说着说着说着,他真的知道自己不太好使,他自以为是就会好一点。
尤其是他干了一件明显的不上道的事儿,是吧?明显的不上道的事儿,你就常常提个醒给他。他虽然觉得很没面子,但是这很没面子的感觉是对的,他真的就是那样。他跟你较劲,生气,怄气,这都不用在乎。因为自以为是的人都这样。
但是有一点,他会觉得:哎,你还真的是求我的益处,你真的是为了我好!我们也得常常如此说,是吧,我咋不跟街上那个人说呢?因为跟他没关系啊。我为什么要跟你说呢?因为我真的很爱你。
Q2:老师,我做事的第一反应就是魔鬼能不能来破坏,甚至发展到领导给我发一个信息,我都不敢大声说出来,潜意识里就是怕魔鬼听见,里面总有一种提心吊胆的感觉,请老师帮我分析分析。
基督徒啊,其实怕鬼的不止一个,你不孤单,你绝对不孤单。那基督徒,大幅度的提升魔鬼的地位其实是错的。大幅度提升魔鬼的作为,大幅度的提升天使的作为,这是一个非常非常危险的神学。
其实是啥呢?大家知不知道神掌管一切?你如果从神的角度看问题,那鬼不是神的仆役吗?是不是?鬼如果是神的仆役,你怕啥呀?你应该怕神。你如果怕神,你就啥都不怕了。如果人敬畏神,敬畏神也是学的呀。人一怕这些鬼就羞辱了神,你肯定要够呛啊。我说这话不是开玩笑,真的够你喝一壶。
人不信神就是个恶人,人相信神就是个义人,人为什么要相信鬼呢?其实相信鬼干啥呀?那有一次我很想研究鬼,我也很想研究鬼。那研究到哪儿去了?研究到《山海经》里就去了。研究到《山海经》里头去了以后,神的灵就跟我说,不要看这个东西。我说为啥呢?他说神的灵就说这是魔鬼的灵界,你应该多看神的灵界。
那我后来就得出了一个抽象总结的概念,或者是叫一个论述啊。神掌权呢,是吧?那后来我就总结这个事儿。我只需要把对的是啥样整对了。你很少听我讲异端,大家有没有发现?我只讲正端,就神的一端。这是哪一端?神的这端,就是对的是啥样?
你知不知道,这个题如果做错了,这么错了,那么错了,错的方式千变万化,但是对的只有那么一样两样。大家听明白了吗?我们只需要研究对的,不需要研究一万个错的为什么错,没有用。没有用,浪费时间。
你比如说我们做木工,我们只需要说对的是这个样子的,就完事了。这么错那么错,这边歪了,那边歪了,这边没整直,那边没整直,这边门装不上,那边门装不上......没有用,你就学对的是啥样就行了。这回明白了没?我想我们里面的悟性,是要建立在对神的信心上。当我们对神有信心,你知道神掌管一切,你还怕啥?但是人不敬畏神是一个非常要命的事。不敬畏神就没了智慧,连智慧的边儿都没摸着。好吗?要把眼睛放在神的身上。
Q3:老师,诫命律例典章法度这些概念能再解释一下吗?
什么叫做诫命?诫命就是这个东西是最底线,红线,不能踩。听明白了?一踩到红线受咒诅,这就是诫命,就是这个意思。
律例呢,律例是这么侍奉那么侍奉,这么侍奉神,那么侍奉神,这叫律例。律例要谨守遵行,比如谁家的牛拱了谁家的人,该怎么处理,这都叫做律例。诫命是跟咒诅相关,诫命是最低的底线,律例就又上升了一个层次。
那典章是啥呢?就是律例啊,就是规矩啊。你家的牛把谁家人给拱死了怎么赔偿,然后你们家的牛把谁家的牛给拱死了,然后怎么赔偿,就这些东西,那叫律例。
那典章呢?典章就是我们在整个的,侍奉神的这些各种各样的规矩。法度呢?法度就包括了这一切。我讲的可能是不对的啊。但既然你问到了,我就把我的一知半解跟你说一下啊。
Q4:老师,你刚才说人不会有自驱力,也不会自律,必须经过管理。我的孩子现在上高一,虽说被分到了重点班,但是自驱力和自律实在一般,有的时候看手机,也是控制不了他自己。他这个年纪,我如何让他自律,有内驱力呢?
做管子,你就做管子就行了。但是现在都是什么“爱的教育”,我从来没有看过爱的教育能教育出人才来。我真的没看到。我看到的是啥?我看到的就是教育出来“糊里糊涂”。真的,虎妈虎爸在教育孩子上还是有两下子的。
所以我想,今天我们把教育啊,什么重点班啊,这些东西都看得太重,我真的看不起这些东西。我这么说,你是不是觉得我狂啊?孩子的学习,其实都是透过他自己想学习,才能学好。
那你说这不是违背了自驱和自律吗?来,我把大家重新拉回到我的逻辑体系。一个小孩儿喜欢打游戏,那如果他喜欢学习,解决问题了不?解决问题了。
那他为什么喜欢打游戏呢?原因很简单。他打游戏,他打赢了,他就再想上一阶,再打赢了又想上一阶。那如果他学习,他赢了,又赢了,又一次赢了!哇,他就会产生享受的感觉。
那人如果做事不享受,其实是非常要命的,这是个非常痛苦的过程。为什么做事不享受呢?缺少悟性。一做,除了头发不疼,浑身都疼,你说他能享受啊,他没有悟性。但比如说,在同班同学里头,人家都不知道这题怎么做,他却知道。那可爽了,是不是?可爽了。跟人家一说,这讲得头头是道。他自己就会喜欢学习,所以做什么东西都要做到有感觉。如果从没感觉做到有感觉,他就会非常享受。
那其实我告诉你啊,人就得给他掰过来,你比如说到了军营,到了军营会怎么样?你就必须守人家军营的规矩。那是吧,让你干啥你干啥,啥毛病都没有了。那在家里头给孩子立规矩也是一样,我们现在的父母啊,都是爱的教育,都是体贴肉体。
所以我想这个年龄,如果愿意的话,有两个建议。第一个建议,就大量的做家务。那把时间用在做家务上。然后做着做着他就会聪明。然后,如果能做家务,还能够谋生,这孩子就很好。
第二个建议,就开始把这个学习啊,变成自学。你自学,你省了听课的时间,自学的效率比听课的效率高得多。也就是说用一半的时间去谋生,这一半时间谋生啊,包括做家务啊,另外一半的时间用来学习。这不就是为什么很多家庭,孩子不上学,就在家里学,或者妈妈爸爸安排人带着自己学,效果更好。
因为啥呢?孩子到了班上,不听还不行,听也没听进去,那不浪费时间吗?所以说第一个建议啊,建立谋生能力。第二个建议,学会自学。
其实现在的竞争力从哪儿来?竞争力从效率来。如果人家培养一个孩子啊,高中那几年读得那个屁滚尿流,非常辛苦,你的孩子却能够读得非常的轻松,一年半就干完了。那你不是很有竞争力?是不是?你用正确的学习方法,把时间都省下来了。
这个世界不管是啥,效率加品质,一定有竞争力。为什么咱们中国的产业链很有竞争力?中国的产业链效率高啊,是不是?所以在新加坡你会发现很多中国来的劳工,他们脑子好使啊。
今天答疑就到这儿,愿神祝福大家。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아주아주 중요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은 "내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입니다. 여러분은 화인 사명 신학이 ‘살아있는 것’을 유독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배변 잘하는 것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이 깨달음이 없으면 결코 잘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화인 사명 신학이 ‘살아있는 사람의 신학’이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신학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이제 시편 119편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주제는 "내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입니다. 사람이 평생 살아내는 결과는 그 지각과 깨달음의 인식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사람이 평생 살아내는 결과는 깨달음의 인식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깨달음’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물을 인식하는 수준의 차이는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녀가 되고 어떤 사람은 추녀가 되며, 어떤 사람은 훈남이 되고 어떤 사람은 못난 남자가 될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살다 보니 인생이 이렇게 되어버렸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가 걸어온 길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저보다 한 살 많은 외사촌 형과 한 살 어린 외사촌 동생이 있습니다. 형제간이니 사이가 좋아야 마땅한데, 전혀 그렇지 않고 원수처럼 지냅니다. 왜 원수처럼 지낼까요? 이해가 되십니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 때문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을까요? 하루는 외삼촌께서 돌아가셔서 두 아들이 산소에 성묘를 갔습니다. 첫째가 입을 열어 "아버지, 제가 담배 한 갑 사 왔어요"라고 했습니다. 둘째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담배는 첫째가 산 것이 아니라 둘째 자기가 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형이 산 게 아니잖아"라고 했습니다. 두 형제는 무덤가에서 말싸움을 벌이다가 주먹질을 하고, 서로 멱살을 잡고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무덤 위에서 치고받고 싸웠습니다.
이런 뇌를 가지고 인생이 잘 풀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아이고, 아버지는 관 속에 누워서 두 아들이 싸우는 꼴을 보고 계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시골 마을에 많을까요, 적을까요? 아주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깨달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깨달음이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입니다.
그 후 마을에 누군가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이 두 형제가 또 싸울 것을 알고 아주 멀리 떨어진 이쪽 테이블에 형을 앉히고, 저 멀리 반대편 테이블에 동생을 앉혔습니다. 그런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둘 다 술병을 하나씩 들고 다가가더니 또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완전히 원수지간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저렇게 산단 말입니까?
사람이 평생 살아내는 결과는 그 깨달음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 원수를 맺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쁘게 살아내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 119편에서 "내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두 다리와 두 팔로 펄펄 뛰며 살아있는 것 같지만, 속마음은 다 죽어있지 않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를 보고 불평하는 것은 깨달음이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저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성경공부를 준비하느라 전날 밤에 휴대전화로 설교나 강의를 틀어놓습니다. 밤새도록 듣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도 휴대전화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도 온전히 깨닫기 어려운데, 밤낮으로 묵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우리는 시편을 나누며 '복 있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함',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나의 복이 주 밖에 없나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와 같은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 깨달음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전부 다 깨달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지각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인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복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깨달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깨달음의 신학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지각이 열리지 않으면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 혼란스럽고 멍해졌어요." 멍해졌다면서 말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그건 누가 하는 말입니까? 귀신이 하는 말 아닙니까? 자기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다 어리석은 논리이고 억지 논리일 뿐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누구나 발가벗고 태어납니다. 옷을 입고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옷을 입고 태어난 분이 계십니까? 다행히 옷을 안 입었기에 망정이지, 옷이 목을 조를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발가벗고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이게 몇 개지?" 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손가락 하나조차 모릅니다. "이건 몇 개지?" 손가락 두 개를 보여줘도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후천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후천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흑인 아이를 중국인 가정에 데려다 키우면 유창하게 중국어를 배우지 않습니까? 어떻게 배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날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무슨 손오공이나 사오정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깨달음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세 가지 단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어로 배워보시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말로 딱 들어맞게 설명하기가 조금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 단어는 바로 ‘앎(know)’, ‘이해함(understand)’, ‘본질을 꿰뚫어 봄(insight)’입니다. 앎은 I know이고, 이해함은 I understand이며, 본질을 꿰뚫는 통찰은 insight입니다. 자, 영어를 배워봅시다. know, understand, insight.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아주 중요한 세 단계입니다.
이 깨달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알게 되는 것(know)이 한 단계이고, 아는 것에서 이해하는 것(understand)이 또 다른 단계이며, 이해하는 것에서 본질을 붙잡는 것(insight)이 또 다른 단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곧 깨달음입니다. 태어났을 때 발가벗은 통통한 아기는 보기에 참 귀엽습니다. 무지하니까 나와 논쟁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모르니 마냥 귀여워 보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귀여워하며 데리고 놉니다. 아이는 아직 깨달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평생을 그런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이는 꽤 들었는데 뇌 속은 여전히 발가벗은 통통한 갓난아기 수준인 ‘거대 유아(Adult baby)’라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멸망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그저 고집만 피우고 오만하며 괴로워하다가, 평생 괴로움과 허무함만 남긴 채 살아갑니다. 깨달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배움은 화인 사명 신학의 정수입니다. 정말이지 저는 여러분 모두가 자녀를 잘 이끌어 공부를 아주 잘하는 우등생으로 키워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공부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에게 기생하며 늙은 부모의 살점을 다 뜯어먹고 나중에는 뼈까지 갉아먹게 됩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일입니다. 없으면 배우기라도 하면 되는데, 자신이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시편 119편을 기록한 시인을 아십니까? 시편 119편은 시편 중 가장 긴 장입니다. 이 시편 119편의 저자는 사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이 지각과 깨달음 면에서 아는 것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평생을 비극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착각하고, 자신이 타고난 엉망진창인 생각들을 진리인 양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인생이 비극이 되는 것입니다. 고집 센 사람은 다 어리석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다 미련합니다. 이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다 미련합니다. 고집 센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니, 누구라도 이러지 않겠어? 누구든 나 같은 일을 겪으면 다 이렇게 하지 않겠냐고?"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자기가 무슨 세계 표준인 줄 압니다. 사실 인도 사람은 그렇게 안 하고, 말레이시아 사람도 다르게 행동하며, 백인 서양인도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세계 표준인 줄 압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표준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해?'라고 여깁니다. 고집이 세서 살펴보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며, 오직 자기가 인정한 것만 옳다고 여깁니다.
배움이란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배움은 남의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평생 자기 생각만 배웁니다. 평생 어리석은 이유는 오직 자기 것만 붙들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에 든 것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닌데, 결국 자기 자신도 변변치 못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생은 깨달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깨달음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각과 지혜와 지식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육신에는 본래부터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남은 것이 육욕(성)뿐이라면 정말 큰일입니다. 깨달음(悟性)이 없으면 남는 것은 본능적인 성(性)뿐입니다. 그것만 남으면 정말 골치 아파집니다.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꼴이 됩니다. 만약 그런 것만 남아있다면, 저는 학교에 가서 성교육이라도 제대로 받고 에이즈나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게 짐승과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의 상태가 바로 이렇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깨달음의 신학이며, 살아있는 사람의 신학입니다. 산 자의 신학이란 것을 아십니까? 바로 이 시대에 화인 사명 신학은 매우 깊은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자의 신학을 산 자의 신학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친구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공항에 바래다주며 대화가 잘 통해서 식사나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식당에 앉았는데 그 친구가 숨쉬기 힘들어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산소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산소 부족 증세를 보여 제가 기도를 해주었더니 낫게 되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는 목사님이 아주 많고, 제 친구 중에도 목사가 많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큰일 났네' 싶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목사를 알고 있는데 그들이 다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전했냐고 물었더니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당장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니 그 친구가 완전히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럼 내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답이 없었습니다. 그 친구도 배울 만큼 배운 박사 학위 소지자였습니다.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우주와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만 말할 뿐,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내용이 참 좋고 일리는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의 신학이 아니라 그저 '죽어서 천국 가는' 논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화인 사명 신학이 미래 세대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할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학은 산 자의 신학이지, 단순히 "우주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에만 머무는 신학이 아닙니다. 물론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지각과 깨달음을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지만, 실제로 올라갔는지 안 올라갔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교리를 주입하는 식의 전도는 잘 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을 전할까요?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고, 산 자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해봤자 헛소리가 될 뿐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도 "어제 예수님을 만났어요"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사진 있어요?" "사진은 없는데요." "왜 사진을 안 찍었어요? 예수님과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서 나도 좀 보여주지 그랬어요." 그가 예수님인지 어떻게 압니까? 사실 자기도 모르면서 엉터리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아내면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고, 살아있는 동안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게 살면 죽어서도 그런 곳으로 가는 법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깨달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이렇게 풀어 설명하니 그 박사 친구도 깊이 수긍했습니다.
사람은 존귀함을 살아내야 하고, 영광을 살아내야 하며, 능력을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각과 율례와 법도를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창조력을 살아내고,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을 살아내어 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진정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깨달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회계 일을 할 때도 지각이 통하지 않으면 회계를 잘 해낼 수 없습니다. 다리를 놓을 때도 깨달음이 없으면 다리를 제대로 놓을 수 없습니다. 목수 일을 할 때도 지각이 열리지 않으면 수납장을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깨달음을 온전히 열어가야 합니다. 지각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한두 가지 체험에만 집착하여 온갖 체험담만 늘어놓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온전한 신학이 아닙니다.
"목사님, 제가 이번에 트림이 나왔는데 왜 이럴까요? 목사님, 어제는 하루 종일 기도했는데도 트림이 안 나왔어요. 웬일일까요?" 화인 사명 신학은 트림하고 방귀 뀌는 신학이 아닙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깨달음의 신학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때 기도했을 때는 단번에 나았는데, 이번에는 왜 단번에 낫지 않을까요?"라고 묻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단번에 낫거나 낫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신학이 아닙니다.
이번에 제가 전하는 말씀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깨달음을 주소서! 주의 명령을 배우고 알게 하소서. 주의 법도를 알게 하소서. 온 마음으로 지켜 행하게 하소서. 평생 복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부지중에 저주를 밟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싸움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부부 싸움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싸우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다 하찮고 사소한 일들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며 참 탄식이 나옵니다.
어떤 자매가 자신의 목회자에게 상담한 뒤 마지막에 "어차피 목사님은 결혼도 안 해보셨으니 이해 못 하실 거예요"라고 덧붙였습니다. 무엇을 이해 못한단 말입니까? 결혼했든 안 했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뻔한 문제들 아닙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히 신비한 것인 양 여기지만 실은 별것 아닙니다. "목사님, 저희 부부는 성생활이 원만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런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생활 하는 법까지 가르쳐 드려야 하겠습니까? 화인 사명 신학은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영적 성장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정도 깨달음으로 성생활 연구 외에 도대체 무엇을 연구하겠습니까? 답답한 노릇입니다.
엄마와 딸이 토라져 싸우는 것도 다 사소한 일들 때문입니다. 전부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깨달음이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한마디 받아치고, 다 이런 식 아닙니까? 저는 안타깝습니다. 어떤 분은 치과에 갔더니 한 의사는 뽑으라고 하고 다른 의사는 신경치료를 하자고 해서 혼란스러워합니다. 돌아와서 "기도를 해야 할까요, 신경치료를 해야 할까요, 뽑아야 할까요? 기도해서 나았다가도 얼마 지나면 또 아파요"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지각이 온전히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깨달음이 통하지 않으면 쉽게 화(火)가 오릅니다. 지각이 막혀 화가 치밀면 치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결국 깨달음이 열리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깨달음에 힘을 쏟고 밤낮으로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훤하게 뚫립니다. 속이 통쾌해지고 복을 받게 됩니다. 화도 안 나고 토라질 일도 없어집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러므로 복 받는 원리를 철저히 꿰뚫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꿰뚫으셨습니까?" 제가 성경공부 때마다 가르쳐드리지 않습니까? 느헤미야에게서 배우고, 다니엘에게서 배우며, 애굽에 팔려간 요셉에게서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에게서 배울 수도 있지만, 사울에게서는 배우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자녀 교육 문제도 좀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없습니까? 수많은 아이가 부모 때문에 망가집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교육에 대해 무지하면서, 그저 국제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국제학교든 우주학교든 화성에 있는 학교에 보낸다 한들 별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부모가 뉴질랜드로 유학을 보냈던 자매들이 있습니다. 가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헛짓거리만 하다가 왔습니다. 또 호주로 보냈더니 헛짓거리만 하다가 이번에는 싱가포르로 왔습니다. 싱가포르든 어디든 아무 소용없습니다. 배움이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그 아이의 엄마는 모든 희망을 학교에만 걸고 있습니다. 학교가 자녀의 우수한 성적을 보장해 줍니까?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본질을 잡지 못한 채 겉핥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悟) 아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공부를 잘하는 것은 깨달음을 통해 나오고, 공부를 못하는 것은 학원 선생들이 가르쳐서 머리를 멍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이 학원, 저 학원 등록해 주니 아이는 머리가 멍해져서 스스로 깨달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 수업, 저 수업 듣느라 깨달을 틈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얼마나 잘 가르쳐 줍니까?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고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도(道)를 깨닫고 이치를 꿰뚫는 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깨달을 시간은 없고 돈만 쏟아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정곡을 찌르지 않았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돈만 퍼붓는 사람이라면 바로 당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여 머리가 열려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움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배움과 그저 수업을 듣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배움은 배움이고, 수업을 듣는 것이 꼭 배움은 아닙니다. 교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첫마디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수업 끝날 때까지 앉아 있습니다. 다음 수업이 와서 8시부터 9시까지도 못 알아듣고, 9시부터 10시까지도 못 알아채며 하루 종일 앉아만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둘째 날도 앉아있고,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며, 1년, 2년, 3년이 흘러갑니다. 9년 의무교육을 너무 의무적으로만 받아서 헛수고만 한 것 아닙니까?
사물을 인식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면 우리는 살게 됩니다. 첫째, 교육 문제를 명확히 깨달으십시오. 둘째, 질병 문제를 명확히 깨달으십시오. 사람이 평생 질병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질병은 영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사기(邪氣)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령(邪靈)은 다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 차근차근 깨달아 가십시오.
우리의 102과정이 제가 깨달아서 나온 것임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님, 그건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는 것과 같네요." 맞습니다. 알을 품듯 묵상하며 깨달으십시오. 103과정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성경공부의 기본 이론이자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성취해 내는 원리는 창세기에 나오며, 저주와 축복은 완전히 다른 두 갈래 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원리를 깨달아 명확히 알고, 저주의 원리를 깨달아 명확히 아십시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가는 삶의 본질이자 법칙입니다.
사람은 온갖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양한 상황을 마주할 때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악인을 보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악인이 설령 나에게 피해를 주었다 해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 모두를 이끌고 견고하고 실질적인 길을 걷고자 합니다. 묵묵히 실력을 쌓는 길이 겉으로 속이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늘 가짜 벽돌만 격파하다 보면 진짜 벽돌을 갖다 놓았을 때 들통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밑천이 드러납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성질이 나쁩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각이 없으면 대책이 없고, 대책이 없으면 절망하며, 절망하면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러므로 꽥꽥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속은 여전히 발가벗은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
자, 본문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편 119편 144절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우리는 뒷부분 말씀만 취하겠습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사람은 속사람이 살아있어야 진짜 살아있는 것입니다. 속이 죽어있으면 죽은 자입니다. 속마음이 죽은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기도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살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옵소서.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나,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사 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의 지각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형상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깨달음을 얻어 본질을 붙잡게 하옵소서. 주의 율례와 법도를 깨닫게 하시고, 주의 계명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소망이 오직 주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안에는 지식도 지혜도 없사오니,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의 지각을 열어주옵소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낼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사망과 멸망에서 건져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
오늘 제목이 참 좋지 않습니까? 참 좋은 제목입니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살지 마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살아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십시오. 이것이 화인 사명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관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모습을 살아내면 죽어서 하나님께로 가지 않겠습니까?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닮고 예수님을 닮았다면 틀림없이 예수님께로 갈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겉모습은 말 같은데 알고 보니 가짜 말이고 늙은 나귀였으며, 다시 보니 늙은 돼지 같은 모습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돼지의 형상을 살아냈으면 돼지에게로 가고, 소의 형상을 살아냈으면 소에게로 가며, 뱀의 형상을 살아냈으면 뱀에게로 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냈으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자, 본문의 배경을 나누겠습니다. 시편 119편을 누가 썼는지는 명확히 고증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119편의 내용을 통해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 사람들은 위대한 소망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예전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선지자 말라기, 선지자 학개, 그리고 스가랴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선지자들과 지도자들, 특히 느헤미야의 마음에 어떤 탄식이 있었겠습니까? 엄청난 탄식이 나왔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가?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여러분도 제가 이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무슨 깨달음이 이 모양입니까? 머릿속에 든 생각이 짐승 수준인지 올바른 깨달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느헤미야든 스룹바벨이든 학개든 말라기든 스가랴든,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이 병들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생각이 망가졌는데 어떻게 제대로 살겠습니까? 저주 속에 사는 것은 얼마나 쉽습니까? 저는 시편 119편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던 포로 귀환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는 고난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67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난을 겪기 전에는 깨달음이 중요한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삼시 세끼 잘 먹고 늘어지게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 켜고, 밤에 자기 전에 마사지나 받으니 빚진 것도 없고 얼마나 좋습니까? 아침에는 커피 한잔하고, 저녁에는 양고기탕을 먹으니 참 편안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첩을 여럿 두고 호의호식하며 저녁에 술 한잔 기울이던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시인도 대략 그런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부유했기에 교육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자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질 못합니다. 전날 밤늦게 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군이 쳐들어오면 벌떡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적군이 들이닥치면 틀림없이 일어납니다.
이 시인은 참 안락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자기 머리가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들이닥쳐 예루살렘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유다를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살며 첩을 거느리던 자들의 양손을 묶어 낙타 꼬리에 줄줄이 엮어 끌고 갔습니다.
그 먼 바벨론까지 걸어갔습니다. 고속열차를 타고 간 줄 아십니까? 바벨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며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적들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역사의 수많은 침략자처럼 포로들의 손을 말꼬리에 묶어 끌고 간 것입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아, 내가 예전에 얼마나 무지했던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내게 깨달음을 주소서." 그래서 그가 고백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적군이 들이닥치니 배우고 싶어졌습니까? 배우고 싶어집니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저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마귀는 오지 않았지만 실직이 찾아왔고 중년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중년의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은 없고 시간만 많아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돈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는데, 시간이 많아지니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인은 바벨론에 끌려갈 당시 어렸을 것입니다. 포로 생활 70년의 온갖 풍파를 겪고 스룹바벨을 따라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총결산해 보니 "하나님,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배우기가 어렵고, 고난이 닥쳐야 비로소 배웁니다. 사람은 꼭 고난을 겪고 종살이 같은 것을 해봐야 깨닫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셔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지만, 깨달음이 어떻게 오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런 일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런 고난이 없으면 우리가 제대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유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고, 주의 종을 후대하셔서 말씀을 지키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예전에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 자리에 앉아 시편 119편 설교를 들을 때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멘" 하고 끝났는데, 깨달음은커녕 실컷 잠만 자고 온 꼴이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깨달음을 주소서.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오늘 세 구절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첫째, 73절입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125절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셋째, 34절입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수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넷째, 144절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인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오직 깨달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일평생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의 핵심은 바로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살고자 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살아내고자 하신다면 깨달음에 힘을 쏟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뿐만 아니라 일을 해내는 일에도 힘을 다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도입을 길게 말씀드렸지만, 기본적인 논리가 다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됨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정말 고난을 좀 겪어봐야 합니다. 치통이 오는 것도 지각이 막혀서이고, 배가 아프거나 실직을 겪는 것도 깨달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고난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을까요? 대단히 어렵습니다. "저는 스스로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기업의 관리자라면 사람이 저절로 자율적이 될 것이라 믿지 마시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것이라 믿지도 마십시오. 사람은 훈련과 징계를 거쳐야 합니다. 저절로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본성과 기질을 깊이 알고 계십니다. 사람의 본성이 이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며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이 그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매섭게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지 않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실직하고 나서야 성경을 치열하게 읽으며 화인 사명 신학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지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 되어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님, 저는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겠어요"라고 하는 것은 아직 위기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마귀가 찾아오는 것도 때로는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한 이유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욥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라며 이전에는 자신이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셔서 그를 다루시니 온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에 한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관리직 임원으로 늘 '대표님' 소리를 들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실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마흔 무렵의 나이였습니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높임을 받다가 실직하고 중년의 위기를 맞이하자 비로소 눈이 뜨였습니다.
하나님께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살아난 것입니다! "내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살아났나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십니다. 고난을 겪고 나니 하나님 외에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제가 과거에 겪었던 막막함은 눈앞이 캄캄하여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신 것입니다. 배움의 태도가 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태도가 바르지 않아도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결국 바닥을 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율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전하는 내용을 다 안다고 거만을 떱니다. 앞마디만 들어도 뒷말을 안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전하는 것이 하나의 일관된 체계이기에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고, 사색이 되어 온몸을 떨며 아파봐야 비로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목회자는 상대가 누구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상처가 아물어도 그 아픔의 교훈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면 곤란합니다. 시편 119편의 노시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게 깨달음을 주사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사람이 '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구하지 않을까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 온 것은 놀러 온 것이 아니라 배우러 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억지로라도 배우도록 훈련합니다. 사람에게는 안주하려는 노예 근성이 있기에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렇게 훈련되어 변화되면 시편 119편의 저자처럼 되는 것입니다.
"내게 깨달음을 주사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3절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를 배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배우겠습니까? 환난을 겪지 않고 배우겠습니까? 이제 배우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려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쑤시고 힘들지만, 틱톡이나 영상을 볼 때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집니다.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 제게 깨달음을 주소서. 도무지 읽어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저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마태복음을 처음 읽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쉽게 읽힌다면 굳이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깨달음을 구해야 합니다.
주의 계명을 배울 때 어떤 것은 마음에 들고 어떤 것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쉽게 하나님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큰일입니다.
배움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배움의 태도입니다. 태도가 없으면 평생 자기 틀에 갇혀 자기 고집대로만 살게 됩니다.
주의 계명을 배울 때는 핑계나 이유를 대지 마십시오. "왜요?"라는 의문을 잔뜩 품다 보면 스스로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명령일 뿐입니다. 의문을 품는 것은 올바른 배움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주의 명령을 제가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실천의 신학입니다. 말씀을 실천해 보면 참으로 좋습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내게 깨달음을 주사 주의 증거(법도)를 알게 하소서
처음에는 계명이기에 그저 순종합니다. 그다음 단계는 '증거(법도)'입니다. 법도는 사물의 법칙이자 더 높은 차원입니다. 125절에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법도는 명령 속의 내재된 법칙입니다. 이는 명령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깊이 정리하여 '법도'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백성들에게 명확히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 주의 말씀이 열리면 빛이 비치어 사람들이 실행할 수 있나이다." 이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법도는 명령 속에 담긴 내적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주의 경계선을 밟지 않게 도우시는 분입니다.
주의 증거를 알게 해달라고 구할 때, 아는 것(know)에서 이해하는 것(understand)으로, 그리고 본질을 꿰뚫는 통찰(insight)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본질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전심으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수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왜 화인 사명 신학이 강력한지 아시겠습니까? 화인 사명 신학은 실행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삶에 구체적으로 착근되는 신학입니다. 어제 온 친구도 많은 사람이 전도할 때는 꿈쩍도 않더니, 제가 본질을 풀어 설명해 주니 깊이 수긍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소프트웨어를 짤 때 버그투성이면 프로그램이 돌아가지 않지만, 버그를 다 잡고 나면 원리를 깨달아 훨씬 빠르고 쉽게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지난 세월 동안 무엇을 하든 본질을 꿰뚫고자 했습니다. 고객 상담을 하든, 네트워크를 다루든, 서버를 관리하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든, 목공을 하든 본질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본질을 잡으니 모든 일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그들이 "깨달았사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은 좌의정, 우의정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다 도망쳤습니다. 그것이 진정 깨달은 것이었습니까?
훗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주님의 가르침과 신학 체계에 따라 교회를 세워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임하는 것을 보며 비로소 "아, 주의 말씀이 진정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행했기 때문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입술의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어 증명하는 신학입니다.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롭습니다.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판단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 내게 깨달음을 주사 살게 하소서!" 화인 사명 신학 역시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는 신학입니다.
제가 101과정 교재를 쓸 때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의 지식과 말씀을 정리하는 것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남의 자료를 참고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제 역량도 부족했습니다. 석 달 동안 뼈를 깎는 고통 속에 첫 책인 101과정을 써냈을 때, 비로소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몇 달 후 201과정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너무나 힘듭니다. 그러나 마침내 써냈을 때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이렇게 말씀대로 행하며 나온 것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 말씀을 명확히 밝혀 전할 수 있는 깨달음을 구합니다.
주일 설교를 전할 때마다 가죽을 벗기는 듯한 수고가 따르고, 매주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마다 "하나님, 내게 깨달음을 주사 말씀을 이해하고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라고 갈망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산 자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그 법도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광대한 바다 앞에서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바다의 한 방울 물에 불과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진정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깨달음을 얻으십시오. 이제부터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온전한 깨달음을 갈망하십시오. 깨달음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깨달음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는 끝이 없으므로 결코 스스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한두 번 치유를 경험했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단번에 무언가를 이루려는 요행을 바라지 마십시오.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잘 낫더니,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왜 안 될까? 혼란스럽다" 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깨달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겨우 작은 체험 하나 얻었다고 자신이 대단한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게으름을 깨뜨리고 권면합니다. 오늘부터 자신을 추스르십시오. 틱톡이나 헛된 곳에 쓰는 시간을 거두어 하나님의 말씀에 쏟아부어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