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베드로전서 2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글을 쓴다면 어떻게 쓸까요? 저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중심으로 1차적으로 관련된 내용이든 2차적으로 관련된 내용이든 계층을 두어 차근차근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을 받고 교육을 받으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을 거치며 끊임없이 훈련된 결과입니다. 일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저는 한 가지 주제를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는데, 그것은 바로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내용들은 그 안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베드로라는 이 투박한 사람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투박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듣기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전서를 읽어보면 아주 잘 쓰여 있고 단어 하나하나가 힘이 넘치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리 매끄럽지 않습니다. 이는 저에게 커다란 난제를 안겨주었는데, 바로 베드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하는 점입니다. 그는 수많은 명언들을 쏟아냈지만 논리가 매우 어지럽습니다.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베드로가 쓴 글을 읽을 때 힘이 들 것입니다. 그가 한 말들은 다 좋은데, 한데 모아놓으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미안이라는 것은 매우 깊은 학문입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이케아 매장에 가면 찬장이나 소파가 다 좋아 보이지만, 집에 가져와 배치해 놓으면 ‘왜 이렇게 흉하지? 왜 매장에서 보던 것과 다르지?’ 하게 됩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자 하나하나는 다 좋아 보이지만, 모아놓으면 보기 흉합니다. 왜일까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매우 웅장하고 거창해 보이는 위대한 단어들을 그저 다 한데 모아놓았습니다. 만약 글을 이렇게 쓴다면 분명 엉망진창인 작품이 될 것입니다. 글이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서로 어우러지고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점점 자라나게 하라
제가 한번 노력해서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저는 만약 베드로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젖만 먹고 자랄 수 있습니까?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의 영적 수준은 늘 젖을 먹는 상태였기에 젖만 잘 먹었습니다. 그가 말한 것들을 보면 무슨 체계가 있습니까? 평생 교회를 섬겼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는 이방인 교회에 보낸 것인데, 그는 원래 유대인의 사도가 아니었습니까? 왜 이 이방인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을까요?
베드로는 영적인 젖을 마셔야 하고, 순전한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는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젖은 갓난아이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어른은 밥을 먹어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마시겠습니까? 베드로는 사실 순전한 신령한 젖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수준의 것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 말이 정말 좋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한 사람씩 몇 마디씩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처럼 입만 열면 청산유수처럼 아름다운 어휘를 한가득 나열하며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화려한 수사여구를 써가며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 서서히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비록 바울도 구원에 이르도록 점점 자라난다는 개념을 언급했지만, 바울의 말이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과연 젖을 먹는 예수님이겠습니까?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 마음은 복잡 미묘하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베드로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입만 열면 온통 거창한 영적 전문용어를 쓰면서 좔좔 한 시간 동안 떠드는데, 당신이 말하는 내용이 맞습니까? 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 동역자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베드로와 같은 습관을 들이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원고도 쓰지 않고 말을 한다면 머릿속이 극도로 혼란해져서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어떤 어린 목회자들은 입을 열면 세 시간씩 말하는 것도 문제없어서, 누군가 “식사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라고 넌지시 말하면 “저는 배 안 고파요”라고 대답합니다. 상대방은 자기가 배고프다고 눈치를 준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거창한 전문용어를 잔뜩 늘어놓아 듣기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정작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순교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순전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순전한 신령한 젖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멍뉴입니까, 이리입니까, 아니면 싼루 독분유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지각에 있어서 제대로 돌파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명사 몇 개를 불쑥 꺼내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낼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2:1-5)
베드로는 주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사실 주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거창한 명사들을 너무 남발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베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신령한 제사가 무엇이고 산 돌이 무엇입니까?” 사실 그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의 말투는 꽤 흥미롭습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고린도후서》11:6)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베드로를 포함해 화려한 명사들을 많이 늘어놓지만 그 도(道)는 결코 고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베드로전서》2:6)
그를 신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인데, 왜 앞부분에서 그토록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습니까? 저는 직설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빙빙 돌려 말하며 고상한 척하는 것은 이미 수많은 아이들을 망쳐놓았습니다. 그런 겉만 화려한 겉치레만 잔뜩 배워서 실제 영적 싸움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주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앞부분에 바로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단어들을 쓰기를 좋아하지만, 접속사들이 사실 문맥상 논리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쓴 글을 읽으려면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일까요? 그 안의 어떤 내용들은 기이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악독을 버렸는데, 다 버리고 나서야 신령한 젖을 사모한다니, 이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산 돌처럼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린다니, 이 관계가 너무 어지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 예수님을 신뢰하고, 성령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성령으로 악독과 기만,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다 제거했다면, 그때는 영적인 단단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직도 젖을 마십니까? 이렇게 관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은 것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엄격한 훈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엄격한 훈련을 거치면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게 되고, 생각을 거치며 말하게 되지,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엉터리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지어내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바로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주님은 비록 사람에게 버림받았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십니다”라고 한다면,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너희도 주님 앞에 나아와 산 돌 같이…”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오면 주님을 닮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산 돌 같이’라니, 산 돌이 대체 뭡니까? 읽다가 멍해집니다.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니, 신령한 집(靈宮)이 뭡니까? 자금성이 신령한 집입니까?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린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를 신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은 앞의 내용들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성령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며,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무너뜨린다—명확하지 않습니까? 명확합니다. 이것이 제가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영생을 보지 못하는 이생의 것들입니다.
진리 안에서 걸려 넘어지지 말라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2:7-8)
걸려 넘어지면 제사장은커녕 새똥이나 개똥 같은 신세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우리가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지각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며, 우리 안의 악독과 기만, 외식과 시기, 비방을 철저히 무너뜨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이것들을 죽이고, 그 후에 몸을 산 제물로 드리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거룩하고 존귀한 제사장이 되는 판에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는 왜 꺼냅니까? 거룩하고 존귀한 제사장이 된다면 걸려 넘어지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베드로가 언급했으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말했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거룩하고 존귀한 제사장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붉은 꽃을 돋보이게 하려고 푸른 잎을 곁들이듯, 혹은 푸른 잎을 돋보이게 하려고 개똥을 곁들이듯 대비시키려는 것입니까? 도대체 뭘 하자는 겁니까? “너희는 존귀한 제사장이요, 왕이며, 대단한 존재들이다”라고 이렇게 말해야 맞지 않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존귀한 제사장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믿지 않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길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도약하는 문제입니다.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는데, 말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렇게 혼란스럽게 말한다면 스스로를 잘 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2:9-10)
이게 무엇을 쓴 것입니까? 유대인 교회에 교인이 없어지자 이방인 교회들에게 쓴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 글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가 쓴 이 글 좀 읽어보십시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도통 이해가 안 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글을 쓰면서 자기 세력을 세우고 싶어 하고 쇼를 하려 합니다. 이런 것을 바로 쇼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바르게 처신하려면 바울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바울, 예전에 내가 잘못 생각했소. 이제 유대인 교회는 다 무너졌고 아무 의미가 없소. 당신이 전한 말이 옳고, 당신이 세운 교회가 바르다고 보오. 이제 내가 당신을 따르며, 당신이 전한 신학을 계승하겠소.”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겉치레를 좋아하여 교인들과 사석에서 모였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휴, 바울의 말은 투박하지, 그런 걸 다 하다니, 그의 것은 얼마나 투박한가. 내가 말한 신령한 돌, 신령한 제사, 산 돌을 보게.” 아이고 세상에, 베드로 같은 사람들을 잔뜩 현혹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말은 사실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도록 택하심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 글을 대문장가들에게 가져다주면 모두 엄지를 치켜세울 것입니다. 왜일까요? 단어 선택이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논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겉치레만 하는 것이요, 거창한 명사 몇 개로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며, 수많은 사람이 흥하고 수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사람이 왜 베드로처럼 됩니까? 늘 겉치레만 신경 쓰다가 결국 겉도 제대로 못 하고 실속도 챙기지 못한 채 이 말 저 말 두서없이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2:9)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자들임을 진정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 대구법이 얼마나 훌륭하게 쓰였는지 보십시오. 우리의 사명을 선포하는 것 같아 듣기에는 참으로 멋집니다!
육체의 정욕과 싸우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전서》2:11)
육체의 정욕이 언제 영혼과 싸웁니까? 마땅히 육체와 성령이 서로 대적해야지, 우리의 영혼은 본래 육체의 일부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소 엉뚱한 소리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금하라, 이 정욕은 영혼과 싸우는 것이다”라는 말은 듣기에 기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지, 우리의 영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하며, 성령을 따르든지 육신을 따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육신을 이긴 사람이어야 하고, 반드시 그 정욕을 이긴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면 열심히 하십시오, 힘내십시오!
너희는 행실을 선하게 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감찰하시는(또는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너희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베드로전서》2:12-15)
여러분의 품행이 단정해야 한다는데, 단정해질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같은 모습으로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회사에서 남은 승진했는데 나는 못 하고, 남은 월급이 올랐는데 나는 안 오르면 속에서 질투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것이 단정한 것입니까? 쓸데없는 말 길게 할 것 없이, 품행을 단정히 하는 것은 마땅히 여러분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방향을 맞추고, 비뚤어진 생각과 마음을 바로잡는 추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심하게 빗나갔었기에 지금 올바른 궤도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여러분도 너그럽게 봐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언젠가 제가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의 저는 품행이 단정한 상태와는 아직 거리가 멉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베드로전서》2:16-17)
여러분이 자유인이든, 부자유한 노예나 하녀, 하인이든 상관없이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싶습니까?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세상의 종이 되든지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하나님 아래에 굴복하든지 세상 아래에 굴복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하나님 아래에 굴복하십시오.
글을 쓸 때는 유용한 것만 쓰고 쓸데없는 것은 쓰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지을 때 온갖 난잡한 것들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주제와 상관이 없다면 문장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넣지 말아야 합니다. 주제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같은데, 말을 하다 보니 이 문장도 좋아 보여 넣고 저 문장도 좋아 보여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누가 베드로를 대신해 글을 써주었는지 아십니까? 실라가 대신 써주었습니다. 실라가 누구입니까? 실라는 마가처럼 오랫동안 베드로를 따랐던 사람이며, 나중에는 사도 바울도 따랐습니다. 그래서 실라는 한 다리는 바울의 배에, 한 다리는 베드로의 배에 걸치고 있었고, 마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이치에 맞고, 베드로가 전하는 말을 들으면 ‘아이고 세상에, 너무 거창하고 고상하다!’ 했기 때문입니다.
실라는 오랜 시간 애를 썼지만 베드로가 전하려는 말을 명확하게 정리해 낼 방법이 없어서, 그저 겨우겨우 정리해 낸 것이 베드로전서입니다. 실라는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써냈습니다. 다 쓰고 나서 다음 날 베드로에게 읽어주자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아니 아니, 내 뜻은 그게 아니라 저런 뜻이네. 그 문장도 다시 집어넣게. 이 문장은 절대 빼면 안 되네.” 베드로를 위해 글을 써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말이 정말 많습니다. 말도 엄청나게 많고 글도 엄청나게 많이 쓰지만, 사실은 머릿속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순종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베드로전서》2:18-19)
제가 다 읽고 나서 주제를 겨우겨우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으로 잡았는데, 그것은 매우 높고 높은 직분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읽어보면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 같지가 않고, 왠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에게 쓴 것 같지 않습니까? 순종하라고 하면서 거창한 단어들을 잔뜩 늘어놓는데, 사실 이런 단어들은 많은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2:21)
순종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합니다. 만약 제 식대로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단순히 순종할 것이 아니라 똑똑해져야 합니다.” 만약 사장이 매우 까다롭고 괴팍한 사장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사장보다 두 배는 더 똑똑해야 그를 제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화웨이의 한 CIO(최고정보책임자), 즉 기업 디지털화와 애플리케이션 도입을 담당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업계의 정설은 고객의 말을 그대로 다 들으면 얼마 안 가 잘리게 되고, 고객의 말을 전혀 안 들으면 훨씬 더 빨리 잘려서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객의 비즈니스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객의 머리가 항상 그렇게 잘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어떻게 훈련받았습니까? 기업에서 CIO로 일할 때 저는 똑똑해야 했습니다. 상대방의 비즈니스를 꿰뚫어 보아야 했고, 고객이 직면한 문제를 명확히 파악해야 했으며, 제가 만든 결과물은 그 사람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 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에는 직장을 잃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더 좋은 일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순종하라”는 이 말은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순종이란 지혜로운 사람의 몫이며, 어리석은 사람의 순종은 제 수명을 갉아먹는 일입니다.
너희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받아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2:20-23)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선행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면 큰 골칫거리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건너다 할머니가 쓰러진 것을 보고 부축해 주었다가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덤터기를 썼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부축해 주지 말라고 가르친다면, 제가 틀린 말을 한 것입니까, 옳은 말을 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선생님이 왜 이렇게 모질까? 할머니가 쓰러져도 부축하지 말라고 가르치다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덤터기를 쓰고 고난을 당해 선생님을 찾아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한다면, 저도 속으로 ‘아이고, 어리석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환경, 이런 도덕 수준의 환경에서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영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고, 찍으면서 120에 전화를 걸어야 합니다.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보가 되어버린다면, 그 고난에는 아무런 영광도 없습니다.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행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부축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몸을 세우고, 그분의 교회를 세우며, 그분의 제자들을 훈련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며 억눌린 자를 해방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섬기는 것 역시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기도를 해주고 있는데 그 사람이 죽어서 유가족이 당신이 기도해서 죽었다며 덤터기를 씌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날까지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분이 받으신 고난은 여러분이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나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바보가 되기 쉽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요, 귀 없는 자는 그냥 지나치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2:24-25)
어쨌든 서너 마디마다 한두 마디씩 쓸데없는 소리가 섞여 있어 참 기이합니다. 저는 이 장을 다시 구성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될 것인지에 대해 새롭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