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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누가복음 17장 –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다!

2021-02-03 37,874 路加福音 传福音 信心 神的国 罗得的妻子 成长 选择

相关经文

路加福音17章-罪,信心,仆人的本分
  • 1 耶稣又对门徒说:“绊倒人的事是免不了的;但那绊倒人的有祸了。
  • 2 就是把磨石拴在这人的颈项上,丢在海里,还强如他把这小子里的一个绊倒了。
  • 3 你们要谨慎!若是你的弟兄得罪你,就劝戒他;他若懊悔,就饶恕他。
  • 4 倘若他一天七次得罪你,又七次回转,说:‘我懊悔了’,你总要饶恕他。”
  • 5 使徒对主说:“求主加增我们的信心。”
  • 6 主说:“你们若有信心像一粒芥菜种,就是对这棵桑树说:‘你要拔起根来,栽在海里’,它也必听从你们。
  • 7 你们谁有仆人耕地或是放羊,从田里回来,就对他说:‘你快来坐下吃饭’呢?
  • 8 岂不对他说:‘你给我预备晚饭,束上带子伺候我,等我吃喝完了,你才可以吃喝’吗?
  • 9 仆人照所吩咐的去做,主人还谢谢他吗?
  • 10 这样,你们做完了一切所吩咐的,只当说:‘我们是无用的仆人,所做的本是我们应分作的。’”
  • 11 耶稣往耶路撒冷去,经过撒玛利亚和加利利。
  • 12 进入一个村子,有十个长大麻风的,迎面而来,远远地站着,
  • 13 高声说:“耶稣,夫子,可怜我们吧!”
  • 14 耶稣看见,就对他们说:“你们去把身体给祭司察看。”他们去的时候就洁净了。
  • 15 内中有一个见自己已经好了,就回来大声归荣耀与 神,
  • 16 又俯伏在耶稣脚前感谢他;这人是撒玛利亚人。
  • 17 耶稣说:“洁净了的不是十个人吗?那九个在哪里呢?
  • 18 除了这外族人,再没有别人回来归荣耀与 神吗?”
  • 19 就对那人说:“起来,走吧!你的信救了你了。”
  • 20 法利赛人问:“神的国几时来到?”耶稣回答说:“ 神的国来到不是眼所能见的。
  • 21 人也不得说:‘看哪,在这里!看哪,在那里!’因为 神的国就在你们心里(心里:或译中间)。”
  • 22 他又对门徒说:“日子将到,你们巴不得看见人子的一个日子,却不得看见。
  • 23 人将要对你们说:‘看哪,在那里!看哪,在这里!’你们不要出去,也不要跟随他们!
  • 24 因为人子在他降临的日子,好像闪电从天这边一闪直照到天那边。
  • 25 只是他必须先受许多苦,又被这世代弃绝。
  • 26 挪亚的日子怎样,人子的日子也要怎样。
  • 27 那时候的人又吃又喝,又娶又嫁,到挪亚进方舟的那日,洪水就来,把他们全都灭了。
  • 28 又好像罗得的日子;人又吃又喝,又买又卖,又耕种又盖造。
  • 29 到罗得出所多玛的那日,就有火与硫磺从天上降下来,把他们全都灭了。
  • 30 人子显现的日子也要这样。
  • 31 当那日,人在房上,器具在屋里,不要下来拿;人在田里,也不要回家。
  • 32 你们要回想罗得的妻子。
  • 33 凡想要保全生命的,必丧掉生命;凡丧掉生命的,必救活生命。
  • 34 我对你们说,当那一夜,两个人在一个床上,要取去一个,撇下一个。
  • 35 两个女人一同推磨,要取去一个,撇下一个。(有古卷加:36两个人在田里,要取去一个,撇下一个。)”
  • 36
  • 37 门徒说:“主啊,在哪里有这事呢?”耶稣说:“尸首在哪里,鹰也必聚在那里。”

《答疑解惑》

성경공부: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7장을 성경공부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듣고 있든지, 저는 여러분이 필기하는 법을 배우기를 권합니다. 제가 보니 필기를 못하는 사람은 많고, 필기를 잘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어떤 사람은 필기를 아주 이상하게 합니다. 들은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적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필기란 들은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필기는 반드시 저자가 강조하려는 핵심을 적는 것입니다. 핵심을 잡지 못하고 세부적인 것만 잡아서 여기서 한마디, 저기서 한마디씩 적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중에 저는 왜 사람들이 필기할 때 핵심을 잡지 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 필기하느라 바쁘고, 거기서 죽어라 적으면서 들은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적습니다…… 그러면 뒤죽박죽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이렇게 하면 사람을 지쳐 죽게 만들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들이 쓴 필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저 시간 순서대로 적은 기록일 뿐이었습니다. 무엇을 들었느냐고 물으면,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못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16)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때로 제가 전하는 내용은 조금 깊이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한 번 듣고 나서 핵심을 잡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들은 뒤에는 문맥을 잘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일 설교에서 복음의 요소를 언급했는데, 복음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전하려면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람이 자기 육체를 잘 처리하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내가 복음을 전하면 음덕을 쌓을 수 있겠구나!” 음덕을 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음덕을 쌓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복음을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 자체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우리가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을 대신할 수 없고, 자기 육체를 다스리는 일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필기할 때 전체 내용을 듣고 핵심을 잡아 기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 토막만 듣고 그 말만 적지 마십시오. 그러면 문맥을 잘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배우기 쉽습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전하는 내용에는 반복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 듣기만 하면 사실 핵심은 아주 조금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핵심을 중심으로 필기하면 됩니다. 사실 제가 설교하는 방식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방식과 비슷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글을 쓸 줄 알 뿐 아니라 말도 할 줄 알고, 반드시 한 가지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듣다가 점점 혼란 속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로 선택한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마태복음》 24:28)

오늘은 먼저 이 장의 마지막에 있는 말씀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이 말씀만 읽으면 누가가 무엇을 말하는지, 또는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전체 글에서 아무 문장이나 하나만 떼어 내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조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주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료해 주신 후 아홉 명은 가 버리고 한 명만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수님도 놀라서 말씀하셨습니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열 명이 아니냐? 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그 아홉 명을 찾아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내용들이 결국 어떤 주제를 표현하려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글을 입력하며 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주제를 요약하려고 했고, 그중에는 저와 아주 잘 소통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제를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요약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일까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주제를 글자 그대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제부터 한 단락씩 설명하겠습니다.

앞에서 《누가복음》을 공부할 때, 우리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가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문맥을 잘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사실 누가에게는 매우 분명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아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1장은 이 복음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장은 너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다른 모든 것도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읽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좋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좁은 문입니다. 너희는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13장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14장은 제자가 되는 데 따르는 대가를 말합니다. 누가는 이어지는 글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가 되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보배이지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6장에 이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존재한다고 다시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영원한 장막을 준비할 것인지, 이생의 장막을 준비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17장에 이르러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다시 기록합니다. 제가 이렇게 많이 말한 것은 앞의 장들을 여러분에게 정리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이 장을 한 단락씩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범하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7:1-4)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용서할지 용서하지 않을지는 모두 우리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보세요. 내가 그를 용서했어요. 화도 내지 않았어요.” 사실 아직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힘들게 자신을 억제해서 화내지 않고, 성질을 부리지 않으며, “그가 나에게 잘못했어도 괜찮아!”라고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사실 여전히 원한이 있습니다. 행동으로만 용서했을 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괴롭고 믿음으로 진정 용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선택하는 논리 체계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논리 체계입니까? 여러분이 기꺼이 진심으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본분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용서한 후에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장막을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들을 따지고 있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영원한 장막을 준비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쇠똥구리가 굴리는 똥덩이를 보배로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얼마나 역겨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논리 체계를 힘써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논리 체계는 자신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의 미쳐 버릴 뻔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안의 그 조금 괴로운 감정을 너무 크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를 용서해야 하는데, 그가 나를 이용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분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전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잘못한 것은 고작 여러분을 한 번 노려보거나, 욕 한마디를 하거나, 여러분의 겉옷을 가져간 정도일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여러분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한 정도일 것입니다. 대략 여러분에게 잘못한 일은 이런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할 때 여러분은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겠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열심히 용서하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여러분의 머릿속에 온통 쓰레기가 들어 있고, 깨닫는 능력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귀신의 이론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한 믿음으로 듣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결과는 여러분이 실족하거나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을 돌에 묶어 바다에 던지는 것이 용서하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은 높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서로 진정으로 용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은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못합니다.

때로 저는 참 이상합니다. 저는 누구를 이집트에 팔아넘긴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을 이용한 적도 없는데, 그 사람들이 왜 저를 원망하는 것입니까? 또 제가 섬겼던 사람들 중에도 제가 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귀신에게 눌린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그들에게서 조금도 이득을 취하지 않았는데, 왜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저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저는 사람이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선택하는 것은 아주 쉽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섬기는 과정에서 형제자매들에게 자주 말합니다. “훗날 어느 날 여러분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을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 그가 오히려 저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저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아마 제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꽤 높습니다. 저는 말이 거칠고 외모도 볼품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의 사도 바울도 이와 같았습니다. 누구든 일부러 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제가 전하는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오는 것입니다. 제가 전하는 설교에 영양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접 만나 저와 이야기하고 나면, 제가 사실 말이 거칠고 외모도 볼품없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저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대가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저를 대가로 여기면 반드시 실족할 것입니다. 제게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가 많다고 해서 여러분은 왜 실족합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문제가 있는데, 굳이 실족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있는 문제들이 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저를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오해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 제게 믿음을 더해 주세요.”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뒤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이 말이 참으로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누가복음》 17:6)

주 예수님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문제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여러분 안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믿음이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렇습니다. 핵심은 여러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 있다면 주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용서하기를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잘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 좋은 말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형편없는 말입니다. 왜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합니까? 그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머리와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의 선택입니다. 사람이 굳이 손해 보고 불운한 일을 선택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막을 수 없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7-10)

어느 주인이 종에게 어서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종에게는 종의 몫이 있고 주인에게는 주인의 몫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그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사하셔야 합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주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믿음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어리석어서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 제게 믿음을 더해 주세요!” 여러분이 주인입니까? 하나님을 하녀로 여기고 있습니까? 자신의 분수를 모른 채 늘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지 마십시오! “주님, 제게 믿음을 더해 주세요.”라는 말은 아주 좋지 않은 말입니다. 이것을 배우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왜 그러느냐? 믿음이 없는 것을 나에게 탓하느냐?” 믿음을 갖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해야 마땅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기를 선택하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내가 어떻게 여러분을 믿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루 종일 똥덩이를 굴리는 쇠똥구리가 되고 싶다면 나도 막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배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쓰레기가 되겠습니까? 나사로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습니까? 비록 구걸하고 온몸에 종기가 나더라도 세상의 이런 시시한 일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라도 끝까지 견디겠다는 마음 말입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방식은 정말 심각합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와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실수로 다른 사람과 잘못된 관계를 맺어 임신했습니다.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낙태해야 할까요?” 그녀는 책임을 저에게 떠넘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임신했으면 임신한 것이지요. 어떻게 할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선생님, 저와 남편이 지금 이런 상황인데 남편이 제가 주님을 믿는 것을 막습니다. 이혼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저는 말합니다. “어떻게 할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처음에 그 사람과 결혼한 것은 당신 아닙니까? 당신이 직접 선택한 것 아닙니까? 당신이 직접 선택하세요. 책임을 저에게 떠넘기지 마세요.”

제가 그녀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가, 그녀가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선생님이 당신과 이혼하라고 했어.”라고 말하면, 제가 한가해서 괜히 제게 문제를 만들겠습니까? 어떤 부부는 싸우다가 저에게 와서 누가 옳은지 판단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판단해 줄 것 같습니까? 무슨 옳고 그름이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으면 마음에는 세상의 이런 시시한 일들만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둘지 말지는 여러분 자신이 선택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선택할 줄 몰라 저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제가 이렇게 묻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하십시오. 이혼하고 싶지 않으면 계속 사십시오.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면 이런 일들이 여전히 문제가 되겠습니까? 무엇이 나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내려놓으면 되지 않습니까? 사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나사로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갈릴리로 들어가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을 치료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들이 치료받은 후 마지막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했고, 나머지 아홉 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까? 다른 치료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까? 예수님은 의아해하시며 돌아온 나병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보니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하, 딩타이펑에 가서 먹은 지 너무 오래됐네. 노래방에서 즐긴 지도 오래됐고,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뵌 지도 오래됐으니 빨리 가야겠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모두 세상의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남아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아홉 명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감사하러 돌아온 그 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잘 살고 싶어 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면 얻게 되는 것은 나병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일이 아닙니까? 이전에 잘못 살았는데도 계속 잘못된 논리 체계대로 산다면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가 치료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암에 걸린 사람들은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암에 걸리기 전의 선악을 분별하는 방식, 쉽게 상처받는 논리,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빚졌다고 여기는 논리를 여전히 선택하고 있습니까?

이런 현상을 보십시오. 열 명의 나병환자 중 결국 한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와 감사한 그 한 나병환자도 반드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과거 제가 섬길 때도 이런 관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치료받은 후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함께하기 원하면 함께하십시오. 원하지 않으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십시오. 저는 절대로 전화해서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있습니다. 절대로 쓰레기를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이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쇠똥구리가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너무 역겹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쓰레기를 받아들이려고 합니까? 교회에 사람 수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힘들게 됩니다. 한 형제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목회자는 집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은 내버려 두고, 날마다 밖으로 나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다고 합니다. 어떤 양입니까? 교회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씩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양입니까?

나중에 다시 돌아보니, 남아 있던 아흔아홉 마리 중 진짜 양은 한두 마리뿐이었고 나머지는 여우와 족제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한 마리의 늑대 때문에 다른 진짜 양들이 늑대에게 물려 가거나 도망가 버렸습니다. 도망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늑대 우리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족제비 백 마리만 남게 됩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족제비들이 예배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면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한 마리 양을 찾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양이고 보배이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데 그들을 찾아 돌아오게 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배웠습니까? 나사로처럼 결단할 수 있습니까? 구걸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나사로처럼 구걸하는 모습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될지언정 그 부자가 되지 않고, 세상의 영광과 부귀와 그런 헛된 일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유골함 하나를 꺼내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주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들은 여러분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저리 애쓰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의 득실 때문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가난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풍성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번성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눈에 보배이고, 우리도 예수님의 눈에 보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 눈에 지극히 귀한 보배입니다.

이제 제가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귀한 보배로 여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 사십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모든 일을 배설물로 여기며, 모든 재물을 불의한 재물로 여깁니다. 힘들게 번 돈도 불의한 재물입니다. 이 세상을 탐한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까?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을 이 세상의 올무에 단단히 묶어 두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병이 깨끗해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우리 안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지 없는지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제 마음속에 있는지는 압니다. 여러분의 돈을 건드려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지 알 수 있고, 여러분이 굴리는 똥덩이를 건드려 보면 여러분이 쇠똥구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집 강아지에게 뼈다귀 하나를 준 다음 그 뼈다귀를 다시 가져와 보았습니다. 그러자 강아지가 저에게 이를 드러냈습니다. 그저 시험해 본 것뿐인데도 이를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강아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주인이 아니라 뼈다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온 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강아지처럼 되지 말고, 쇠똥구리처럼 되지 마십시오. 뼈다귀와 똥덩이만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속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한다면, 주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온 땅이 동시에 인자가 강림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번개와 같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지만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이 마귀에게 가려지고 육체를 돌보는 마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선택이 사람들을 단번에 구분합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그 때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에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어떤 사본에는 36절이 더해져 있음: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7:26-37)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어도 마음속의 선택으로 인해 결과는 서로 다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은 선택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사람은 버려집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하나는 선택받은 사람이고, 하나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마음속의 선택이 하나님께 선택받을지 하나님께 버림받을지를 결정합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가 어떠했고, 롯의 때가 어떠했는지를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강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려 주셨습니다. 곧 그들을 모두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멸망시키신 뒤에도 여러분은 부동산과 주식과 은행 예금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겠습니까?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마음속의 선택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잘 살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잘 살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앞 장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와 부자의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했고, 한 사람은 세상의 나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면 비록 잘 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마음가짐입니다. 부자는 모든 소망을 세상에 두었고, 결국 음부와 지옥에 떨어져 꼬치구이가 되었으니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사로의 선택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조금 고난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마지막에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까?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롯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롯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베드로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롯을 칭찬한 적이 없지만 베드로는 롯을 칭찬했습니다. 롯은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두 딸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롯이 항아리 하나의 술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술에 취한 뒤 두 딸과 관계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결국 롯과 두 딸은 재산을 모두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문에 롯을 이끌어 내셨다고 말씀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를 기억하셨기 때문에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롯은 소돔 성에서 멸망할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롯의 아내가 세상을 매우 사랑하고 돈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롯은 아내와 하나가 되려면 아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내를 따라 소돔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내는 소돔에서 매우 값진 재산을 많이 마련했지만, 그 값진 재산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것들은 모두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는 롯의 아내가 있습니까, 아니면 롯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롯은 이전에 아브라함을 따르며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왜 아브라함을 떠났습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마다 장막을 옮겼습니다. 장막에 사는 것과 위생 시설이 갖추어진 벽돌집에 사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롯과 그의 아내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목민으로 사는 것은 너무 고생스럽다고 여겼고, 현대적인 도시에 들어가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실 여러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길수록 더 잘 살지 못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수록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형제의 동료는 건강관리를 아주 잘했습니다. 날마다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했으며, 습관적으로 몸을 단련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아주 튼튼하게 단련하여 늙은 말에게도 잘 어울릴 정도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늙은 말이 그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보전하려고 한다고 해서 정말 생명을 보전할 수 있습니까? 모두가 매우 놀랐습니다. 자기 생명을 그렇게 아끼던 젊은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원칙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이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과 나의 마음속에 있고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로 잘못 이해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의 마음이 죽은 사람의 마음이라면 마귀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들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시체일 뿐입니다. 영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이 없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반드시 와서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마귀가 오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귀신 하나를 보내 여러분을 괴롭히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영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영이 없는 시체가 되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처럼 걷는 것일 뿐입니다. 시체를 먹는 독수리도 반드시 그곳에 모입니다. 그런 사람은 귀신을 불러들입니다.

여러분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죽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전적으로 여러분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한다면 독수리가 어떻게 그곳에 모이겠습니까? “이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라고 묻겠지만, 사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영이 없는 살아 있는 사람과 같고 세상의 일을 위해 살아간다면 결국 죽게 됩니다. 어떻게 죽습니까? 독수리 떼가 그곳에 모여 여러분의 살을 먹는데, 잘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제 이야기를 듣고 결국 어떤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 설교를 정말 좋아합니다. 선생님의 설교에는 영양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영양분은 그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의 일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하나의 관념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겪은 일은 그가 마음속에서 선택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서 치료와 해방의 열매를 보았지만 더 나아가다 보니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누가 그가 계속 나아가는 것을 막았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계속 저와 논쟁했습니다. 마치 제가 그다지 겸손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그가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겸손한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마디 강한 말을 했더니, 말을 마치자 그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빠졌습니다!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세상의 이런 일들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이것이 시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독수리가 그곳에 모이는데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잘 지낼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삶의 결과는 바로 그 사람 자신의 선택입니다.

제가 강한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가 자기 안의 논리 체계를 내려놓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악한 말을 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했습니까?” 이 말은 귀신의 말입니다. 사람 안에 귀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 시체를 먹으려는 독수리 떼가 있으니, 결국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매우 깊이 느낍니다. 노아의 때가 어떠했고, 롯의 때가 어떠했듯이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사람이 지붕 위에 있다면 그때에는 세간을 가지러 내려오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돈과 은행 통장 같은 것들이 모두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이 정말 아주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의 일을 여전히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까? 우리가 밭을 갈아야 한다면 밭을 갈고, 맷돌을 갈아야 한다면 맷돌을 갈며, 자야 한다면 자고, 섬겨야 한다면 섬기십시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서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용서할지 말지,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할지 말지 같은 일들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왜 자주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을 합니까? 제가 전하는 내용이 여러분 안의 논리 체계와 조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의 논리 체계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돼지 먹이를 많이 먹게 했고,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그런 논리 체계를 고수합니다.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치명적입니다. 절대로 롯의 아내를 본받지 마십시오. 머릿속으로 어떻게 세상의 논리 체계를 지킬지만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이 소금 기둥이 되면, 정말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사십시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는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힘써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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