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과 함께 《데살로니가후서》 전체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 《데살로니가후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이 책 전체의 내용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사실 앞선 《데살로니가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의 짧은 세 장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심,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배하셨는지를 명백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일입니다. 하지만 읽을 때 이것을 깨달아 읽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바울은 분명하게 설명했지만, 우리가 많은 경우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특히 기독교라는 환경 안에서 전해지는 온갖 기이한 관념들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점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누가 넘어지고 누가 다시 일어나는지, 이것이 어찌 된 일일까요? 이 세상에서 아주 기이한 일 중 하나는 사람들이 늘 남 탓을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왜 이 모양으로 사는가? 우리 부모님이 이랬고 저랬기 때문에, 그때 홧김에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과 결혼했다.” 부모 탓만 하고 자기 탓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사람들은 다 자기가 완벽하게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정말 말문이 막힙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 중 한 자매님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제가 “그렇게 육신을 따라 아이를 맞춰주면 안 됩니다. 그렇게 육신을 위하다가는 아이를 망치게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님은 “예전에는 안 그랬어요. 보세요, 제가 아이를 이렇게 대하고, 아이를 이렇게 훈육하고 저렇게 훈육했는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비극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아이의 육신을 편들고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자신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저는 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아이를 몹시 챙기고 아이의 육신을 심하게 편들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제 방에서 난리를 치며 소파 위로 쿵쿵 뛰어오르고 쿵쿵 뛰어내리다가 머리에 혹이 났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이 통제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다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규칙을 세워주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 엄마는 전혀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 엄마를 책망했는데, 당연히 그 사람은 제 책망을 듣기 싫어했고 자기가 아주 완벽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은 높이 들었다가 가볍게 내리치며 아이에게 살짝 안마를 해주는 식이었습니다. 그게 훈육입니까? 그건 간지럼 태우기일 뿐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많은 아이들이 버릇없이 망가지는 것은 훈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칙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삶의 방식에는 두 가지 결과가 따릅니다. 육신을 위하는 삶의 방식은 결국 패망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방금 전 일처럼 말입니다. 제가 아이의 육신을 편들지 말라고 하면,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이런 거예요”라며 온갖 설명을 늘어놓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 일입니까?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육신을 편들고 있는 것을 뻔히 보는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말을 해주면 또 온갖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만 결국 자기가 한 일이 맞고, 자기는 완전히 옳으며, 세상에서 가장 앞선 수준이라는 식입니다.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억지로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훈육하면 아이 또한 반드시 규칙을 지키는 아이가 됩니다. 아이가 틈만 나면 울고 떼를 쓰면 참 골치가 아픕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복이 많은 편인데, 어떤 복일까요? ‘호랑이 엄마’를 만난 것입니다. 호랑이 엄마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즉시 엉덩이를 때립니다. 아이는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다가, 결국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틀리지 않으시고 귀신도 틀리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틀린 것입니다. 누구도 탓할 수 없으며, 평생 남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공의로우십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체포되었습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와, 정부에 체포되다니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주님을 위해 고난받은 것일까요? 나중에 그의 동창을 만났는데, 그 동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왜 잡혀갔는지 말씀드릴게요. 교회에 커다란 현수막을 걸어놓았는데, 거기에 ‘방언 기도 금지’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방언 기도를 금지한다고요? 그것이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자업자득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십니까?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말씀드리지만 저는 지혜로운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 그렇습니다. 제가 단정 지어 말하지 않아도, 제가 한마디 하면 상대방은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고 말합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게 잘못된 거군요. 그럼 옳은 건 어떤 건가요?”라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묻는다면 지혜로운 사람일 텐데, 다들 자기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이미 삶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는데도 여전히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그러면서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선생님? 제가 선생님 방식을 따라야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 방식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에 맞는지 제대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제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패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너무 나쁘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보배를 걸러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배를 선별하고 계시는데, 문제는 사람이 과연 그 보배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는 매우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이 보배를 걸러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정말 대단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저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이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저 ‘만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영접 기도를 시켜 구원받았다’고만 합니다. 그것이 보배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마귀가 왜 창조되었을까요? 여러분은 마귀가 나쁘다고만 생각하겠지만 마귀도 쓰임새가 있습니다. 어떻게 마귀가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귀라는 존재는 매우 흥미롭게도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을 전담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입니다. “와, 하나님 너무하시네, 나를 괴롭히려고 귀신까지 보내시나”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단순히 괴롭히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배를 선별하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 한번 흔들려 침륜에 빠지고 넘어진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틈이 없는 달걀에는 파리가 꼬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어서 걸핏하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저 역시 깊이 탄식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귀신을 풀어놓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한 번 흔들려서 넘어질까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하여 그 썩어 빠진 논리 체계 속에 살아갈 때, 결국 하나님께서는 참다못해 작은 귀신 하나를 풀어 그를 흔들어 보십니다. 사실 큰 귀신도 필요 없습니다. 작은 귀신 하나로도 사람을 침륜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귀신도 탓하지 말고 하나님도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보배가 되고자 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보배가 되고 싶으십니까? 만약 하나님의 눈에 보배가 되고 싶지 않고, 자기만의 계획이 있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고, 자기만의 핵심 이익이 있다면 분명히 망하게 됩니다. 그 핵심 이익만을 붙잡고 살다가 한 번의 공격에 완전히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눈에 든 보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작은 귀신을 풀어놓으실 때마다 그 작은 귀신을 물리쳐 이겨야 합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중간 귀신을 풀어놓으시면 그 중간 귀신도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당신 안에 믿음이 있고, 진리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며, 귀신이 올 때마다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게 하십니다. 또 다른 귀신이 올 때마다 다시 육신을 다루게 하십니다. 결국 당신이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지는 당신의 믿음과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배를 선별하시는 방식이므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머릿속이 맑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논리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이러한 논리를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제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어떻게 강해했는지 들어보십시오. 오늘은 요약하는 시간입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이 성화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충만히 살아낼 때까지 거듭 승리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당연히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수 있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한량없이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과거에 앓았던 질병들은 모두 마귀가 여러분을 무너뜨린 것인데,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이 마귀를 불러들여 자신을 망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을 들었으니,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패망의 나날을 보냈는지 분명히 깨달았습니까?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계속 그 속에 머물러 살면 계속 무너질 뿐입니다. 비록 병은 고침받았을지라도 생각이 고침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의 구원관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온갖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며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구호나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호를 외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입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실재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 진정한 실재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직업을 갖고 교회의 질서를 지키라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드러눕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가난해집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를 세웠는데 어떤 교회가 되었습니까? ‘주님의 재림만을 바라보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의 재림만 고대하다 보니 사람들 안에 기형적인 재림에 대한 갈망만 자극했습니다. 2장에서 설명하듯이, 왜 그렇게 주님의 재림만을 바라볼까요? 이 땅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싫고, 온전한 직업을 갖기 싫어서 그저 드러눕고만 싶어 하다가, 주님이 오시면 완전히 편히 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과연 그런 것일까요? 이 땅에 살면서는 저승사자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도 그 모양으로 살았는데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천국에 온통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저는 차라리 가지 않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온전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임을 알 수 없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는 것만 일등이라면 천국에서 당신을 데려다 어디에 쓰겠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이 살아있는 동안 진리를 참되게 믿고 따른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진리를 따른다면서 저승사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사람이 온전한 일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검증하는 진정한 시험대입니다. 배움의 자세가 없는 사람은 일하는 것이 너무나 힘겹습니다. 그러고는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며 ‘주 예수님이 오시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교회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은 성도들로 하여금 온전한 일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만 하려고 하면 머리카락 빼고 온몸이 다 아파요. 일만 하려고 하면 머리카락 빼고 온몸이 쑤셔요”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저도 몇 마디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시절에 배움을 진정으로 즐겼다면 배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일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쁨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겠지만, 다들 원합니다.
바른 도를 굳게 지키고 성령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신입니다. 그 육신이 우리를 망치는 것이기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 일하는 것이 괴롭습니까? 육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왜 공부하는 것이 괴롭습니까? 육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왜 바비큐를 먹을 때는 즐겁습니까? 육신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왜 여행 갈 때는 신이 납니까? 육신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 저에게 거짓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제 앞에 와서는 “선생님, 저는 노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합니다.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노는 것을 안 좋아한다고요? 그렇게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노는 것을 안 좋아할 수 있습니까? 놀 때 얼마나 즐겁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대자연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맞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놀기만 하면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롭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참으로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고, 돈을 버는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놀기 위함입니다.
한 번 놀 때 수만 위안을 써버리고는 다시 돌아와 돈을 법니다. 일할 때는 죽상을 하고, 놀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제가 놀 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이지 노는 데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일까요? 일을 제대로 완수하고 느끼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매우 크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제 동역자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억지로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며, 여러분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제가 억지로 만든다고 바뀌겠습니까? 바꿀 수 없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정리해야 합니다. 제 동역자들이 사역을 나가 손님을 대접하고 싱가포르의 야경을 보여주러 갈 때가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건물 위의 거대한 배, 그 위의 수영장 같은 랜드마크를 보여줍니다. 접대를 위해 그렇게 하지만, 구경이 끝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별것 없습니다.
나중에 보니 제 동역자들은 참으로 남달랐습니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되는 틈만 나면 한쪽에서 전화를 걸어 성도를 가르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여기저기 아프고 힘든 이들을 돕고는 돌아왔습니다. 세상 놀이에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냄새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온전한 일을 한다는 것은 다 같이 돈을 모아놓고 먹고 마시고 놀며 헛소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삶을 매우 풍성하게 누리며 평생을 보람 있게 삽니다. 반면에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것만 바라고 그때만 즐겁다면 인생은 망가지고 서서히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규칙이자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는 원칙입니다. 가난하다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온전한 일을 하지 않는데 어찌 가난하지 않겠습니까?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사기당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십만 위안의 빚을 질 수 있겠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교회 전체가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이전에는 저에게 교회가 전임 사역자를 두어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전임 사역자들이 앉아서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만 계속 붙잡고 있는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천막을 지었으니 우리도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는 이른바 전임 사역자가 없습니다. 우리 안의 소그룹 목회자들도 양을 칠 수 있고,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양육을 감당하며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잘 해내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어찌 잘하지 못하겠습니까? 천막을 지어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해서 나태하게 드러누워 온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도들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양육하는 성도들 모두가 직장에서, 일터에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들, 목회자들과 동역자들은 양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직장 업무에서든, 관리직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겪는 문제와 곤경을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중 어떤 목회자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을 존중하라고 요구합니다. 저조차도 사람들에게 나를 존중하라고 요구하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존중하겠습니까? 성도들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늘 하던 뻔한 말 세 마디만 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 많은 훈련, 더 많은 가르침, 더 많은 회개, 그리고 그들의 삶에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해 주어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의 악습을 다루어 주어야 하는데, 다루어 준 적이 없거나 상대방이 그 훈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직장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법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교회에 와서 가면을 쓰고 거룩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이란 교회 안에서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거룩함, 영광, 능력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어디에서 다루어집니까?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육신을 다루어 줄 직장 상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육신을 다루어 줄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갖가지 핍박 가운데서, 그 핍박이 우리 안의 육신에 속한 정욕을 다루기 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틀리지 않으시며 귀신도 틀리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몸에 생긴 질병 치고 육신을 따른 부패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고생을 겪을 만큼 겪고 나서야 주님을 믿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고 나서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최고의 복임을 알게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릴 수 없고,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생각하십시오. 섬김은 은혜입니다. 섬기다 보면 자신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섬기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을 때 어찌하겠습니까? 고작 종교적인 용어나 읊조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저는 종교적인 미사여구를 쓰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으며, 철저히 실질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필요에 맞추어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필요에 맞추어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저를 속이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상한 말만 늘어놓으면 여러분도 똑같이 고상한 말로 맞받아칠 텐데,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의 구원관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은 우리 안에 무너뜨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분명 우리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천 마디 만 마디를 해도 결론은 하나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마귀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적절한 때에 마귀를 보내어 저를 훈련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작은 귀신을 이겨내고, 더 큰 귀신을 이겨내고, 그보다 더 큰 귀신도 또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승리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제가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이며, 나의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신 분입니다! 저는 결코 하나님께 왜 이러시냐고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고 선하십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독일인을 택하여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아프리카로 날아가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매 집회마다 수백만 명이 모이는 원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목양의 방식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이 일을 위해 택함받은 첫 번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 제가 첫 번째가 아니라고요? 그럼 몇 번째인가요?” 하나님께서 “너는 네 번째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앞선 세 사람은요?” “앞의 셋은 순종하지 않고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 이제 다섯 번째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이 고백이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에서 중국인 교회를 개척한 자로 저는 네 번째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네가 네 번째다”라고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화인 사명 신학을 세우고, 신학의 도리와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를 명확하게 정립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셨기 때문이며, 제게 주신 크나큰 은혜입니다. 제 안에는 굳은 결단이 있으며, 형제자매 여러분도 저와 동일한 결단을 이어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 사역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잘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 제 안에서 주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든 순종하여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살아내고, 주님의 눈에 보배가 되겠습니다. 저는 기필코 주님의 보배가 될 것입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직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청소를 하든 연구를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도우시며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작은 귀신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중간 귀신이 올 때마다 물리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승리하도록 예정하셨으며, 주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알고 보니 나는 하나님께 택함받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셨고, 승리하도록 예정하셨으며,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예정하셨고,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분명히 깨달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라
만약 집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집안일이라도 충실히 하십시오. 이것이 교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자신의 육신을 스스로 다루지 않는다면 목회자가 다루어 줄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쓰레기와 찌꺼기를 치우려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서서히 제거해 주어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도록 도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화인 사명 신학의 이념이며, 화인 사명 신학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저 드러누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에게는 한 성을, 어떤 이에게는 다섯 성을, 또 어떤 이에게는 열 성을 맡기실 것이며, 어떤 이는 이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사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게 묻는다면, 저는 나태하게 늘어져 있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점심에 또 한 잔, 저녁에 또 한 잔 마시고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먹는 삶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이 어찌 좋겠습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존재감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살아있는 동안 주님의 영광을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끊임없이 주님을 본받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핵심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닥쳐와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승리입니다.
결론
《데살로니가후서》 전체를 빠르게 요약하여 중심 줄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확히 정리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륜에 빠져 멸망의 자식이 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 안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과 논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침륜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기를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까? 우리 형제자매 모두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