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요한복음11장-죽은 자의 부활로 생명의 본질을 알게 하소서

서론

이 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일어난 사건, 즉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장의 전반부를 살펴보면 이 장의 주제는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올드 존이 쓴 이 구절은 실제로 우리를 이해하게 합니다. 인간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어떤 곳에 가까이 가서 부활이 내 안에 있고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 기독교적인 장례식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 장례식은 다음 구절을 사용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1:25-26)

이것은 사실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삶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반드시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좋은 친구인 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어가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에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예수께서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으니 그가 고침을 받았으리라 그녀는 예수께서 계시기만 하면 나사로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거기 가지 아니하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나사로가 죽은 후에 나사로에게로 가시니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불평하는 어조였다. 사람을 보내어 오지 말라고 하여 며칠을 더 머물렀는데 무엇을 하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11:25-27)

주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다음에 예수님께서 한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셔서 무덤을 열고 잠시 기도하시니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 묻혔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된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삶과 죽음의 모든 개념이 다시 세워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고 소경이 볼 수 있는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우리는 이 사람에게 생명의 본질을 알려야 합니다.

삶과 죽음을 꿰뚫어보고 자유롭게 살다

이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과 삶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에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은 매우 무력했습니다.우리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무기력한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해결책. 당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로 받아들이고 당신의 삶이 그분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언제 살고 언제 죽을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즉,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얽힘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얽힘에 갇히게 됩니다. 사용 가능한 것과 사용할 수 없는 것을 배려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즉, 사람이 생사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 그 무엇도 당신을 제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지배를 받습니다.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게 산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공짜인 것만이 선합니다. 즉,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지 않습니다.

마귀의 통제는 사람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자유로운 시각이 있다면, 당신은 자유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돈이 당신을 지배할 수 없고 인간 관계가 당신을 지배할 수 없으며 부모가 당신을 지배할 수 없으며 자녀가 당신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좋다.

어떤 사람이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우셔야만 하셨습니까? 그럼 사람이 밥 먹으러 가고 먹고 나면 죽는다? 신이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하나님은 사람이 자유를 갖는 것을 좋게 여기시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을 나쁘게 보신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삶에 대해 조사를 해보면 우리는 자유를 매우 높은 위치에 두었고 이제 사람들은 자유를 인권으로 바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나는 자유도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며, 자유를 잃는 것은 영적 속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당신의 자유를 잃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버려라. 돈에 휘둘리지 말고 일이 룰이 되거든 일을 버려라. 신은 당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사실 자유의 상태는 매우 아름다운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수능을 보려고 하는데 나는 수능을 보려고 하는데 나는 합격을 해야지! 멋진 모습으로 시험에 응시하고, 멋진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매년 중국의 대학 입시 시즌은 실제로 상대적으로 사망률이 높은 기간입니다.왜? 많은 사람들이 대학 입시를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삶과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면 그의 상태는 매우 이상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괴물처럼 보고 그들도 우리를 괴물처럼 봅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과 같은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일이 우리를 통제할 수 없고, 대학 입시가 우리를 통제할 수 없으며, 공부가 우리를 통제할 수 없으며, 그러면 우리는 매우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도록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 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을 꿰뚫어 본 후에 당신의 환상은 예수님의 환상과 같기 때문에 당신은 내가 부활이고 나는 생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 11:25-26) 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십니까? 왜 살아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영생에 들어가도록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정의는 나와 여러분의 정의가 다르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정의가 세상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에 대한 세상의 이해 속에 머무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의 정의가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정의가 맞습니까? 의학적 관점에서 사람의 죽음은 심장 박동이 멈추고 뇌 세포가 기능을 멈춘 때입니다. 그러나 의학이 정의하는 죽음은 성경이 정의하는 죽음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와 연결된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요 누구든지 예수에게서 끊어진 자는 살아도 죽은 자니라.

베다니로 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다가 다시 오셨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그는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더라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나사로를 부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니라 그를 쌌던 수의가 풀렸더라 예수께서 정상적인 생명을 부활시키셨느니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

오늘날 삶과 죽음에 대한 당신의 관점은 삶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셨고,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에 죽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다. 오십, 예순, 일흔, 여든에 죽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죽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Desmas라고도 불리는 Thomas가 동료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가서 그와 함께 죽자. (요한복음 11:16)

토마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나요? 사실 그는 몰랐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들어주실 줄 압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1-24)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다음 구절을 주의 깊게 다시 읽어 봅시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울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갔다. 마리아가 예수께 나아와 그를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려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여 오시옵소서 예수가 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말했다: 그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느냐?" 다시 예수님은 속으로 신음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1-38)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한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한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거기서 우셨으며 예수께서도 그와 함께 우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이 너무 피상적이었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사람의 죽음관은 정상인의 죽음관이고 기독교인의 죽음관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죽음관은 사람이 죽으면 심장이 뛰지 않고 뇌가 기능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사실상 사람의 영적 죽음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무엇인지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분리되는 것을 사망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될 때 그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니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과 통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멸시할 수 있고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John Sr.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삶과 죽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베드로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전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형제자매들은 암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생사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떤 암 환자에게 사역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당신이 이 사람이 육체적으로 치유되도록 허용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과 하나됨의 연결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의 영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일종의 연결점에 들어갈 수 있을 때 그는 죽어도 부활할 것이며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육신의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라 기껏해야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일 뿐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건강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을 보면 죽음으로 여겼지만, 주 예수님이 본 것은 영적인 죽음, 곧 참된 죽음이었습니다. 즉, 영적 부활은 매우 기적적인 일입니다. 나사로의 영은 그의 몸을 떠났지만 그의 몸은 무덤에 두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그의 몸에 다시 채우십시오. 그러면 그의 온 몸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입니까?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설날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함께 카드 놀이를 했는데, 그 당시 아이들은 몇 센트의 거스름돈으로 카드 놀이를 했고, 몇 센트는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4명의 아이들이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항상 길을 잃기 때문에 그는 두 개의 향을 피워 시계 양쪽에 꽂고 그곳에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알지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다음 천국에 갔고 Lingling은 그곳에서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네 명의 아이들은 어린 유령 무리를 이끄는 성인 여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카드 놀이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여자의 손을 흔들자 한 무리의 녀석들이 네 사람을 묶고 데려갔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이웃 사람들은 네 아이가 모두 기절하고 숨이 차고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은 침을 사용하여 아이들을 찔렀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 깨어 난 후 그들은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했고,이 유령들이 그들을 데려 간 후 그들이 강을 건너려고하고 작은 유령들이 그들을 놓아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돌아왔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몸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영이 육신을 떠날 때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는 사실 문화대혁명 때였는데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시골에서는 계속 일어났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영적인 삶을 살고 싶은지 육신적인 삶을 살고 싶은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삶을 이해하고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예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우시며 눈물을 흘리시니, 이는 여러분이 삶과 죽음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매우 강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육체적인 삶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도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으면 끝난 줄 알고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즉, 사람을 만났을 때 그의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 상태는 사실 삶과 죽음에 대한 무지입니다. 사람이 삶과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셨습니까? 침착하게 직면하십시오. 나사로는 실제로 죽음을 침착하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명확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 나사로를 낫게 했습니다. 오늘은 나사로가 4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는지 여부를 말씀드리지만 나사로는 나중에 죽었기 때문에 오늘은 볼 수 없습니다. 왜? 그의 영혼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살 때가 있고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 이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면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지만,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육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육신의 일을 좇으면 반드시 죽을지니 지옥에서 죽으리라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몸이 아파서 아침에 운동하러 나가야 한다고 하면 도움이 될까요?

영계의 일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운동으로 1분을 더 살 수 있습니까? 아니요.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이해하면 육신의 행동 패턴으로 질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패턴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영계와 관련이 있다면 모든 질병도 영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입장에서 나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모든 병이 귀신과 관련이 있느냐? 나는 '예'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알다시피, 이것은 이단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창세기에 죽음에 대한 말씀인데, 죽음은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반드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과정이다 아담은 900세 이상을 살았지만 900세 이상도 죽음의 과정, 즉 출생, 늙음, 질병, 죽음이다. 우리의 죽음관이 인간관이라면 생로병사를 자연법칙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질병 뒤에 영적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사람은 죽는다 이 과정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나사로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셨으니 한 가지를 증명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영적이고 삶과 죽음과 질병이 모두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영혼이 다시 번성하도록 하십시오.

산책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않아! 우리 엄마는 아주 완고한 할머니입니다. 엄마: 스퀘어 댄스에 가지마, 그 좀비 댄스에 가지마. 엄마가 말했다: 운동! 그런 다음 나는 말했다 : 그럼 당신은 가고 있습니다, 그냥 가십시오! 그 결과 나는 3일 동안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그 결과 그녀는 많은 죽음의 영에 오염되었고 내가 다시 그녀에게 기도하자 죽음의 영이 쫓겨나고 그녀의 호흡이 좋아지고 다시 정상이 되었습니다. 영계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정말 몇 번이나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나는 마작을 해야 하고, 두뇌를 사용해야 하고, 치매를 피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알츠하이머병이 악령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악령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노인성 치매의 발달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돌보기, 늙음, 아플 것, 의사를 만나야 함, 의사를 만나려면 부자가되어야합니다. 돈이 없으면 목숨도 못 구하고 돈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치매입니다. 천천히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가 돈을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치매에 걸리게 할 뿐이지, 그것이 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당신의 행동 패턴을 결정합니다. 만약 당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여전히 육신적인 관점이라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슬퍼하실 것입니다. 내가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느냐, 살아야 하니까, 사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진심입니까?

한 번도 고생한 적 없고 살았고 55세까지 살았고 내 인생은 당신보다 나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합니다. 바쁘신데 왜 주님을 예배할 시간이 없으신지요! 그럼 당신은 죽을만큼 바쁩니다. 나는 당신을 격려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죽을만큼 바쁘다. 흥미로운? 지루한! 인생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나는 생명이니(요 11:25) 생명은 다 주 안에 있나니 만일 너희가 주와 연결되지 아니하면 무엇을 하느냐?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간증을 듣든 직접 경험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내면의 관념을 전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의 개념이 완전히 전복된다면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내가 당신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했는지에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죽으러 온다면 당신을 계속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해했나요? 당신과 나에게 삶과 죽음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데려가시면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의 때와 죽을 때,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25)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사람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면 병원에 있든지 교회에 있든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반드시 죽으리라. 마음을 정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기도하라, 치유하라, 무엇이 두려운가?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아시고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내가 셋째 날에 부활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즉,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요, 이생의 삶의 길이 아니며, 질병에서 치유되는 길이 아니라, 이생에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 . .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살아 있을 때에 영생의 일부인 영생에 있느니라. 죽든 죽든 몸은 죽어도 정신은 살아 있으니 무엇을 먹든 마시든 맵지 않고 그대로 먹고 마시니 정신이 살아 있어 더 잘 살 수 있다. .

삶과 죽음을 냉정하게 마주하다

예수님은 육신에 얽매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걸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이적도 한 가지 증거가 있으니 곧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요한복음의 말씀 육신이 무익하면 무엇을 하여 보존하리요 삶과 죽음은 지켜져야 하는데,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의 모든 자녀들에게 전화를 걸어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지불하다! 나는 최고의 약을 사고 싶다. 최고의 약도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최고의 약은 없습니다. 최고의 약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모든 사람을 격려합니다. 우리 중 일부는 암에 걸렸습니다. 치료를 ​​받고 싶다면 치료를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고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산다면 기도는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후에 나는 생사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사람에게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특징은 그들이 전날 밤 그곳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리를 땅에서 침대로 옮기고 침대에 누웠을 때 숨가쁨으로 사망했습니다. 정말 멋진 일입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인데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다른 방법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런 기회가 있으면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예수님을 위해 죽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든지 귀신을 쫓아내든지 잡혀 죽든지 죽든지 너희가 나를 위하여 축하해 줘야지 아 정말 축하하기 위해 폭죽을 터뜨리고 싶다! 그것은 보상의 지름길이며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좋아할 수 있니?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알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알았기 때문에 담대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안개 속에서 어지럽게 살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할 수 있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나오라 명하실 때에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심에 감사하나이다 당신이 제 말을 많이 듣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주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1:41-42)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나오는지라 즉,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그의 육신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으로 나와 당신 안에 있는 삶과 죽음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는 것을 오늘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들었고, 나는 당신이 항상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11:41-42). 여기서 나는 당신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이 문장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은 세상에 있는데 왜 예수님은 당신이 항상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은 믿음을 실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작은 믿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즉, 당신이 자유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본다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십니까? 즉, 아버지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저에게 묻는다면 왜 우리 사이에 기적이 그렇게 많습니까? 내가 이끄는 한 무리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죽음의 분대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조급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이며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늘 아버지께서 종종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것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하셔서가 아니라 너희는 무엇을 하느냐? 당신은 기껏해야 꼭두각시일 뿐이고, 우리는 자유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런 다음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적극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젯밤에 네가 가서 나사로를 살리라 하셨고, 오늘 내가 갔더니 나사로가 살아났느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것이 예수께서 하실 일이니 내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싶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말했다: 아버지, 당신은 내 말을 들었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확실히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당신의 믿음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과 내가 삶과 죽음을 꿰뚫어본다면 우리는 정말 삶과 죽음에 관심이 있습니까? 신경쓰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울처럼 죽은 자를 살리실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화를 냈습니다.

왜? 우리는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왜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운명을 살라고 요청합니까? 우리가 깨닫지 못하노니 잘 살 줄로 생각하지 말라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밝히 보는 것이 나으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으나 후에 나사로는 죽었느니라 살리는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너희는 육신을 좇지 말고 영을 좇으라

연예계에 성형하러 많이들 가는데 40대 50대 되면 못보는데 이거 저거 빡세고 못생김 몸매 엄청 신경쓰는데 결국 그들의 몸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을 살게 하는 영은 영생에 나타날 뿐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한탄하시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여러분과 나에게 알려 주신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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