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 우리는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는 시리즈의 두 번째 설교로,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은 라반이 리브가에게 한 축복의 말이지만, 실로 놀라운 말씀이며 리브가를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참 기이한 법칙이 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고 해서 돈이 벌리는 것이 아니고,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단순한 생각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행하는 그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내는 결과는 바로 사람 내면에 있는 자기 논리의 산물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신마비가 되었다면, 그 사람 내면에 스스로를 마비로 이끈 일련의 논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암에 걸릴까요? 그 내면에 자신을 암에 걸리게 만든 고유한 논리가 들어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유기농 식품을 참 좋아하고 건강 관리에 매우 밝지만, 가장 무서운 독은 바로 마음과 생각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다면, 사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다음 날 다 배출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사람의 삶의 결과는 그 사람 내면에 담긴 논리 체계의 반영입니다. 예전에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 한 원로 목사님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네가 세운 교회의 마지막 모습은 바로 네 성품의 반영이다.” 이제 저는 압니다.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런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을요. 만약 사람의 내면에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가득 차 있다면, 그가 살아내는 삶은 부패와 패망뿐입니다. 우리 중에도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린 분들이 적지 않은데,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사기를 당하고도 여전히 공허와 혼돈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 번 사기당하면 해방 전으로 돌아가고, 두 번 사기당하면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아간다고요.
우리는 왜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라는 말을 붙들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 체계는 영적인 논리 체계입니다. 만약 당신 내면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영적인 논리 체계가 들어서 있다면, 사실 굳이 모든 것을 다 시시콜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어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런 것도 일일이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주 안에서 좋으면 된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낼 삶의 결과는 바로 존귀와 영광과 썩지 아니할 복락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사실 제가 하는 말도 맹목적으로 믿지 마시고, 스스로를 잘 관찰해 보십시오. 자신이 언제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품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때마다 몹시 힘들고 괴롭고 마음이 답답해질 것입니다. 답답함과 고통이 오래 지속되면 헛된 마음의 병이 실제 육체의 병으로 변합니다. 반면에 리브가처럼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당신 안에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 위에 넘치도록 부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늘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는 점입니다. 한순간은 세상에 속했다가 또 한순간은 하나님께 속하고, 영적이었다가 세상적이었다가, 다시 영적으로 돌아오고… 아이고, 세상에. 윗몸일으키기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합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60층 빌딩이라고 치면, 잠깐 올라갔다가 금세 다시 내려오니 평생 계단만 오르내리다 끝나는 셈입니다. 마음이 번잡하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깊이 관찰하고 연구해 보십시오. 연구해 보면 자기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영원 안에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복을 구하는 자이며,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영생으로 갚아 주십니다. 반대로 사람이 구하는 것이 온통 이생의 것이요 썩어질 것뿐이라면, 하나님은 진노로 그에게 보응하십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참으로 기이한 현상들을 많이 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던 어떤 목사님이 암에 걸려 사람이 겪기 힘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암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겁고 큰 질병이요, 길고 오래가는 재앙인데,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한다고 해서 다 통할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착오가 없으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참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자기만의 작은 안일한 삶(소확행)을 살지 말라’는 말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 작은 일상을 즐기며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사세요, 네? 제가 사람을 억지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일상만 챙기며 잘 살아보세요. 어디 그 작은 삶이 정말 잘 풀리는지 한번 지켜봅시다.” 그리고 그 자매는 자기만의 작은 삶을 챙기러 떠났습니다.
예배도 드리는 둥 마는 둥, 말씀 노트도 적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하는 이 말씀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가 자기 일상만 챙기려 했던 그 속내, 그 논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내 작은 일상 하나도 제대로 못 꾸려가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요?” 당신은 《성경》을 도대체 어떻게 읽은 것입니까? 구약 《성경》에서 자기 일상에만 안주하던 사람들이 결국 잘되었습니까? 다 망하지 않았습니까?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나라가 망했는데도 여전히 그따위 작은 삶에 연연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말리지 않습니다. “자매님, 행운을 빕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눔을 하는데, 자매의 경추(목뼈)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경추 정도는 괜찮지요. 목뼈인데요, 뭐. 경추에 무슨 큰 문제가 있겠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진짜 치명적인 것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두 달 동안 마사지를 받아도 낫지 않았습니다. 저는 먼저 “이리 오세요, 기도해 드릴게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데 제가 굳이 기도해 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 달을 마사지만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의 일에도 문제가 터졌고, 남편과 가정 전체에 풍파와 소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일상만 챙기려다 맞이한 결과가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말씀드릴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늘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면 안전한 금고에 들어간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믿은 후에는 풀무불(오븐)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후 이 자매는 이리저리 치료를 받으러 다녔지만, 목의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고, 결국 경추와 흉추와 요추까지 마비 증세가 오고 말았습니다.
그 자매는 제게 기도해 달라고 찾아오지도 않았고, 찾아오지 않으니 저 역시 굳이 쫓아가서 나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바라던 작은 일상을 얻었습니까? 작은 일상은커녕 집안이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왜 끝까지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요? 그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세상을 주관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제가 이런 논리를 전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살면 무슨 낙으로 삽니까?”라고 쏘아붙입니다. 아이고, 세상에!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면 삶이 제대로 안 돌아갈 줄 압니까? 저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최고로 잘됩니다.
다윗이 세운 왕국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왕 시절에 가장 강력하고 번영했습니다. 다윗의 삶이 어찌 잘 풀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자기 배만 불리는 작은 일상에 갇혀 살다가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고 결국 영적으로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영계의 일이 이생의 일을 주관하며, 축복과 저주의 법칙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축복과 저주의 개념은 매우 명확하며,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축복의 법칙과 저주의 법칙은 《성경》 속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불타는 심판의 상자에 들어가지 말고 승리자의 상자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사람은 믿기만 하면 무조건 안락한 금고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은 후에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하여 원수의 성문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삶이 망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발 지혜로워지십시오.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는 줄이고, 날마다 하나님의 기쁨은 더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화인 사명신학(华人命定神学)은 기독교 안에서 수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현상들을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그 모든 혼란스러운 현상의 핵심은 바로 ‘승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화인 사명신학에서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것 없이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이삭을 숨기며 “하나님께 바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못 바칩니다”라고 했다면,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라는 것은 참으로 엄중한 문제입니다. 절대로 미끄러져 저주 속으로 굴러떨어지지 마십시오! 사람이 저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대소변도 못 가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밥도 못 먹어 몸에 줄을 여러 개 꽂고 살게 되는데, 그것이 너무나 흔한 일이 되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이 말씀은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도 참으로 비범하고 유별난 사람이었고, 리브가 역시 대단히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 또한 별난 사람이고, 여러분도 참 유별난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이렇게 오랜 세월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별나지 않습니까? 참으로 별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한두 명이 아니라 정말 많은 분들이 제게 이렇게 간증합니다. “목사님, 예전에는 의료보험 한도를 다 쓸 정도였는데, 지금은 의료보험을 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의료보험 규정이 엄격해져서 살 수 있는 약이 줄어들었다면, 그냥 돈을 아끼시면 됩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에 오고 나서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료보험으로 몇천만 원을 아낀 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 아픈 고통과 지독한 고생을 면하게 된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목숨을 건진 일입니다!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까지 갈 것도 없이, 허리와 목 디스크 통증만 해도 그 고통은 정말 뼈저린 것입니다. 참으로 괴롭습니다! 그런데 왜 치유되었을까요? 제 설교를 꾸준히 듣고 내면에서 추구하던 것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추구하던 것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들이었지만, 지금 추구하는 것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인생에 참된 소망과 목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살아가는 데 무슨 소망이 있었습니까? 그저 죽음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가는 황천길을 왜 그리 서두릅니까? 왜 그리 바쁘게 멸망으로 내달립니까?” 그런데 이제 그 황천길이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더 이상 사망의 길이 아니라 영생의 도, 영생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제게 친구 신청을 보냈기에 저도 수락했습니다. 친구가 된 후 그분은 낯선 사람과 온라인으로 대화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요즘 저도 이런 소통이 꽤 흥미로워서 대화를 좀 나누어 보았습니다.
얼마 후 그분이 제게 말하기를,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왜 이렇게 마음이 즐겁고 행복해지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더군요. 농담이 아니라 제게는 정말 그런 은사가 있습니다. 저와 깊이 교제하다 보면 반드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저와 연결되었냐고 묻는데, 저는 페이스북(Facebook)도 있고 틱톡(TikTok)도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친구 추가를 하면 저도 수락하고,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며 사역을 합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마다 기쁨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빚이 아주 많았는데, 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점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빚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기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빚이 많은 사람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6억 위안(천억 원대)의 빚을 지고도 멀쩡히 잘 사는데, 당신 빚은 얼마입니까?” “에이, 저는 6억 위안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얼마인데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그럼 말하지 마세요. 6억 위안 빚진 사람도 기쁘게 사는데, 1억 위안이라도 기쁘게 살아야지요.”
어떤 사람이 6백만 위안의 빚을 지고 힘들어할 때 저는 오히려 의아해하며 묻습니다. “차라리 6억 위안을 지지 그랬어요? 6억 위안쯤 되면 평생 빚 갚겠다는 집착이라도 딱 끊어질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기뻐하다 보면 상황은 점점 좋은 방향으로 풀려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 내면의 갈망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만의 작은 일상에 얽매일수록 삶은 더 꼬이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복을 사모할수록 삶은 더욱 번창해집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더 훌륭했습니까, 롯의 삶이 더 훌륭했습니까? 당연히 아브라함의 삶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삭의 삶은 번성했습니까? 당연히 번성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대의 위대한 족장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요셉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지극히 형통했습니다.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복된 길로 걸어가야 하며, 결코 미끄러져 저주 속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훗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아,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바로 이삭의 영성이 있고, 제 안에 리브가의 영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자였다면 리브가가 되었을 것이고, 남자이기에 이삭이 된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리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고, 그로 인해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의 생활 논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살 능력이 되는 것은 사고, 감당하지 못할 것은 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지도 못할 물건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괴로워하는데, 사서 고생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먹을 형편이 안 되면 안 먹고, 살 돈이 없으면 안 사고, 쓸 여유가 없으면 안 씁니다.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제 내면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 곧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을 축복하게 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진정으로 기뻐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두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고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기를 사모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가니라 (창세기 24:58-61)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러한 감동을 부어 주옵소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수많은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하옵소서. 이삭을 본받고 리브가를 본받아 원수의 성문을 얻기를 열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원수의 성문을 취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든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고 천만인의 축복이 되기를 사모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사용하여 주셔서, 오직 주께 쓰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이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여,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눌린 자가 해방되며 음부의 권세를 짓밟게 하옵소서. 우리 모든 성도가 주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온전히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내가 네게 큰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전에 받았던 복들은 작은 복에 불과했습니다. 이전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바로가 사라를 빼앗아 갔지만, 아브라함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사라를 돌려보내게 하셨고, 바로는 수많은 소와 양 떼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복이겠습니까? 겉보기에는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큰 복’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복을 구하고자 한다면, 저 크고 영원한 큰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 큰 복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후손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당신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원수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도시 전체를 손에 넣는 것이며, 원수의 성읍을 빼앗아 오면 그 도시의 모든 세금이 당신의 것이 되는데 어찌 재물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냐”고 하겠습니까? 대적의 성문을 취하는 순간 물질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당신이 그 도시의 도시계획을 결정하고, 그 도시의 재정을 어떻게 집행할지 주관하게 됩니다. 물론 연간 재정 계획도 세워야 하고 온 도시를 온전히 경영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참으로 복됩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그런 게 내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미련한 자들만이 그렇게 말하며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이야기는 온 땅에 멀리 퍼져나갔고, 마침내 어디까지 전해졌습니까? 바로 리브가가 있는 곳까지 전해졌습니다.
이삭이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하나님께서 친히 어린양을 예비하셔서 이삭이 제단에서 살아서 내려왔다는 이 이야기가 온 사방에 퍼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실로 위대했고, 이삭 또한 참으로 비범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여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바라는 건 원수의 성문 따위가 아니라, 이삭이 나를 진심으로, 오직 나만을 뜨겁게 사랑해 주는 거야”라고 반응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배우자를 찾는 수많은 미혼 여성들이 글을 올리며 오직 ‘자신만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리브가라는 아주 유별난 처녀가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가 있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훈련된 것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리브가라는 인물 자체를 살펴보십시다. 리브가에게는 드보라라는 유모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드보라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드보라는 《사사기》에 나오는 여사사로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인물입니다. 드보라의 남편은 아내가 워낙 뛰어나 사사가 되었기에 왕의 남편(부마)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모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드보라’라 칭하며 마음속에 원대한 뜻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리브가를 양육했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할까요? 사람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가 인생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이 유모 드보라는 비록 고용된 몸종에 불과했지만 마음속에는 거룩한 뜻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리브가를 돌보면서 늘 아브라함 가문의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모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이삭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져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된 역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리브가의 마음에 이러한 영적인 비전과 하나님의 행적을 끊임없이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유모의 깊은 영적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 유모 드보라는 《창세기》에 특별히 기록될 만큼 비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유모의 가르침을 받은 리브가의 머릿속은 온통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비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으로 남다르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거 구해서 뭐 하냐? 그저 남편이 나 하나만을 끔찍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면 그만이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보라와 리브가의 마음의 도량은 결코 그런 사사로운 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의 마음에 품은 뜻은 바로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왜 그녀는 그것을 원했을까요? 하나님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뜻을 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왜 재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지 아십니까? 어떤 분들의 헌금은 우리가 정중히 사양하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하고 드리는 헌금을 굳이 받을 이유가 없으며, 우리는 돈에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내면, 우리의 비전 속에는 ‘온 땅의 만국과 만민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리라’는 거룩한 사명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언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하기 시작할 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 안에도 바로 이 논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의 논리는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성경》 말씀을 읽으며 얻은 것입니다. ‘아, 아브라함이 이것을 구했구나, 그렇다면 나도 이것을 구하리라! 이삭이 이것을 구했구나, 나도 이것을 구하리라! 야곱이 이것을 구했구나, 나도 이것을 구하리라!’ 이것이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지 아십니까?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줍니다. 제가 이 비전을 붙들고 나아가자 성도님들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구한 것은 오직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도 리브가도 그 마음속에 갈망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리브가는 날마다 오라비에게 “나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 것이며, 내 후손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오라비는 그녀를 비웃으며 “내 누이가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시집가고 싶으면 아브라함에게 사람을 보내 이삭에게 시집가겠다고 해보아라.” 그러나 리브가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보내어 나를 데려가실 것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한편, 노년의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난 후 이삭이 날마다 비탄에 잠겨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깊이 생각한 끝에 아들을 위해 아내를 얻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늙은 종을 불러 고향 본토 친척에게로 가서 아들을 위한 신붓감을 데려오라고 명하며, “만약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 하지 않거든 이 맹세는 너와 상관이 없으리라”고 일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섭리입니까!
한쪽에서는 리브가가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어 리브가를 맞이하러 떠나보냈습니다. 낙타를 끌고 예물을 가득 실은 늙은 종이 길을 가다가 한 우물가에 이르러 기도했습니다. “내가 한 소녀에게 물을 청할 때, 내게 물을 마시게 하고 내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먹이는 그 처녀가 바로 주께서 택하신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때 리브가가 나타났습니다. 리브가는 물동이에 물을 길어 늙은 종에게 마시게 한 후, 스스로 먼저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 먹였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기 어렵습니다. 리브가가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사람이 목이 마르면 짐승인 낙타도 목이 마르지 않겠는가?’ 참으로 총명한 여인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낙타를 위해서도 물을 긷겠나이다.” 늙은 종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 주인의 아들 이삭을 위해 예비하신 아내로구나!’ 주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절묘합니까? 어찌 이토록 맞아떨어질 수 있습니까? 종이 우물가에 이르자마자 리브가가 물을 길으러 나왔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였습니다.
이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역사하셨을까요? 바로 사람 내면의 ‘갈망’을 따라 역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에 있는 사모함을 따라 일하십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고자 하는 갈망이 가득하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반대로 마음속에 그저 자기만의 작은 안일함만 갈망하면, 하나님은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 같은 고통을 남겨 주실 뿐입니다. 미련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원을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바로 아브라함의 친족이었습니다.
항렬로 따지자면 리브가에게 아브라함은 할아버지뻘이고 이삭은 삼촌뻘이었습니다. 그러나 항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리브가가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중에 리브가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이삭의 믿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80대 노인이 20대 처녀와 결혼하고 장모가 60대인 세상사도 있는데, 거룩한 언약 안에서 족보상의 세대 차이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저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갈망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마음속에 온통 더럽고 썩어질 세상 것만 탐하면 하나님은 진노로 보응하십니다. 그러나 내면에 천만인의 축복이 되고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기를 사모하며,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기를 열망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복을 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연이 겹쳐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치부하지만, 저는 그런 거룩한 우연을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그런 기적 같은 우연을 한번 만들어 보십시오. 이것은 하늘이 이루신 필연적인 역사입니다.
그 후의 일도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종은 “내일 당장 떠나겠습니다. 하룻밤만 묵고 내일 리브가를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럴 수는 없다. 아이가 어머니와 오라비와 함께 며칠이라도 더 정을 나누며 머물러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떠나면 평생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데 안 된다”라고 만류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리브가를 불러 물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지금 가겠느냐?” 그러자 리브가는 “가겠나이다!”라며 주저함 없이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조급함이었습니다.
며칠 더 머물다 가면 안 되었을까요? 육신의 정에 얽매여 며칠 더 지체한다는 것은 여전히 가족과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즉시 뒤로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가 결단하고 떠날 때, 오라비와 아버지는 리브가를 축복하며 선포했습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실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사람들의 관계를 깊이 묵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삭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큰 슬픔에 잠겨 위로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 증언합니까?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어 사라의 장막에 들어갔을 때, 이삭이 비로소 어머니를 여읜 슬픔에서 위로를 얻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삭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믿음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까? 바로 어머니 사라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사라는 실로 비범한 여인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이삭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려지는 자로 훈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유모 드보라에게 배웠습니다. 유모가 가르쳐 준 비전이 무엇이었습니까?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고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대적의 성문을 취할 언약의 후사인 이삭에게 시집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왜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고서야 온전한 위로를 얻었을까요? 이삭과 그의 어머니 사라는 같은 영적 가치관을 공유한 영혼의 동지(知音)였습니다. 이삭처럼 생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오늘날 교인들 중에서 찾으려 한들 몇 사람이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라처럼 자녀를 온전한 헌신자로 양육하는 어머니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이삭은 어머니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기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영적인 뜻을 나눌 동역자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높은 산 흐르는 물에서 참된 지기를 찾는다’는 말처럼, 뜻을 같이하는 영적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삭은 자신의 비전을 나눌 상대를 잃고 적적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리브가가 나타나 영혼의 참된 동지가 되어 준 것입니다. 비범한 이삭이 비범한 리브가를 만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버지와 대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다 큰 부자지간에 마주 앉아 속 깊은 감정과 비전을 일일이 나누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참된 위로를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갈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은혜가 임합니다. 이 거룩한 갈망을 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저는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갈망들을 관찰하면서 참으로 흥미롭고 깊이 연구해 볼 만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갈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최종 결과는 그 갈망과 철저히 결부되어 나타납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 갈망의 내용은 사람의 영적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지하면 큰 화를 부르게 됩니다. 들개는 그저 뼈다귀 하나만을 갈망하듯, 사람의 갈망도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을 온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전 세계에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도 대단히 많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지금 저의 갈망은 무엇일까요? 저는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물론 중화권 사역도 쉼 없이 감당하겠지만, 저의 또 다른 갈망은 화인 사명신학(중화권 사명신학)이 온 영어권 세계에도 거룩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실로 방대합니다. 일본, 한국,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호주,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유럽, 아프리카, 남미에 이르기까지, 일부 프랑스어권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영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포기할 것 같습니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 안에 진정한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할 때 주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런 거대한 일을 사모합니까? 그냥 교회의 규모를 키우고 유명해지는 것을 갈망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왜 교세나 확장하고 외형을 키우는 따위를 갈망하겠습니까? 저의 유일한 갈망은 수많은 영혼에게 생명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온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신학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화인 사명신학이 비록 중화권에서 태동했으나,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 시대에 가장 견고하고 온전한 체계를 갖춘 신학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천만인의 축복이 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오직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왜 이것을 구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에서 리브가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시며, 이삭과 같은 중심을 가진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품었던 그 영적인 갈망을 품은 자들을 지금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당신은 무엇을 사모합니까? 많은 이들이 그저 최고 갑부(首富)가 되기만을 갈망하다가 결국 파멸로 치닫습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돈만 좇던 사람들이 최고 갑부(首富)에서 최고 채무자(首負, 중국어로 발음이 같음)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비극입니다.
중국어 표현이 참 절묘합니다. 부유할 ‘부(富)’의 최고 부자가 빚질 ‘부(負)’의 최대 빚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제게 1억 위안(수백억 원)의 돈이 떨어진다면 도대체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할 것입니다. 그 돈을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투자처를 찾아 헤매야 하고, 인플레이션이라도 오면 가치가 떨어질까 전전긍긍해야 합니다. 결국 그 돈이 나를 섬기는 것인지, 내가 그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섬기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막대한 재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 많은 돈을 쥐어준들 감당할 수도 없으며, 사실 그것은 허무한 일입니다. 최근 쑤닝(Suning) 그룹을 보십시오. 400억 위안의 자산을 가지고 2천억 위안이 넘는 빚을 져서 휘청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이할 따름입니다. 지나친 재물은 사람을 해칠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진정 무엇을 갈망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갈망하는 것은 오직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제 삶을 돌아볼 때마다 깊은 경이감을 느낍니다. ‘내가 이 땅에 무엇 하러 왔는가?’ 내 동의를 받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 땅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만약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를 온전히 세워 영혼들을 살리는 이 사명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허무했겠습니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낫지, 무슨 낙으로 사나’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영원 안에서 빛날 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영원한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내게 손해를 입히거나 나를 이용하려 해도 ‘좋다, 괜찮다’ 하고 넘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소한 이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조금 손해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내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고, 내게 주신 거룩한 사명(命定)을 빼앗기지 않는 한 아무 문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이 어찌 형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사람은 실로 놀라운 권세를 가집니다. 주님의 임재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갈망하라고 명하신 것을 사모해야 하며,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저의 내면은 늘 이렇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아등바등 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면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나는 이 헛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거룩한 사명을 온전히 이루며 살아가리라!’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절대로 돈을 갈망하지 마십시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영혼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오직 축복과 저주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찾아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할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수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걸음을 친히 인도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구하는가
앞서 우리는 ‘구함’에 대한 시리즈를 나누었습니다. 리브가는 평생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기를 구했고, 자신의 후손이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도록 이삭에게 시집가기를 갈망했습니다. 날마다 그 뜻을 품고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오라비는 “아무도 너를 데리러 오지 않지 않느냐? 하루가 지나도 아무도 안 오니 이제 그 헛된 꿈을 접어라!”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단호했습니다. “저리 비키세요! 나는 오직 이것만을 구할 것이며, 이삭이 아니면 결코 시집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나를 데려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루를 기다리며 조금은 낙심이 되고, 또 하루를 기다리며 지칠 법도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종이 찾아왔을 때, 리브가의 마음이 얼마나 벅차올랐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땅에 엎드려 경배할 때 리브가는 결단했습니다. “내일 당장 떠나겠습니다.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만 자고 날이 밝는 대로 즉시 떠나겠습니다! 나는 이 날을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내가 갈망하고 구했던 것은 오직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요, 내 후손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라비가 “리브가야, 네가 그런 거창한 것을 구해서 도대체 무엇 하려느냐?”라고 물었을 때, 리브가가 논리정연하게 다 설명할 수 있었을까요? 다 설명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와 유모 드보라, 그리고 이삭과 같은 이들은 모두 성령에 속한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영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 세상에는 참된 소망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우리 성도님들이 이 썩어질 세상에 헛된 소망을 가득 품고 사는 것입니다. 제가 찬물을 끼얹어서라도 그 헛된 꿈을 깨울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찬물을 끼얹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슨 참된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일상만 챙기려던 자매는 결국 몸이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기를 구하고 그 후손이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기를 갈망했던 리브가는 어떠했습니까? 그녀의 삶은 지극히 복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훗날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 곧 리브가의 후손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리브가가 이 모든 섭리를 온전히 다 깨달았을까요?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우리 또한 알고 있습니다. 곧,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매여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전히 세상살이에 큰 재미와 기대를 걸고 있다면, 제가 말씀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거나 당신의 마음에 아직 깊은 영적 자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된 영의 눈이 열리면 오직 주님의 언약 안에 영원한 축복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갈망을 품은 자를 지극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구하십시오!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다
‘천만인의 어머니가 된다’는 이 거룩한 약속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을 때, 하나님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영생의 소망이 없는 자에게 그런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육신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진 후에 내 자손이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아진들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영생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소리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영원한 언약을 사모하는 자들은 참으로 위대한 자들입니다. 결코 평범한 도량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제 말을 잘 따라와 보십시오—우리가 지금 영생 속에 살고 있고, 장차 천년만년, 영원무궁토록 살아갈 존재라면, 하늘나라에서 내 영적인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빛나는 것을 바라보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얼마나 찬란한 영광입니까!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제가 천만 명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백만 명을 주께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십만 명을, 제가 만 명을 살려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결산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 “주님, 저는 땅에서 최대 채무자로 빚더미에 앉아 살았습니다.” “그래, 그 빚은 다 갚고 왔느냐?” “아니요, 다 못 갚고 그냥 주님께 왔습니다.”
그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모든 거룩한 성도들이 모여 있을 때 낯이 뜨거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구석으로 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간다면, 수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참된 영광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욕심입니까?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온전히 헌신했기에 영광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흘러나오느냐에 따라 그가 축복할 수 있는 영혼의 수가 결정됩니다. 어떤 교인들처럼 마음의 씀씀이는 땅콩만 하고 생각은 호두알만 하여, 날마다 자기 일상의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만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십시오! 왜입니까? 원수의 성문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네 후손이 원수의 성문을 얻으리라
리브가는 자신의 후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오실 줄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후손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영적 실체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고 내 모든 후손이 원수의 성문을 취하게 되리라’는 그 말씀 자체가 지극히 선하고 복되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했습니다. 원수의 성문을 빼앗는다는 것은 참으로 값진 일이며, 그 도시 전체를 점령하여 정복하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그녀는 비록 모든 신비를 다 헤아리지 못했으나, 이 말씀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누구의 입에서 선포된 것입니까?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후손으로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하리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니 얼마나 절대적이고 복됩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을 가리켜 ‘승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사 음부의 권세를 짓밟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원수의 성문을 취하고 흑암과 음부의 권세를 발아래 짓밟을 수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성경》의 모든 말씀,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모든 언약이 우리 삶 속에 실제가 되기를 사모하는 불타는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성경》의 모든 약속은 우리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저주하시리라는 그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놀라운 영적 특권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며, 조금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적 후손은 거대한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온라인 사역을 통해 이미 강력한 영적 영향력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분들이 제게 “류 목사님, 목사님 사역의 온라인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아십니까?”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제 저도 압니다. 수많은 교회가 우리의 훈련 교재와 말씀 자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수천수만, 헤아릴 수 없는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승리하고, 저마다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는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 마음속의 갈망을 바꾸십시오! 당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를 온전히 전환하십시오! 당신 내면의 사모함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한 언약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리브가는 희미하게 보았을지 모르나 우리는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셨습니까, 차지하지 못하셨습니까? 완전히 차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수의 성문을 얻었습니까? 이미 얻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지금 우리 머리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발아래에 있습니까? 결코 우리 머리 위에 있지 않으며, 오직 우리 발아래 짓밟혀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음부의 성문을 제압하고 다스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물질 따위로 사람을 돕는 차원을 넘어, 온전한 영적 승리의 권세로 만민을 축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고 흑암의 권세를 짓밟게 될 것입니다. 이 권세를 주셨기에 우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우리가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처지와 환난 가운데 처해 있든지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내면의 중심과 갈망을 바꾸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눈 녹듯 해결될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와 음부의 영들은 더 이상 우리의 축복을 도둑질할 수 없으며, 우리의 건강을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흘러내려 온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것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유업으로 이어받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야곱으로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선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자기만의 사사롭고 안일한 작은 일상에 얽매여 살기를 원하십니까? 더 이상 그러한 헛된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가 품어야 할 유일한 비전은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고, 온 땅의 모든 족속에게 영원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손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원수의 성문을 영원토록 차지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