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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적전쟁 승리의 신학 시리즈 (2) - 여호와는 용사이시로다!

2026-05-10 1,016 争战得胜的神学系列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어서 ‘영적 전쟁 승리의 신학’ 시리즈 두 번째 강해를 전하겠습니다. 이 영적 전쟁 승리의 신학은 정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기도 중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통증은 떠나갈지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를 고쳐 주시옵소서!” 여러 해 전에 제가 실험을 하나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 이 통증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 주님……” 효과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통증은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 승리의 신학’ 시리즈 제2강의 주제는 바로 ‘여호와는 용사이시니’입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다”, 이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이는 말합니다. “아닙니다, 여호와는 장군이시고, 여호와는 왕이시며, 여호와는 용사이시고, 여호와는 사령관이십니다.” 와, 이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다’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통증은 떠나갈지어다, 통증 배후에 있는 악령은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그 통증의 영을 없애 버리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즉 용사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옥황상제와는 완전히 다르고,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는 사장님과도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이 일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친히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셨고, 그분의 백성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누가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마른 땅을 걷듯 건너게 하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며, 친히 그 현장에 계시며 물을 가르셨습니다. 그 물이 어떻게 갈라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떠받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지휘관들과 군사들을 홍해 밑바닥에 수장시키신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강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 하나님,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누가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 중국 장기를 둘 때 보면, 왕(궁)은 그 좁은 궁 안에서만 뱅뱅 돌고, 곁에 사(士)와 상(相)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논리 체계입니다. 만약 천국에서 장기를 둔다면, 그 왕은 엄청나게 강력할 것입니다!

그 왕은 온 사방을 다니며 모든 원수를 쳐부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왕을 잡을 생각조차 못 합니다. 차(車)로 장군을 부르면 그 차를 먹어 버리고, 졸(卒)로 장군을 부르면 그 졸을 먹어 버립니다. 가장 강력한 분이 바로 그 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전쟁을 본떠 만든 장기는 왕이 뒤에 숨고 병사들이 앞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과거 국민당이 싸울 때를 보면 뒤에 기관총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앞에는 적의 기관총이 있고 뒤에는 아군 장군의 기관총이 있는 것입니다. 병사들은 뒤로 물러서도 죽고 앞으로 돌격해도 죽으니, 그것이 바로 총알받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앞서 행하시며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자기 백성을 위해 길을 평탄케 하십니다. 그분을 따르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너 이거 해라, 너 저거 해라” 시키기만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도자가 되시면 친히 앞장서서 돌격하시며 모든 일을 직접 행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자가 되시면 친히 앞장서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는데 제가 무엇을 더 무서워하겠습니까?

《서유기》에 보면 아주 재미있고 우스운 대목이 나옵니다. 삼장법사 사제 네 사람이 벽파담이라는 구두충(아홉 머리 괴물)의 영토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서 붕파파(奔波霸)와 파파붕(霸波奔)이라는 두 졸개 요괴가 있었는데, 파파붕이 손오공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붕파파는 허겁지겁 도망쳐 구두충에게 달려갔습니다. “대왕님, 대왕님, 큰일 났습니다! 제가 삼장법사 일행의 손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자 구두충이 말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그 사제 녀석들을 손봐 주겠다.” 그런데 이 구두충은 만성용왕의 사위였습니다. 만성용왕의 딸이 가만히 보더니 눈을 굴리며 말했습니다. “대왕님, 직접 가지 마시고 이자에게 시키시지요.” 그러고는 붕파파를 향해 말했습니다. “붕파파, 너에게 명하노니 당장 가서 삼장법사 일행을 사로잡아 오너라.”

그러자 붕파파가 말했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제 월급이 고작 1800위안인데, 저더러 삼장법사 일행을 잡아 오라니요?” 그 얼굴에 체념과 막막함이 가득했습니다. 붕파파의 그 반응, 정말 그 장면의 표정 연기는 압권이었습니다. 너무나 우스웠습니다.

만약 제가 붕파파였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일단 밖으로 한 바퀴 산책하러 나가지 않겠습니까? 항저우 서호도 구경하고, 우전도 둘러보고, 쑤저우 정원도 한 바퀴 돌고 와서 보고하는 겁니다. “대왕님, 제가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대왕이 “무슨 방법을 찾았느냐?”고 물으면, “태상노군에게 가서 보물을 얻어 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죠. 대왕이 “좋다”고 하면 스트레스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붕파파의 처지인데, 상사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시킨다면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을 자주 겪습니다. 우리는 종종 붕파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파파붕이 되기도 합니다. 아십니까? 보통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때 마주치는 존재들이 바로 이런 졸개 귀신들입니다. 이런 졸개 귀신들은 참으로 끈질깁니다. 귀신의 왕이 이 졸개들을 보내어 “너는 이 사람을 괴롭혀라, 너는 저 사람을 쳐라” 하고 명령하면, 그 귀신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거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침 화인명정신학(華人命定神學) 교회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면, 아이고 세상에, 그 표정이 딱 붕파파나 파파붕의 표정과 똑같습니다.

“아이고, 돌아가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으니, 그냥 당신들 손에 죽겠습니다.”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졸개 귀신들은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돌아가 봤자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왕 역시 그들을 죽도록 핍박합니다. 나중에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영적 세계가 이렇구나.’ 하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며, 우리 앞서 행하시며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귀신이 우리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졸개 귀신이 골치 아픈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돌아가도 죽고 남아 있어도 죽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제가 “너 왜 여기 왔느냐?”고 물으면, “그자가 가라고 해서 안 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가라고 한다고 그냥 오냐? 서호에 가서 한 바퀴 돌고 돌아가지 그랬냐?”고 하면, “안 됩니다, 돌아가면 문책을 당합니다.”라고 합니다. 꾀를 내주어도 써먹지를 못합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끝장나는 것, 이것이 바로 마귀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세상은 이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무엇을 자주 봅니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넘기는 것을 봅니다. 얼마 전 수십 년 전의 옛 동료 하나가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같은 상사 밑에 있던 다른 동료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상사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지금 당장 “너, 가서 OpenAI 하나 개발해 와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됩니까? 월급 1800위안 받는 사람이 OpenAI를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가서 딥시크(DeepSeek) 하나 만들어 와라.” 하면 되겠습니까? 그 적은 월급으로 그런 걸 어떻게 만듭니까? 그러니 스트레스가 얼마나 극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저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우시니 결국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장 어려운 일을 친히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앞서 행하시며 다 이루시는 분입니다. 묻겠습니다. 누가 음부에 내려가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습니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음부와 사망의 열쇠를 손에 쥐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승리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은 승리의 길이니, 여러분은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께서 승리의 길을 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구두충 같은 괴물이 아닙니다. 구두충이나 붕파파를 사지로 내몹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성용왕도 아니시며, 우리는 붕파파도, 파파붕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사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앞장서서 돌격하시며 우리를 위해 승리를 쟁취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승리를 누리기를 그토록 어려워합니까?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목회자는 교인을 무서워하고, 남편은 아내를 무서워하고, 아내는 남편을 무서워하며, 어떤 엄마는 자식을 무서워합니다. 그야말로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 성경 말씀 아닙니까? 예수께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 중에 여러분이 행한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하나님의 능력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저는 지금도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려 하지 않는지, 왜 하나님의 승리를 누리려 하지 않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저 믿음으로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어제 한 자매님이 최근 자신의 영적 성장에 대해 간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50대 후반, 곧 예순을 바라보는 분인데, 예전에는 이곳저곳 교회를 전전하던 분이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며 마음은 늘 불안하고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속이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화인명정신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화인명정신학을 만난 것 역시 끊임없이 갈망하고 찾은 결과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구두충이나 옥황상제처럼 여기고, 자신은 마치 총알받이나 된 것처럼 이리 부딪치고 저리 치이며 늘 마음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자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제가 붕파파도 아니고 총알받이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늘 조마조마하게 매달려 있던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감사했습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졸아드는 것과 평안히 내려놓아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마음이 불안하게 옥죄어 오는 느낌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느낌은 정말 괴롭습니다. 저도 주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왜 마음이 늘 불안정할까? 왜 숨이 깊이 쉬어지지 않고 중간에 턱 막힐까?’ 주님을 믿고 난 후, 비로소 마음이 땅에 닿듯 온전히 안식을 얻었습니다. 붕 떠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편안해졌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이 평안은 여러분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는 영생이라는 것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고작 20대였으니 영생은 아득해 보였습니다. 영생은 고사하고 쉰 살이 된다는 것조차 아득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나이가 되었고, 영생과 점점 더 가까워졌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믿음의 길을 가다 보니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용사이십니다. 그분을 장군이나 사령관이라고만 표현하면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용사이시다’라는 표현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님들의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겠습니까? 마음을 평안히 내려놓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서 싸우고 계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바꾸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을 바꾸려 합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느끼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모든 성도님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장결석을 앓고 있는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아무개의 우울증도 치유되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는 “아닙니다, 제 병은 우울증이 아니라 신장결석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앓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그 결석이 황산의 거대한 바위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20년 된 류머티즘 관절염도 깨끗이 나았는데, 그 얼마나 힘든 병입니까? 다 치유되었습니다.” 형제는 “제 결석은 관절염과 다릅니다. 그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그렇게 작게 보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석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아무개도 오래된 신장결석이 치유되어 돌이 빠져나왔습니다.”라고 하니, 그 형제는 “목사님, 제 결석은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그 어머니가 바른말을 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남을 가르칠 때는 믿음이 그렇게 크더니, 막상 네 일이 되니까 왜 그렇게 겁을 먹느냐? 왜 온갖 핑계만 대느냐?”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의 목회자가 최근 그를 붙잡고 끈기 있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저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는 성도들을 위해 오래 기도해 주기를 권면합니다. 소그룹 목회자의 섬김이 부족하다면 교회 내의 여러 사역을 통해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기도한 결과,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지만 2밀리미터, 3밀리미터 크기의 결석이 배출되었습니다. 사실 2밀리미터든, 3밀리미터든, 5밀리미터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나님께 2밀리미터와 5밀리미터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홍해든 요단강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목회자가 기도를 잘해서 나은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앞서 싸워 주셨기 때문입니까? 성도 여러분, 그 형제에게 치유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그 안에 대단한 믿음이 있었을까요? 솔직히 큰 믿음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앞서 싸워 주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이 그 2밀리미터짜리 결석보다 큽니까? 홍해의 깊은 바닷물보다 깊습니까? 바로 왕의 군대보다 강합니까? 여러분이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형편없습니까? 그들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앞서 싸우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전능한 용사가 아니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난제를 우리에게 떠넘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앞서 모든 난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용사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불안해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분께서 반드시 우리를 이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승리의 길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시는 과정이며,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결코 패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위해 이루십니다.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와도, 앞에 놓인 것이 홍해든, 사해든, 흑해든, 우리 앞에 오만만이 있든 페르시아만이 있든, 태산이든 화산이든 그 어떤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다 해도 우리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앞서 싸우시며 우리를 위해 승리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므로 이명이든, 시각장애든, 다리를 저는 것이든,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미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믿음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취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합시다. 여러분이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워 이기시는 것입니다. 당뇨병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번 시작하면 마귀가 떠나갈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입니다. 어떤 분이 묻습니다. “목사님, 가장 길게 인내하며 기도해 보신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제가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질문인가?’ 몇 달 동안 붙잡고 기도한 적이 있냐고요? 있습니다. 몇 년 동안 기도한 적이 있냐고요? 있습니다. 십수 년, 수십 년 동안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돌이켜 회개하고 주를 찾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들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압니다. 속으로 ‘아이고, 대체 얼마나 더 버텨야 하나? 아이고 세상에,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서서 물이 갈라지기 전까지 마음을 졸이며 불안해했던 것과 같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 죽게 하느냐?” 그러다가 홍해를 건너고 나서는 소고 치고 춤추며 “오,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노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우습게 행동합니다. 문제만 생기면 또다시 마음을 졸입니다. 차라리 그 불안한 마음 대신 믿음을 끌어올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믿음을 품으실 수 없겠습니까? 문제의 해답은 홍해냐, 흑해냐, 사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용사이시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멘이십니까?!

본문 말씀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애굽기 15:1-11)

기도

하나님, 주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용사이십니다. 하나님,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끄사 마른 땅같이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하나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멸하십니다. 하나님,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듯이, 오늘날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어 주시옵소서.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를 신뢰하고 온전히 의지하오니, 주님의 승리를 취하고, 주님의 약속을 누리며, 주님의 형상을 나타내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용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아십니까? 참으로 신기한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누구의 역사였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휘두른 적이 없고, 화살 한 대 쏜 적이 없습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 친히 그분의 손으로 애굽 왕 바로를 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여러분이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열 가지 재앙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데, 그들을 몇 바퀴 돌리시더니 어디로 데려가셨습니까? 바로 홍해 앞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자 바로에게 첩보가 들어옵니다. 붕파파처럼 달려와 보고합니다. “바로 왕이시여!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들이 홍해 가에 진을 쳤으니, 군대를 보내기만 하면 그들을 전멸시키고 다시 노예로 잡아오며, 그들이 가져간 재물도 도로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당시 바로 왕은 경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금융 시스템과 재정 체계가 다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산업과 농업 생산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00만 명의 노동력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GDP고 뭐고 다 끝장난 것입니다. 바로는 ‘이 일을 어찌할꼬? 이 많은 인력을 어디서 다시 구한단 말인가?’ 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어떻게 치셨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병거와 말을 정비하여, 가장 막강한 애굽 군대와 최고의 병거, 명마, 장군, 정예병들을 개미 떼처럼 총동원하여 홍해 가로 맹렬히 추격해 왔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은 기겁했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다 끝났다, 다 죽게 생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기둥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막으셨습니다. 애굽 군대가 다가오려 하면 불기둥이 활활 타오르며 가로막았고, 애굽 군대가 방향을 틀면 불기둥도 따라 움직이며 길을 막았습니다. 전무후무한 장관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기둥 이편에 있고 애굽 군대는 저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불기둥은 보지 못하고 애굽 군대만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패역하지 않습니까?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이고, 다 죽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니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란 말이냐?” 도망치긴 어디로 도망칩니까? 그때 모세조차도 조금 당황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여호와가 용사인 줄 알지 못하느냐? 부르짖을 것 없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모세가 무엇을 했습니까?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자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이 관계가 조금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까?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하나님께서 앞서 바닷물을 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말을 들으신 것입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낮아지신 것입니까? 비굴하게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손에 쥔 권세를 사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싸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공부해 왔습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도 이런 경험을 무수히 했습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이 내 말을 듣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이름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귀신을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사이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후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애굽 군대는 바다 밑에 수장되었습니다. 바로 왕은 그것이 자연현상인 줄 알았습니다. 바닷물이 갈라져 서 있는 것이 어찌 자연현상이겠습니까? 여호와의 권능의 팔이 물을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건너자, 바로 왕은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어라, 바닥이 말랐네? 우리도 건너가자’ 하며 뛰어들었습니다. 자연현상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수장되어 전멸하고 만 것입니다.

군대가 전멸했을 때 보통 물에 빠지면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단 한 구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돌처럼 짓누르셨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떠올라야 마땅하지만, 납처럼 돌처럼 짓눌려 단 하나도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난생처음 보는 이 광경에 압도되었습니다. 결말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고난을 만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입에서는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가에서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찬양했듯이 기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사람이란 이렇습니다. 방금 전까지 “애굽에 매장지가 없더냐?” 원망하다가도 문제가 해결되면 춤을 춥니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모세의 찬양은 이러했습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이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기적이 얼마나 많은지 다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용사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용사이시며 크고 두려우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멸하려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멸하십니다. 믿으십니까?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나약한 산타클로스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흐리멍덩하거나 우유부단하여 아무것도 못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용사이십니다. 대적은 결코 우리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수많은 기적을 경험한 결과가 아닙니까?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만약 제 하나님이 지극히 크고 영화로우며 찬송할 만하고 두려운 분이 아니시라면, 제가 영적 세계에서 매일 귀신들을 쫓아내고 쑤셔댈 때, 제가 잠든 사이에 귀신들이 저를 공격한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 이만한 믿음조차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고 애굽의 장자들을 다 멸하셨습니다. 그중에는 한 살배기도 있었을 것이고, 갓 태어난 아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찌 그리 냉혹하십니까?”라고 묻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수많은 애굽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셨습니다. 그 수가 수천이든 수만이든, 순식간에 수만 명의 과부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과부가 몇 명 생기는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라면 그런 일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싸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렇게 찬양을 부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길을 떠나 사흘 길을 걸었으나 마실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의 생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또다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였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묻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애굽을 물리치신 용사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데, 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광야에는 물이 없다. 그래,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애굽 군대는 수장시킬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바다였고 여긴 광야인데……” 온갖 핑계를 댑니다. 사람이란 늘 이렇습니다. 이런 악습을 끊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이 핑계, 내일은 저 핑계를 대며 “무엇을 마실까?” 염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잠깐 시험해 보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크고 두려운 분이심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며칠 전만 해도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찬송하리라” 노래해 놓고, 물이 없다고 구원하시지 못할 것처럼 굽니다. 사람이 이런 불신앙을 품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거듭해서 은혜를 경험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조그만 일만 생겨도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신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감독하시는 인생의 드라마 속에서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결국 마실 물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어찌 물이 없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쟁할 때는 용사이시며, 평상시에는 우리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채워집니다. 더 나아가 엘림에 이르니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습니다. 광야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엘림이라는 유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그분이 용사이심을 알게 하시며, 여호와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깨달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안의 믿음을 점검하고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필요는 통장의 잔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비극을 맞이하기 쉽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라

이 말씀은 참으로 진실합니다. 홍해 앞에 선 모세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곁에서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 상황을 어떻게 버텨냈겠습니까? 매 순간이 일 년처럼 길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미약한 믿음 하나 붙들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미래가 어찌 될지 알지 못한 채 버틴 것입니다.

‘차라리 땅을 파고 나를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이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모세였다면 그 중압감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요, 나의 노래시며, 결국 나는 서서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이것은 모세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이 광야 길을 다 지나갈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것이며, 주를 높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비록 힘이 쇠약해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시고, 여러분이 답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해답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수고를 아십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노래시니 내가 주를 찬송하리로다!” 고난 중에 계신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당면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 하나님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며칠 전 한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그 가정의 형편은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딱했습니다. 며칠 전 자매님이 “목사님, 고향 집에 다녀와야겠습니다.” 하기에 “다녀오십시오.” 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밥을 굶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일흔일곱 되신 어머니가 온 가족의 밥을 해 오셨는데, 아버지는 밥할 줄 모르고, 오빠도 할 줄 모르고, 올케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며칠째 식사를 못 하고 있었습니다. 세탁기도 돌릴 줄 몰랐습니다. 배달 음식을 시킬 돈도 없어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자매님이 “제가 가서 가르쳐주고 오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아이의 처지가 참으로 안쓰러웠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가서 많이 기도해라. 하나님이 너의 힘이 되신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고학력자인 저도 집안일을 웬만한 가사도우미보다 잘하는데,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손 하나 까딱 못 해 생활이 마비되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그 자매의 힘이 되심을 압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2년 전 우리 교회의 한 자매는 특별한 기술도 없고 직장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번 돈은 오빠가 가져가거나 아버지 병원비로 다 들어가 빈털터리였고, 갑작스럽게 실직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녀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당신의 힘이십니다.”라는 권면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으로 그녀의 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힘이십니다. 그분은 모세의 힘이셨고, 여호수아의 힘이셨으며, 갈렙의 힘이셨고, 다윗의 힘, 사무엘의 힘이셨으며, 오늘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그분은 나의 노래요 나의 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생명은 진실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내 생명이 주의 손에 있으니 주께서 반드시 나를 구원하실 것이며, 나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주를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보이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늘 우리를 덮고 계심이 보입니다. 제가 코로나에 걸려 20일 동안 고열과 식은땀, 호흡 곤란으로 고통받을 때,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며칠 전 성도님들이 “목사님, 저희도 목사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마귀는 제 목숨을 노렸지만, 구원하신 분은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용사이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분은 나의 구원이 되셨고, 나의 힘이 되셨으며, 나의 노래가 되셨습니다!

숨이 넘어갈 뻔했지만 살아났습니다. 그 후 다른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호흡이 남아 있는 한 영원토록 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오늘까지 지내오며 생각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요, 내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주님이 나의 구원이시요 치료자이신데 제가 다른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그때 기도관을 삽입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병원에 가고 싶으면 치료를 잘 받으시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성실히 임하십시오. 제 절친한 친구 하나는 기도관을 삽입하고 네 달 동안 연명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약물 남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죽기보다 과도한 약물 때문에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는 그분의 백성이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아십니까?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백성이며, 오직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습니다! 영원토록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내 평생이 주님께 향기로운 번제물로 드려지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그분은 나의 힘이시요, 나의 노래시며, 내가 찬양할 하나님이요 나의 구원이신데, 그분께 나를 드리지 않고 누구에게 드리겠습니까? 그 누구도 내가 하나님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나의 사명이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도 이 마음을 품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아니며, 사업이나 자녀, 부모, 남편이나 아내가 여러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내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자신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환경을 바라보며 다시 낙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직장을 바라보고, 처한 환경을 바라보며 세상의 논리 체계와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흔들립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힘이 되기를 원하시며, 여러분을 승리케 하사 여호와가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라

여호와는 용사이시며, 나를 위해 싸워 승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뒤편에는 여호와께서 왕이시라 하였는데, 우리는 왕과 용사의 개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왕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여호와는 용사로서 친히 우리 앞서 행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골고다 길을 걸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사 우리를 위해 영광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는 용사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음부에 내려가 원수를 사로잡으시고,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셨습니다. 내가 오늘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이며,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나는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이며, 주께서 영원토록 나를 위해 싸우십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싸워 이기는 줄로 착각해서도 안 되고, 사도 바울이 싸워 이긴 줄로 알아서도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것입니다.

깨달으셨습니까? 이제 마음을 새롭게 합시다. 그분은 높이 계신 왕이실 뿐만 아니라, 친히 우리 앞서 행하시는 전능한 용사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는 용사이시다’라는 진리를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영적 전쟁 승리의 신학은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음부와 사망의 열쇠를 쥐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누구를 신뢰하겠습니까? 오늘 내가 살아 숨 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

본문 말씀은 애굽 왕이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기록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애굽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했을 뿐이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할 줄 모르고 여호와가 우리의 용사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지라도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가 감히 여러분을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주의 법도와 규례와 계명을 지키며 주를 신뢰하십시오. 그리하면 누가 여러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여러분을 공격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치는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치실 것입니다! 인간적인 권모술수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신들 중에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는 분이 우리 주 외에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실 때, 여러분을 위해 싸우지 않으신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연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출애굽 때에 이미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고치셨으니, 그분은 변함없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질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온전히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올렸듯, 일어나 손에 쥔 권세를 취하고 하나님을 힘입어 승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서 용사로 행하사,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마귀 원수를 친히 멸하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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